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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82화 (8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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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심하게 몰아세운 걸까. 현아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손으로 이불을 꽉 움켜쥐고 있는 게 좀 안쓰러워 보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현아의 잘못이 저절로 없어지는 건 아니었다. 나는 한숨을 내쉬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현아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본다. 전화기를 들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건... 왜?"

"은애한테 전화해."

"뭐?"

"네가 그걸 또 출력하고 있었다는 건 투서를 또 넣으려고 했다는 거잖아. 그거 못 하겠다고 은애한테 이야기 해. 투서를 넣고 싶으면 직접 하라고."

현아는 전화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냥 내가 안하면 끝나는 거 아냐?"

"니가 아직 사태를 파악 못 했구나?"

목소리에 힘을 담아 강하게 쏘아붙였다. 현아는 어쩔 수 없이 전화기를 건네받더니 번호를 꾹꾹 누르기 시작했다. 현아가 수화기를 귀에 가져다 대는 것을 보고 그녀의 바로 옆에 바싹 붙어 앉아 수화기 바깥쪽에 귀를 가까이 댄다. 아무래도 현아와 얼굴이 바싹 붙는 모양새가 되긴 했지만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신호가 가고, 달칵 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애의 목소리가 들렸다. 희미하게 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아예 안 들리는 건 아니었다.

[여보세요]

"은애야, 나야. 현아."

[어쩐 일이야?]

현아가 내 얼굴을 쳐다본다. 바짝 얼굴을 대고 있어 조금 기분이 묘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힘을 주어 고개를 끄덕였다. 전화기를 잡은 현아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나.. 아무래도 이 일에서 빠질래. 태근이 오빠가 그렇게 나쁜 사람도 아니고... 전에도 말했지만 내키지가 않아."

그러자 은애의 앙칼진 목소리가 벼락같이 꽂힌다.

[야! 너 진짜 이러기야? 내 말대로 하면 니랑 한석이랑 엮어준다고 했잖아. 그리고 이제와서 그딴 식으로 한다고 빠질 수 있을 것 같아?]

"한석이랑 나는 그런 거 아니라니깐... 그러면....나보고 어쩌라고."

[아, 몰라. 문서 다시 뽑아서 제대로 넣어. 이번에는 교무실 입구에 붙여놓든가 그렇게 해. 안 그러면 전에 투서도 니가 한 거라고 소문낼 테니까.]

"그거야 니가 시킨 거잖아."

[..............시켜? 하핫. 누가?]

시치미를 뚝 떼는 그 목소리에서 정나미가 뚝 떨어진다. 현아의 목소리가 파르르 떨렸다.

"은애, 너...."

[증거 있어? 니가 니 손으로 뽑아서 갖다 넣은 거잖아. 내가 무슨 상관인데?]

"너 정말 이러기야? 그 때 분명 니가 나한테 말한대로 한 거잖아."

[그러니까 이번까지만 내가 시키는 대로 해. 그러면 깔끔해질 테니까. 그럼 난, 믿고 기다리고 있을게. 끊는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현아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보기 좋게 이용당했다는 걸 깨닫게 된 듯 싶었다. 잠시 후, 현아는 거칠게 눈가를 비볐다. 비록 눈물이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눈가가 벌겋게 되어 있었다.

"한석아... 미안하지만 좀 나가줄래?"

"현아야...."

"나, 너무 바보 같아. 아니, 같은 게 아니라 진짜 바보인가봐. 일이 이렇게까지 될 줄도 몰랐고 정말 아무 생각 없었나봐. 태근이 오빠한테도 미안하고 너한테도 미안해. 이건... 이건 내가 알아서 밝히도록 할게. 은애가 저렇게 나오더라도 내가 직접 윗분들에게 말씀 드리면 해결 될 거야."

"은애가 잘못한 건데 왜 니가 책임을 져?"

"나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잖아."

"현아야...."

"일단, 일단 나가줘. 나 혼자 있고 싶어."

단호한 목소리로 나가달라 부탁하는 현아였다. 어쩔 수 없이 밖으로 나왔다. 문 밖에서 귀를 쫑긋거리고 있다가 후다닥 소파로 돌아가는 누나들을 못 본 척 했다. 인사를 남기고 집을 나왔다. 가슴이 답답하고 미어졌다. 현아의 잘못은 다른 데 있는 게 아니었다. 그냥 어떤 사태를 직접 마주하는 걸 두려워하고 그 여파가 어느 정도인지 가늠하지 못한 무지가 죄였다. 그걸 계산해낼 수 있는 사람은 이미 살짝 비켜나와 현아에게 줄을 걸고 조종하고 있었다. 놀아났다는... 표현이 맞을 테다. 그런 현아를 그냥 두고 보기는 내가 너무 무기력하고 한심하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수화기를 들고 심호흡을 했다. 걸어 돌아오는 동안 내내 생각한 결론을 실행에 옮겼다.

