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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선영의 침대 머리맡에 있는 화장대로 갔다. 거기 아래쪽에 있는 서랍을 열더니 두툼한 서류철을 꺼내왔다.
"제가 오늘 여기 온 건 이거 때문이에요. 요새 이거 때문에 골치가 많이 아프답니다. 이것만 아니라면 저도 지금 선생님이랑... 호호호..."
"아, 예."
서류철에 감사해야겠군. 그녀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서류철을 펼치자 빼곡하게 적힌 글자와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 몇 달간 보아오면서 저절로 눈에 익은 글씨체였다. 둥글둥글하면서도 다소 어린아이의 글씨체 같은... 바로 선영의 글씨체였다.
"뭔가요, 이게."
"아, 저희 가게 장부요. 여태까지 선영이가 관리하느라고 저는 신경도 안 쓰고 살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고 나니 제가 하지 않으면 안 되어서요."
문득 얼마 전 유진이가 말한 게 생각났다. 자기 엄마가 답지 않게 일감을 집에 까지 가져와 고민하고 있더라는.... 그런 일의 일환인 모양이다. 그나저나 이걸 관리하던 사람은 대체 지금 어디에 있기에 생전 관리 안하던 사람이 하겠다고 나선 걸까.
"선영이가 어디 멀리 갔나요?"
"멀죠. 충남인데.... 아, 모르셨어요?"
장부를 넘기며 무심하게 대답하던 그녀는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네. 얼마 전에 새벽에 갑자기 전화 오더니 어디 같이 가자고 한 이후로 연락이 없어요."
"흐음... 그때 한 전화가 선생님한테 거는 거였군요... 흐음......같이 가자고 했다고요?"
"네."
"그런데 왜 같이 안 가셨어요?"
"어, 저 그게, 다음 날, 유진이랑 데이트 약속이 있어서..."
황급히 두 손을 들어 입을 틀어막았지만 이미 유진이의 이름은 말하고 난 뒤다. 정신 차려, 최한석. 지금 눈앞에 있는 사람은 그 여고생의 엄마란 말이다!
그러나 역시 유미라고나 할까. 그녀는 자신의 딸과 데이트했다는 남자를 보고도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일전에 그녀가 말했던 "자신이 웃고 있는 이유"가 떠올랐다.
"저기, 혹시..."
"혹시 뭐요?"
"알고... 계셨습니까? 제가 유진이랑... 혹은 선영이랑..."
유미는 딱 잘라 대답했다.
"아뇨. 몰랐어요."
"지난번에 저한테 하신 말씀으로는 앞날을 보실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렇다면 제가 유진이나 선영이랑 친하게 지낼 거라는 걸 미리 알고 계신 거 아닌가요?"
유미는 깔깔 웃으며 손가락을 들어 내 이마를 콕 찔렀다.
"여전히 이해를 못 하고 계시네요. 선생님이 똑똑한 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기에 유진이 과외선생으로 붙여드리긴 했지만, 역시 제 이야기까지 이해하는 건 무리인 것 같아요. 괜찮아요. 그건 그것대로."
문득 맨 처음 과외소개를 받았던 날이 생각난다. 진호 선배가 말하길 굳이 우리 과 사무실에 전화 와서 과외 선생을 찾는다고 했었지... 고개를 들어 유미를 마주보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웃고 있을 뿐이었다. 그 웃음 너머의 진짜 표정이 궁금했지만 어차피 물어보아야 제대로 대답해줄 것 같지도 않았다.
"근데, 선생님이랑 선영이가 친~하게 지냈다라... 정말 단순한 과외 선생님과 학생 사이 맞아요?"
묘하게 말을 끄는 부분에서 나도 모르게 선영의 침대를 바라보긴 했지만 애써 참아냈다.
"마...맞는데요."
"다른 거 가르쳐주고 막 그런 거 아니죠?"
"다른 거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이야기 많잖아요? 과외 선생님과 여학생의 은밀하고 농염한 비.밀.스.러.운.행.위."
".........."
없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있다고 하면 이 무슨 낭패인가.
"아, 그러고 보니 선생님 양다리네요? 유진이도 과외하고 계시잖아요."
