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78화 (7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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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원은 신이 나서 새 제품으로 꺼내오겠다며 창고 쪽으로 날듯이 달려갔다. 뜨악! 난 황급히 유미에게 다가가 물어보았다.

"유미 씨, 가격도 안 물어보고 사는 겁니까?"

"왜요? 이게 제일 좋다잖아요."

"노트북은 더럽게 비싸다구요. 게다가 이건 펜티엄급....."

"팬티? 컴퓨터 이름치고는 꽤 야하네요?"

".......그런 아저씨 유머를 실제로 하는 사람이 있군요. PC통신에서나 있는 줄 알았는데."

"통신? 아, 이거 통신도 되는 거예요? 어머, 신기해라."

유미와 유진의 공통점을 또 하나 발견했다. 남의 말을 결코 듣지 않는다. 자기가 결정한 건 무조건 옳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다. 하아. 참 대단한 모녀지간이다.... 이윽고 점원이 포장되어 있는 노트북 가방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내용물을 하나하나 꺼내며 설명하는 동안 유미는 신용카드를 꺼내더니 결제를 했다. 얼핏 들으니 노트북의 가격은 389만원. 게다가 일시불. 헐..... 점원이 가방에 노트북을 챙기는 동안 조용히 물어보았다.

"저기, 프로그램은 깔아주시나요?"

"뭐 필요하신데요? 각종 게임 CD는 따로 드립니다만..."

"아뇨, 게임은 필요 없고 오피스 프로그램으로 깔아주세요."

"아, 그러세요. 잠시만요."

점원이 노트북을 가져가 다른 컴퓨터와 연결을 하더니 무언가 복사하기 시작했다. 한참 후, 유미와 나는 대리점을 나왔다. 내 어깨에는 노트북 가방이 걸려 있었다.

"저, 이렇게 비싼 걸.....조금 부담되는데요."

"선생님. 그럴 때는 그냥 고맙다고 하시면 되구요, 알바 착수금이라고 생각하세요."

"착수금이요?"

"네. 일단 저희 가게로 가서 아까 장부부터 정리하죠."

"고맙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하겠습니다."

"호호호. 그래요. 바로 그렇게 대답하시는 거예요."

해야 할 일은 하는 여자였다. 유미를 따라 ROSE로 갔다. 사무실로 들어가기 전에 지나를 마주쳤다. 나와 유미를 보고 인사를 하는 그녀에게 유미가 말했다.

"지금부터, 여기 선생님이랑 나랑 사무실에서 아주 중~요한 일을 하니까 말야. 따로 부르기 전에는 아무도 들이지 마렴."

그러자 지나가 손가락으로 나와 유미를 번갈아 가리키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장부 정리입니다. 지나 씨, 이상한 생각 하지 말아주세요."

지나는 한참 깔깔거리다가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을 삐죽거리는 유미와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다. 선영은 장부를 꽤 꼼꼼하고도 성실하게 정리해놓았고 나는 그것을 엑셀에 입력시키면서 필요한 경비와 임금 등을 계산해냈다. 꽤 오래 걸리고 지루한 일인지라 끝났을 때는 거의 한밤중이었다. 옆에서 치근덕거리는 유미만 없었으면 아마 더 빨리 끝냈을 지도 모른다.

"다 되었거든요. 나중에 제가 출납명세서만 출력해올게요."

"헤에. 신기하네요. 그렇게만 하면 계산이 자동으로 되는 거예요?"

"입력을 정확히 하고 수식을 구성하면...."

"아아, 복잡한 이야기는 되었구요. 일도 다 하셨으니 술 한 잔 안 하시겠어요?"

"......저 내일 출근인데요."

"어머나, 그랬지요. 흠. 알았어요. 내일 뵈어요."

