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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81화 (8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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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나들은 까르르 웃어넘겼다. 나도 쓰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맥주 캔을 들어 목을 축였다. 가까스로 떠오르는 예전의 기억을 조금씩 더듬어 본다.

긴 머리를 고무줄로 질끈 묶고 망아지 꼬리처럼 휘두르며 꼭 망아지처럼 날뛰던 현아. 지금은 그때 얼굴 생김새가 가물가물해서 지금이랑 어떤 차이가 있는지조차 모르겠다. 다만 기억나는 건 대부분의 시골 아이들이 그러하듯 녀석도 상당히 까무잡잡한 편이었기에 지금의 뽀얀 얼굴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러다가 대부분의 군인가정이 그러하듯 현아도 중학교에 올라가기 전에 다른 곳으로 이사 가버리고 말았다. 내당리에서 머문 기간은 아마 3년이 채 안 되었던 것 같다. 그 후로 볼일이 없었던 그녀를 까맣게 잊고 살았는데 이렇게 다시 만났을 줄이야. 아니, 이미 만났을 줄이야. 하아. 세상 참 좁다.

누나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어보니 아무래도 현아가 요즘 나에 대한 이야기를 한 모양이다. 누나들은 이번에 교생 실습에서 현아가 나를 만난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했다. 현아가 남자에게 먼저 관심을 보이는 일은 상당히 드물었고 누나들도 어렸을 때의 내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내심 기다렸다고 한다. 그러던 차에 내가 직접 이렇게 찾아왔으니 환대를 받을 수밖에...

"그런데 현아 성격은 왜 그렇게 바뀐 거예요? 모습도 모습이지만 너무 다른 사람 같아져서 전혀 몰랐다니까요? 그때는 남자애 한둘쯤은 그냥 우습게 휘어잡았는데...."

그녀를 내가 못 알아본 가장 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그거다. 만약 날 갈구어 대는 현아였다면 내 기억 속 스위치가 켜져서 그녀를 기억해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 성격은 그 당시와 360도 차이... 아니, 360도면 제자리구나. 암튼 180도 달랐다. 내 질문에 현주 누나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현주 누나가 말을 하지 않자 현미 누나가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으음... 아무래도 여자와 남자는 성장하면서 힘이랄까, 체격 같은 것에서 차이가 좀 생기니까 말야. 현아도 그걸 겪은 거지."

"네?"

뭔가 사연이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덩치가 큰 남자는 싫어한다던 현아의 이야기가 생각났다. 그때 현관이 열리면서 누군가 들어왔다.

"언니, 나 왔...."

현아였다. 녀석은 집으로 들어서다가 나를 딱 마주하고는 표정이 하얗게 질렸다.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녀석에게 한달음에 달려가 팔을 붙들었다.

"오오! 한석이 박력 있어!!"

현미 누나의 말은 귓등으로 흘리며 현아에게 말했다.

"나랑 얘기 좀 하자. 도망은 치지 말고."

팔을 빼내려는 시도도 하지 않고 현아는 쉽사리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누나들의 양해를 구해 일단 현아의 방으로 따라 들어갔다. 20대 아가씨가 아니라 소녀의 방이라고 해도 믿을 수 있을 만큼 아기자기하게 꾸며진 작은 방이었다. 현아가 침대에 걸터앉고 내가 책상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마주 앉아 있으려니 차마 말을 먼저 꺼내기가 민망했다. 여자의 기운이 물씬물씬 풍기는 방에 들어와 있는 것도 좀 어색했고.... 차라리 선영이처럼 육체관계를 맺은 여자 방이라면 편하기라도 한데 이건 뭐... 좌불안석이 따로 없다. 말의 서두를 쉽게 꺼내지 못해 괜스레 방만 둘러보다가 문득 무언가 발견했다. 책상 옆에 있는 장식대에 뭔가 익숙한 모양의 인형들이 놓여 있었다.

"저거.... 가지고 있네?"

예전에 서점 팬시코너에서 팔고 있던 펀치 브라이스 인형이었다. 한둘도 아니라 계단식으로 생긴 단에 3열 횡대로 주르륵 놓여있다. 삼오 십오. 열다섯 명이다.

"이거 정말 좋아하는 구나?"

하나만 해도 가격이 좀 되었던 기억이 나는데 저걸 저렇게나 많이.... 현아를 돌아보았더니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안 좋아해?"

"아니, 안 좋아한다기 보단.... 그냥 생긴 게 예뻐서 조금 들여다보고 있었던 건데 누가 누구한테 대체 어떻게 말했는지 대번에 저만큼 선물로 들어오더라. 받아서 들고 오느라 힘들어 죽는 줄 알았어."

"..........에에. 태근이 형?"

"그래."

뾰로통한 현아의 대답에 조금 멋쩍어져서 뒤통수를 긁적였다. 내가 사주하고 태근이 형이 실행한 결과물이로군. 저건. 조금 그렇긴 하지만 덕분에 대화의 물꼬가 트였다.

"그래도 가상하지 않아? 너한테 잘하려고 애쓰는데?"

"......그건 알고 있어. 그치만...."

"그치만, 뭐. 왜 그렇게까지 한 거야?"

할 말은 해야겠다는 생각에 현아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고개를 푹 숙이고 우물쭈물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현아를 다그치는 것 같아 마음이 조금 아팠지만, 이건 중대한 문제였다. 잠시 침묵을 지키던 현아가 이내 고개를 들었다.

"이게 다 너 때문이야."

"......뭐라고?"

