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79화 (7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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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태근이 형은 그의 동생인 효진과 마찬가지로 자신이 가진 것, 그러니까 자기 차 같은 걸 자랑하는 사람이 결코 아니었다. 그의 성격으로 미루어 보아 그냥 운전해서 가는 게 이동하기 편하니까 있는 차를 끌고 왔을 것이다. 결코 과시용으로 가져오진 않았을 테다. 그러니 그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끌고 다니는 걸 아는 사람은 딱 정해져 있다. 게다가 이런 식으로 형을 음해하는 내용이라니. 누가 썼을지 너무도 뻔했다.

원래는 그를 마음에 들어 하지 않았지만 그가 차를 끌고 나타난 순간부터 태도가 돌변한 인간을 하나 알고 있다. 설마 그에게 그토록 들이대는 게 안 풀리니까 이딴 식으로 나오는 건가. 생각에 빠진 내가 답을 안 하고 있으려니 지애가 재촉했다.

"뭐가, 아~야. 아는. 더 이야기 해봐. 지금 이 문제 가지고 선생님들 사이에서 제법 말이 많아. 내가 전에도 이야기 했지. 학교 입장에서는 귀찮은 일은 딱 질색이라 말 나오고 이러면 바로 실습 종료라고."

속으로 헉! 이라고 외쳤다. 태근이 형이 천상 사람이 느슨해서 그렇지 교사는 꼭 되고 싶어 했다. 예전에 그런 대화를 나눈 적도 있었다.

"형네 집 잘 살잖아요. 왜 굳이 교사가 되려고 그래요?"

"옛날에 내가 존경하던 분이 있었는데, 그 분이 나한테 교사가 되라고 했거든."

"대체 형의 뭘 보고요?"

"몰라. 그렇지만 그 분의 말씀은 한 번도 틀린 적 없어."

그런 게 어디 있냐고 농담을 걸려다 형의 표정을 보니 꽤 심각했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표정이었다.

"그러니 난 교사가 될 거야."

"그렇군요. 일단 어떻게 될지 모르는 자격이나 따놓자는 저랑 다르시네요."

그런 그가 실습에서 이런 음해로 짤린다라... 그렇게 되면 너무 불공평하다. 눈앞의 지애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그러셨죠."

"이게 해명이 안 되면 모 군에 해당하는 사람은 불이익을 받을 수밖에 없어요."

"태근이 형이요?"

그러나 지애는 고개를 저었다. 뭐야, 그러면.

"그렇기도 하지만.... 전원 일수도 있지. 요즘이야 군이란 표현을 남자에 한정해서 쓰지만 연세 드신 분들은 그냥 젊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이라구요."

"그런가요?"

"제군들, 이라는 표현도 몰라요?"

"그...그렇군요."

그녀의 말투로 보아 학교에서는 이게 귀찮은 문제로 확대될 경우 아예 교생 전체를 잘라버릴 수도 있다는 것 같았다. 젠장. 그렇게 되면 나 역시 곤란하다. 교직 따겠다는 생각에 학점에 불이익을 받아가면서 여기에 투신하고 있는데 여기서 이런 식으로 잘렸다가는 죽도 밥도 안 되게 된다. 지애는 자기 일 아니라고 무심하게 말했다.

"보아하니 최 선생은 대충 짐작을 하는 모양인데 빨리 처리해요. 그냥 두면 다음 주 월요일 교무회의 때 무슨 이야기가 나올지 몰라."

"네."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나보고 처리를 하라니. 내가 무슨 수가 있어서 처리를 한단 말인가. 의심 가는 사람을 잡아다 추궁이라도 해야 하나. 그러나 오후 내내 용의자는 물론 태근이 형도 만나지 못하고 시간이 흘러갔다. 다행이라면 퇴근은 다 같이 하게 되었다는 거...

"뭘 그렇게 빤히 보냐?"

"아니, 뭐..."

"은애가 마음에 들어? 연결시켜 줄까?"

"아뇨. 전혀요."

수업이 모두 끝나고 다 같이 퇴근하는 길이었다. 대학교로 넘어가는 길에 은애를 계속 쳐다보고 있는 나를 눈치 챈 태근이 형이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니,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가능하면 니가 은애 좀 어떻게 해줘라. 나, 쟤 때문에 귀찮아 죽겠어. 현아랑 뭐 좀 해볼라 하면 계속 엉겨 붙어가지고 떨어지질 않아."

"그렇다고 제가 뭘 어떻게 하겠어요."

"델꾸가서 따로 데이트라도 하던가. 요새는 비키까지 현아랑 노느라 내가 현아랑 단 둘이 있지를 못 해."

"비키와는 저도 얽히고 싶지 않으니 정중히 사양하겠습니다."

공대 주차장에 도착하자 태근이 형의 차에 은애, 현아, 비키 모두 올라탔다. 나는 도서관에 가겠다며 빠졌다. 조수석에는 은애가 앉아있었다. 여러 가지 의미를 담아 그녀를 쳐다보았지만.... 아유, 조것이 나랑은 눈도 안 마주치네. 운전석에 앉은 태근이 형이 나에게 소리쳤다.