유미의 배웅을 받으며 ROSE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왔다. 앞집은 여전히 불이 꺼져있었고 벨을 눌러도 아무도 나오지 않았다. 예린의 명함을 꺼내들고 전화기 앞에서 한참을 망설였다. 마리 일을 리사에게 전화로 알릴까. 대체 그녀에게 무슨 이야기를 어떻게 할 것인가 고민해보아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들었던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교생 실습 3주차가 시작되었다. 다음 주부터는 내가 직접 수업을 진행하는 주간이라 교안을 만들어야했다. 틈틈이 만들어두긴 했지만 그래도 몇 번이고 지애의 검토를 거쳐야 했다. 리포트 용지에 써두었던 내용을 옮겨 양식에 맞추어 문서로 만들었다. 노트북이 있으니 확실히 편리했다. 문서를 넣어두고 틈틈이 확인하며 내용을 검토했다. 그리고 주변에 아무도 없을 때는 ROSE의 장부 내용을 확인했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 출력실에 들려 문서를 뽑아 ROSE로 갔다. 필요한 만큼의 장부를 정리하고 남은 시간은 유미의 사무실 한편에서 내 공부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오가는 사람도 있고 치근덕거리는 유미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거기서 굳이 공부를 하는 까닭은 마리와의 일도 있고 해서 어쩐지 집에 들어가기가 싫어서였다. 다시 학교로 가기도 애매하고..... 치근대는 유미만 없다면 정말 완벽한 환경이었을 텐데... 그건 좀 아쉬웠다. 하루는 유미가 나한테 ROSE 통장은 물론 도장과 비밀번호까지 맡기는 걸 보고 기겁했다.

"제가 이걸 들고 은행에 가면 여기 찍힌 돈을 전부 출금할 수 있는 거죠?"

"네. 나중에 애들 월급 줘야 할 때는 그렇게 하세요."

"아니, 제가 이걸 전부 출금해서 들고 튀면 어쩌려고 저한테 맡기세요?"

그러자 유미는 싱긋 웃어보였다. 그 웃음을 목격하고 나니 잠시나마 나쁜 생각했던 게 스르륵 없어졌다.

"네. 이상한 소리 하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좋아요. 선생님. 바로 그 자세예요."

또 어떤 날은 ROSE 사무실로 걸려온 선영의 전화를 받기도 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내가 전화를 받는 걸 보고 선영은 깜짝 놀랐지만 내가 자기 오피스텔에 갔다가 유미랑 마주치는 바람에 일을 맡게 되었다는 소리를 듣고 살짝 한숨을 내쉬었을 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그녀는 내가 ROSE일을 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 도리어 내게 가게에 필요한 몇 가지를 더 지시하며 협력을 구했다. 선영이 지금 무얼 하고 있는지 내가 묻자 그녀는 대답을 하지 않고 나중에 이야기 해주겠노라며 전화를 끊었다. 많이 바쁜 모양이었다.

저녁에 ROSE에 가야되다 보니 태근이 형이나 현아, 은애와는 어울리지 못 했다. 오히려 나 대신 비키가 그쪽 인원에 들러붙어 전보다 더 떠들썩하게 잘 노는 모양이었다. 점심시간에 태근이 형이 나에게 와서 현아 이야기를 하는 걸로 보아 내 조언대로 펀치 브라이스 인형을 선물하고 나서부터 제법 대화도 하고 그러는 모양이다.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밤낮의 이중생활로 인해 정신없이 바쁘긴 하지만 그럭저럭 잘 굴러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오늘도 안 왔어요."

"으응... 그러네."

"하아.. 진짜... 어디 간 거지..."

내 옆에 앉은 유진이가 한숨을 푹푹 내쉬었다. 애꿎은 바닥만 발로 툭툭 차고 있었다.

"연락도 없었다며."

"네. 집에 가 봐도 아무도 없고...."

"다른 가족들은?"

"없어요."

"흐음.... 이사라도 간 걸까."

"옆 집 분에게 여쭤보니 그런 것 같다고도 하시더라구요."

지난 주 토요일에 결석한 이래로 소란이는 계속 학교에 나오지 않았다. 유진이가 집에 찾아가 보았지만 집에 아무도 없었다고 했다. 그렇게 녀석이 학교에 무단결석 한지 일주일이 다 되어간다. 지애에게 물어보자 그녀는 묘한 소리를 했다. 어머니한테서 연락이 오더니 전학시키겠다고 하더란다. 그러면 학교에 와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으라고 이야기했더니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라며 나중에 우편으로 하겠다고 하더란다. 지애는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녀도 조만간 있을 학교 행사 준비로 인해 바쁜 터라 일단 넘어갔다. 그 이야기를 유진이에게 전해주었다.