이렇게 황당한 노릇이 있나. 적반하장.... 아니, 종로에서 뺨맞고 동대문에서 화풀이 아닌가, 이건. 억울했다. 내가 뭘 했다고!

"내가 왜?"

"그야 니가 나도 못 알아보고...."

그 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바로 문이 벌컥 열렸다. 둘째인 현미 누나였다. 아니, 문을 그렇게 벌컥 열고 들어올 거면 노크를 대체 왜 하는 걸까.

"으음. 뭐야. 당연히 둘이 붙어 있을 줄 알았는데... 이거 실망인데?"

"누나. 표정이 중년 아저씨 같아요."

내가 궁시렁거리자 현미 누나는 낄낄거리며 들고 온 무선전화기를 현아에게 내밀었다. 현아가 자기 언니를 올려다보자 누나가 답했다.

"네 친구, 은애라던데? 받아봐."

순간, 현아가 내 눈치를 살폈다. 이거 뭔가 있군. 난 눈에 힘을 주고 꼿꼿한 자세를 취했다. 입모양으로 말한다.

[여기서 받아. 나가지 말고.]

현미 누나가 나가고 현아가 수화기를 조심스럽게 귀에 갖다 댄다. 눈으로는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특유의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여보세요? 응...... 으응......응. 아니, 저기. 내가 시간이 안 되어서 못 뽑았어. 응. 미안.... 어, 어. 알았어. 그래."

통화를 마친 현아가 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 짧은 통화에서 나는 무언가 짐작하고 있었다. 머릿속이 핑핑 돌아간다. 엉켜있던 실타래가 아주 조금 풀리기 시작했다.

"은애가..... 시킨 거야?"

한참을 주저하던 현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뒷목을 잡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냐, 대체.

"설명 좀 해봐. 내가 납득할 수 있게."

꽤 주저하긴 했지만 현아는 이내 털어놓았다.

"교생 가기 전에 학관에서 모였던 거 기억나?"

고개를 끄덕였다. 교생 실습이 정해지고 가게 될 사람끼리 행정관에 가기 전에 학관에서 먼저 만나서 모였다.

"난 그 때 니 이름 듣고 알아봤는데 너는 전혀 안 그러더라. 첨에는 나 놀리느라 그런 줄 알았는데 이야기를 나눠보니까 정말 모르는 거였어."

그 때부터 날 알아보았단 말이야. 하아. 어쩐지 조금 미안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아까 누나들한테도 이야기했지만 진짜 니가 너무 달라져서...."

"내가 달라진 게 아니라 니가 큰 거야. 나는 그때랑 지금이랑 키가 1센티 밖에 차이 안 나는 걸?"

현아는 입술을 삐죽거리며 말했다.

".....암튼 못 알아본 건 미안하다. 그런데, 그게 이거랑 무슨 상관이야?"

"은애랑 이런저런 이야기 하다가 내가 니 이야기를 했거든. 옛날에는 작았는데 지금은 크더라. 그 때 보고 십 년 만에 봐서 반가운데... 아무튼 그랬더니 은애가 나랑 너랑 연결시켜 주겠다면서... 그러려면 자기를 도와달래."

"나랑 너랑... 연결?"

그러자 현아가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더니 손을 흔들었다.

"아니, 내가 딱히 너한테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어렸을 때 귀여웠다, 그런 이야기를 했을 뿐인데 은애가 지레짐작으로 그러는 거 뿐이야. 그리고 그 태근이 오빠가 사람이 나쁜 게 아닌 건 알겠는데 조금 부담스럽기도 하고... 은애 말대로 하면 살짝 골탕을 먹일 수 있을까 싶어서."

살짝? 골탕? 이 애가 정말이지...

"휴우. 그렇다고 은애 고것이 시키는 대로 했단 말야? 너 진짜 바보구나?"

"뭐라구?"

바보라는 소리에 현아가 발끈했다. 난 목소리 톤을 조금 낮추고 말했다.

"내가 내 사수... 송 선생한테 무슨 이야기를 들은 줄 알아? 이거 문제가 커지면 교생 하고 있는 우리 네 명 전부 다 짤릴 수도 있다더라."

"정말?"

거기까지는 전혀 생각을 못 했는지 현아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안 그러면 내가 왜 니네 집까지 찾아오면서 따지러 왔겠냐. 나도 기왕 하는 교생인데 이런 식으로 문제 생겨서 짤리기는 싫거든."

"은애는 그런 말까지는 안하던데...."

얼굴이 새파랗게 질린 현아가 몸을 뒤로 빼며 말했다. 나는 바짝 다가가 말했다.

"당연히 걔도 아무 생각이 없으니까, 아무 것도 모르니까 이렇게 무식하게 행동할 수 있는 거야. 걔는 무슨 장기적인 계획이 있어서 태근이 형 자르라는 투서를 꾸민 줄 알아? 그냥 형이 너한테 붙어있을 계기를 안 주려는 거지."

"....그...그런 거야?"

"그래. 아니, 아니다. 어떻게 보면 요것이 더 넓게 보고 있는 거야. 그런 투서를 넣을 거면 지가 직접 넣을 것이지 왜 너를 시켰겠니? 생각을 해봐. 나중에 문제가 생기면 지만 쏙 빠져 나가려고 직접 안 하는 거라고. 난 방금 네가 걔랑 통화하는 거 딱 듣기만 해도 이 모든 사정이 대번에 파악되는데 왜 넌 그걸 몰라."

너무 답답했다. 현아가 부끄러움 많이 타고 내성적인 성격이라는 건 요 몇 주 겪어보면서 알 수 있었지만 이 정도로 꽉 막힌 생각을 가지고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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