뜨악. 이 아줌마는 대체 자기 딸을 두고 무슨 이야기를 하는 거냐. 한사코 손을 내저으며 부정했다. 맹렬한 부정은 긍정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격언이 떠오르긴 하지만... 그래도 지금은 부정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유진이랑은 정말로! 정말로! 아무 일 없습니다."
"어머, 그럼 선영이랑은 일이 있었나 보네요."
"........."
대답을 했어야 했다. 무슨 말이라도 부정의 의미를 담아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난 이미 타이밍을 놓쳤고, 그 간격을 알아차린 유미는 아주 크게 깔깔거리며 웃었다. 이런 걸 가리켜서 유도심문이라고 하던가. 이건 뭐... 독립군 취조하는 나까무라 순사도 이것보단 덜 잔인하겠다.
"흐음... 이러면 이야기가 또 달라지는데....."
선영에 대해 더 물어보았다가는 대체 무슨 이야기까지 나올지 몰라 앞에 놓인 장부 이야기로 황급히 화제를 돌렸다.
"이...이거 정리하셔야 된다면서요? 유미 씨. 네에?"
"뭐, 정리야 정리 나름이죠. 선생님의 양다리랑 이리저리 가지 쳐놓으신 것도 정리...."
"험험. 이거 급하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유미 씨?"
그제서야 유미는 내게서 시선을 거두고 다시 장부를 보았다. 나를 보며 빙글빙글 웃던 표정이 사라지고 이마에 살짝 주름이 잡혔다.
"아, 정말이지. 저는 숫자 같은 거랑 정말 안 친하단 말이에요. 이런 건 어디 맡기면 딱 해주고 대신 알아서 해주는 데 없는 건가요?"
"그야 회계사무소 같은 데 의뢰하시면...."
"이건 술집 장부라구요. 탈세도 적당히 하고 주류 신고도 적당히 해야 돼요. 그걸 남한테 맡길 수 있나요."
"그...그렇습니까?"
탈세와 주류 신고를 적당히라... 그런 의뢰를 받아주는 회계사도 있으려나. 찾아보면 있을 것 같기도 한데.... 문득 날 바라보는 유미의 시선이 느껴졌다. 어쩐지 불안해졌다.
"선생님, 대학생이죠?"
"그런데요."
"아르바이트 하나 안 하실래요?"
"아르바이트요?"
아르바이트라는 말을 듣고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싶었는데, 그 설마가 맞았다. 유미는 자신의 장부를 가리키며 말했다.
"이거 정리하는 아르바이트요. 선생님이라면 남도 아니니 믿고 맡길 수 있고 또 대학생이니까 이런 것도 잘 하시겠네요."
"대학생이 이런 걸 잘 한다는 건 편견입니다. 전 장부 정리 같은 건 한 번도 안 해봤어요."
게다가 나보고 남이 아니라니.. 그건 또 무슨 소리일까.
"지금부터 배워서 하시면 되죠. 보수도 넉넉히 드릴게요."
"아니, 지금 보수가 문제가 아니라...."
손을 내저으며 거부하려고 하자 유미가 살짝 인상을 썼다.
"지금 선생님이 거부하실 처지인가요?"
"......처지요?"
"네. 여러 가지로. 자~알 한번 생각해보세요."
늘 생글생글 웃고 있을 때는 몰랐는데 유미가 인상을 쓰니 유진이와 상당히 닮았다. 아니, 유진이가 엄마를 닮았다고 해야 옳겠지만, 아무튼. 유진이가 가끔씩 시전하는 "자신의 제안을 절대 거부 못 하게 만들기" 스킬의 오리지널을 맛보고 있자니 아주 죽을 맛이다. 날씨가 그리 더운 것도 아닌데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흐른다.
"하... 하겠습니다."
"흐음. 맡겨도 되려나요?"
"....하게 해주십시오. 모르는 부분은 열심히 공부해서라도 해놓겠습니다."
"좋아요. 그렇게까지 말씀하신다면야."
유진이의 말빨과 사람을 가지고 노는 처세가 대체 어디서 왔는지 이제 명확해졌다. 피는 못 속이는 건가. 하아. 난 유미의 양해를 구하고 장부를 살피기 시작했다. 기본적으로 덧셈과 뺄셈으로 이루어지는 게 장부지만 여러 가지 요소로 인해 비율이라든가 항목별로 구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저기, 이거 제가 가지고 가서 정리해 와도 되려나요?"