"요새 너무 빼는 거 아냐? 동기들이랑 좀 어울리고 그래."

"지금 따로 알바 하는 게 있어서요. 급한 것만 정리되는 대로 그렇게 할게요. 다들 재미있게 놀아요."

뒷자리에서 창 너머 나를 향해 손을 흔드는 현아와 비키에게 눈인사를 보내고 그 자리를 벗어났다. 도서관으로 가서 그동안 하지 못했던 공부를 시작했다. 책을 찾아보고 자료를 정리하느라 시간이 한참 걸렸다. 문득 시계를 보고 ROSE에 가기 전에 출력해야 될 것이 생각났다. 도서관 출력실은 늦게까지 하겠다는 생각에 1층으로 내려갔다. 칸막이로 나뉜 컴퓨터실의 한편에 자리한 출력실은 커다란 프린터와 전용 단말기가 있다. 거기에 자신의 복사카드를 넣고 디스켓에 넣은 다음에 출력하게끔 되어있다. 굉장히 번거로운 방식이라 다들 불만을 이야기하는데도 통 바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이미 앞에 누군가 쓰고 있기에 기다리고 있는데 앞에서 삐삑- 거리는 소리가 났다.

"어...어쩌지? 엄마야...."

낮은 탄식소리. 뭔 일인가 싶어 고개를 쭈욱 내밀고 바라보니 어째 익숙한 뒷모습이었다. 나는 쓴 웃음을 지으며 앞으로 다가갔다.

"현아 아냐? 아까 형이랑 놀러 간 거 아니었어?"

"하...한석아!"

등 뒤에서 내가 나타나자 그녀는 소스라치게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다가가자 갑자기 모니터를 자신의 몸으로 가린다. 그 작은 몸으로 가린다고 모니터가 잘 가려지겠느냐마는... 아마도 워드 작업 중이었던 모양이다.

"왜 그렇게 놀래? 뭐, 이상한 거라고 출력하고 있었던 거야?"

"아...아니, 그건 아니지만....."

순간 드는 생각이 이 녀석도 혹시 나처럼 야설 쓰는 리포트라도 받은 건가 싶었다. 빙글거리며 놀리고 있는데 그녀는 손을 뻗어 컴퓨터 전원을 확 내려버렸다. 에에. 그렇게 파킹도 안 시키고 확 꺼버리면 컴퓨터에 손상이 갈 텐데....?

"아까 삐삑거리는 소리는 말야...."

내가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려는데 그녀는 자신의 가방을 주섬주섬 챙기더니 나를 밀치고 확 나가버렸다. 얼굴은 빨갛게 상기되어 있었다. 거참, 이상한 녀석일세. 나를 보고 왜 그렇게 당황하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려보지만 알 도리가 없다. 게다가 나도 출력을 해야 하는데 컴퓨터를 그렇게 꺼버리면 어떻게 하나. 뒷사람은 생각도 안 하고... 쯧쯧쯧...

컴퓨터에 전원을 넣고 다시 부팅을 하는 동안 프린터를 살폈다. 아까 난 삐삑- 소리는 종이가 걸렸다는 뜻이다. 복잡한 고장은 아니고 그저 프린터 커버를 벗기고, 원래는 한 장씩 들어가야 할 용지 보급장치에 걸린 두 장의 종이만 뽑아내면 되는 간단한 처치가 필요하다. 도서관 출력실을 이용하려면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지, 안된다고 그냥 그렇게 확 끄고 가버리다니. 쯧쯧쯧.

게다가 이 녀석, 자기 디스켓이랑 복사카드도 뽑아가지 않았다. 좋아. 네 녀석의 복사카드는 내가 아주 유용하게 써 주지. 무려 장당 20원씩이나 하는 고액을 남김없이 써주마! 우하하하. 그렇게 문이 열린 빈 집을 발견한 좀도둑처럼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현아의 복사카드를 써서 내 출력물을 모두 출력했다. 그래보았자 데이터베이스에서 레코드 별로 세 장 정도 뽑았을 뿐이다. 그런 다음 자리에서 일어나 내 디스켓과 현아 물건들을 회수했다.

그리고 출력물을 확인한다. 일단 내 것부터 제대로 나왔나 본다. 그런 다음 자연스럽게 현아의 출력물을 보았는데....  이럴 수가. 그걸 보는 순간 몸이 굳고 말았다. 생각이 그대로 멈추고 만다. 거기에는 아까 낮에 지애가 내게 보여주었던 글과 같은 내용이 쓰여 있었다. 같은 폰트, 같은 내용이었다.

[ K대학 부속고등학교에서 현재 교생 실습중인 모 군은 분수에 맞지 않는 차를 몰고 다니며 선생의 품위를 저해하는 업소에 출입하고 있는데다가 학생과의 부적절한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당장 그를 파면하고 교직에 임용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

나는 왜 이걸 은애가 썼다고 생각했을까. 대체 왜 현아에 대해서는 눈곱만큼도 의심하지 않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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