"송 선생님은 전학 간다는 연락을 받았다고 하던데."

"그것도 이상해요. 이 시기에 갑자기 전학이라뇨. 말도 안 돼요. 전학가면 간다고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아랫입술을 깨무는 유진의 표정은 복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실망감... 걱정.... 그런 게 복잡하게 가득 섞인 얼굴이었다. 유진이는 요즘 들어 점심시간이면 등나무 쉼터에서 혼자 생각을 하고 있는 시간이 많아졌다. 내가 옆에 있어도 그다지 말이 없었다. 어쩌다 소란에 대한 걱정만 이야기했을 뿐 다른 이야기는 거의 하지 않았다. 같이 나란히 앉는 짝꿍일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의미로 단짝이었던 모양이다. 그런 녀석이 온다간다 소리도 없이 사라져서 굉장히 상심한 모양이었다.

"갑자기 옮기느라 경황이 없겠지. 조만간 연락이 오지 않을까?"

"그럴까요?"

예비종이 울리자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내게 꾸벅 인사를 해보이곤 교실로 돌아갔다. 나도 노트북을 덮고 자리에서 일어나 교무실로 향했다. 교무실로 가면서 소란이가 말했던 그 이상한 종교단체를 떠올렸다. 설마... 하는 아주 나쁜 생각까지 들었지만 그렇게까지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아마도 엄마의 등쌀을 피해 가족 전부가 잠적해버린 게 아닐까 싶었다. 연락이 없는 것도 아마 그 이유에서 일 것이다. 사태가 정리되면 돌아오겠지 싶었다.

"최 선생, 왔어요?"

"네."

지애 자리로 가자 그녀가 한숨을 푹 내쉬더니 내게 무언가를 내밀었다.

"이것 좀 봐요."

"뭔가요?"

"보면 알아요."

그리 길지 않은 글이 적힌 A4 용지였다. 글자 하나하나가 아주 큼직하다. 아래아한글96에서 명조체 20포인트 정도 되려나. 워드로 출력된 글귀는 다음과 같았다.

[ K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현재 교생 실습중인 모 군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몰고 다니며 선생의 품위를 저해하는 업소에 출입하고 있는데다가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당장 그를 파면하고 교직에 임용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뭔 개새끼 풀 뜯어 먹는 소리지.

".......봐도 모르겠는데요?"

지애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투서라더군요. 오늘 아침에 교장실로 들어온."

"투서요?"

"네. 발신 불명의 봉투에 담겨 교장실 문에 끼어 있었답니다. 내용은 보다시피 우리 학교 교생을 음해하는 내용이죠."

교생? 그렇게 불리는 사람은 정말 몇 명 없는데?

".......교생이라고 해보아야 네 명이고 게다가 모 군이라면 남자잖아요. 그럼 이 글에서 말하는 사람은 저랑 태근이 형 밖에 없는데요."

"최 선생, 차 있어요?"

"아뇨. 자전거도 없는데요. 원래 되게 비싼 사이클이 하나 있었는데 어느 날..."

지애는 고개를 저으며 손을 내저었다.

"그럼, 박 선생이군. 박 선생 차가 좋은 건가 보지?"

차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편이지만 일단 외제차면 좋은 차 않을까 조심스럽게 추정해보았다.

"한 번도 못 보셨어요? 대형 외제차인데..."

"외제차? 어머, 박 선생 집이 좀 사나보지?"

"그런가 봅니다."

지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녀도 학교 등하교시 중형차 하나를 몰고 다니고 있다.

"외제차라면 주차장에서 대번 눈에 띄었을 텐데... 학교에는 한 번도 안 가지고 왔나 보죠?"

"예. 항상 저희 대학교 주차장에 세워두고 걸어오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그러자 지애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그럼 최 선생은 어떻게 알고?"

"가끔 저희 밥 먹으러 갈 때...... 아."

태근이 형은 학교에 차를 가져오지 않았다. 그런데도 투서에는 그가 차를 몰고 다닌다고 적혀있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투서를 넣을 수 있는 사람의 범위가 단번에 좁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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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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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서를 넣은 사람은 누구일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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