"가지고요? 어딜요?"
"내용을 보니 엑셀이나 DB로 정리하는 게 빠를 것 같아서요. 학교에 가면 컴퓨터가 있거든요."
"컴퓨터? 어머,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유미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 제가 하는 공부 중에는 수치제어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대량의 숫자를 다룰 때는 그만한 게 없거든요."
"선생님 컴퓨터는 없어요?"
"비싸서...."
내 대답을 들은 그녀는 조금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흐음. 아무리 그래도 이건 영업 비밀 같은 건데 들고 나가기는 좀...."
"그런가요. 그럼 뭐, 그냥 수기로 해보겠습니다."
시간이야 걸리겠지만 뭐, 원래 선영이 하던 거라고 하니 좀 더 파악하면 되겠지 싶었다. 그러나 유미는 내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그러실 필요는 없어요. 일단 가죠."
"네? 어딜요?"
"컴퓨터 필요하다면서요. 사러 가요."
저녁 먹을 찬거리를 사러 가자는 것처럼 유미는 선뜻 나섰다.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고 했지만 유미는 한번 정한 사항은 뒤로 물리지 않는 여자였다. 선영의 방을 나와 유미의 차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어서 오세요."
그녀와 나는 한 컴퓨터 대리점에 도착했다. 안으로 들어서자 점원 한 명이 나와 우리를 맞이했다. 유미는 점원에게 이 가게에서 가장 좋은 컴퓨터를 보여 달라고 했다. 사양을 요구한 것도 아니고 용도를 말하는 것도 아닌 "가장 좋은 컴퓨터"라.... 이건 뭐 대놓고 컴퓨터 초짜라고 이야기하는 거 아닌가. 대리점이니 가격을 후려치거나 덤터기를 씌우지는 않겠지만 그래도 모를 일이다. 점원은 우리를 번갈아 보며 물었다.
"어느 분이 쓰실 건데요."
"이쪽 분이요."
유미가 나를 가리키자 점원은 활짝 웃으면서 말했다.
"남편 분이 상당히 젊어 보이시네요. 이쪽으로 오시겠어요?"
난데없이 유미의 남편이 되어버렸다. 내가 인상을 쓰며 아니라고 하려는 순간 유미가 먼저 가로채며 수긍해버렸다. 점원의 안내를 받아 가는 동안 유미는 뭐가 그리 좋은지 깔깔거리며 뒤따라왔다.
"남편이래요, 남편. 호호호."
"데스크탑으로 찾으시는 건가요, 아님...."
"그건 얼마인데요?"
엑셀이나 DB 돌리는 용도니까 그렇게 고사양까지는 필요 없겠지 싶어 아카데미 버전이 주욱 늘어선 라인을 눈여겨보고 있었다. 486DX 정도면 무난하겠다 싶어 가격을 물어보니 189만원이란다. 한 학기 등록금의 뺨을 후려치는 그 가격에 할 말을 잃고 더 저렴한 것으로 찾아본다. 그런데 바로 그때,
"어머나. 이것도 컴퓨터인가요?"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던 유미가 진열대에 놓인 노트북을 가리켰다. 내가 점점 싼 모델로 내려가고 있자 내게 흥미를 잃던 점원이 그 쪽을 향해 환하게 웃으며 달려간다. 그러면서 그녀에게 노트북에 대한 사양을 마구 늘어놓기 시작했다. 166MHz 펜티엄MMX에 32MB RAM, 3GB 하드디스크, 10배속 CD롬에 2MB 메모리가 달린 비디오 카드가 어쩌구저쩌구.... 그러나 생긋 웃고 있는 유미의 표정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뭔 소리니."
"흐음.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지만 암튼 이 가게에서 이게 제일 좋다는 거죠?"
"그럼요, 손님. 안목이 있으시네요."
점원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유미가 결정을 내렸다.
"그럼 이걸로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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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금 언급된 노트북 사양은 97년도 신문에 실린 당시 "최신형" 노트북의 사양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