효진이 휴대전화 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가고 곧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어? 한석 군 아냐?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효진의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 들려왔다.

"지금 집이야?"

"그런데?"

"혹시 태근이 형 있으면 좀 바꿔줘."

"오빠? 오빠는 왜?"

"암튼, 중요한 일이라고 전해줘."

"너 오빠 핸드폰 전화번호 몰라?"

"전에 들었는데 적어두질 않아서..."

"응. 잠깐만. 아마 2층에서 운동하고 있을 거야. 기다려."

잠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한참동안 나더니 이내 씩씩한 목소리가 수화기 너머에서 들려왔다.

"어이, 놀자고 할 때는 빼고 도망가더니 이 시간에 어쩐 일이야? 술이 고파?"

"고프다고 하면... 사줄래요?"

사람 좋은 형의 호탕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하핫. 니가 웬일이냐. 안 될 것도 없지. 어딘데?"

"지금은 집이긴 한데... 형이 여기까지 오는 건 너무 멀고, 혹시 학교 앞에 있는 재즈 알아요?"

"알다마다. 거기 서빙 하는 아가씨가 열라 이쁜 걸로 유명하잖아. 왜, 그 아가씨보다도 죽이는 여자 소개해 주려고?"

".......죽이는 거는 맞을지도."

"뭐? 진짜로?"

"암튼 한 시간 안에 거기서 봐요. 올 수 있죠?"

"오브 코오스!"

체육 선생의 어색한 발음은 정말이지 정직한 콩글리쉬 발음이었다. 되도 않는 영어를 이렇게 남발하는 게 대체 누구의 영향일까.

".......형, 비키랑 너무 어울리지 마요. 나쁜 물들겠어요."

"아이 갓 잇!"

"......이미 늦었나...."

약 50분 후, 태근이 형과 나는 재즈에서 만났다. 서빙 하는 아가씨가 예뻐서 그런 건지 아니면 금요일이라 원래 그런지 호프집은 사람들로 붐볐다. 밤늦게 호출했는데도 불구하고 근사하게 세미 정장 스타일로 빼입고 나온 형과 달리 나는 집에서 입는 츄리닝 차림이었다. 형은 내 차림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얌마, 죽이는 아가씨 온다면서 그러고 있으면 어떻게 해?"

".....전 아가씨 온다고 한 적 없는데요?"

"뭐? 이 자식! 날 속였구나!"

맞은편에 앉아서 다행이다. 나란히 앉았으면 아마도 헤드락을 걸며 생난리를 피웠을 지도 모른다. 일단 술을 시켰다. 시덥지 않은 이야기를 나누다가 은근히 현아와 은애에 대한 형의 생각을 물어보았다. 형도 아주 눈치가 없는 사람은 아닌지라 씨익 웃으며 답했다.

"너 지금 나한테 현아랑 은애 중에 누가 더 좋냐고 물어보는 거냐?"

"대충 그렇습니다."

"여태 내가 티를 덜 냈냐? 현아가 더 좋다니깐 왜 자꾸 물어봐."

"현아의 어떤 점을 보고요?"

"글쎄다. 일단 생긴 게 귀엽잖아. 그리고 얌전하고. 내 주변에는 어째 드센 여자들만 잔뜩이라 난 그런 타입이 좋더라고."

"현아가 그냥 얌전하기만 한 녀석일 거 같아요?"

"갑자기 무슨 소리야?"

가지고 온 종이를 내밀었다.

"뭐냐, 이게?"

"읽어봐요."

호프집의 조명이 그리 밝은 편은 아니지만 큼직하게 적힌 글자가 보이지 않을 정도는 아니었다. 인상을 찌푸린 채로 그걸 읽는 형을 바라본다. 그는 내가 "도서관 출력실에서 발견한 종이"를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 별로 긴 내용도 아닌데 형은 그걸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있었다. 잠시 후, 그걸 내려놓은 형이 무거운 목소리로 말했다.

"이걸 왜 니가 갖고 있냐? 설마 투서 넣은 게 너냐?"

"그럴 리가요.... 근데 이거 이미 알고 있었어요?"

"안 그래도 내 담당 꼰대가 오늘 이야기 하더라. 나보고 차 가지고 다닌 적 있냐고...."

알바생이 맥주가 가득 담긴 500CC 잔을 갖다 주었다. 소문대로 무척 예쁘게 생겼다. 작은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게 아주 잘 배치되어 있었고 웨이브 파마를 한 머릿결은 풍성했다. 표정이 냉랭한 것만 빼면 정말 탤런트 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런 알바생에게 눈길도 주지 않을 만큼 태근이 형의 표정은 심각하고 분위기가 진지했다.

"후우.... 난 좀 조용히 선생질 하면서 살고 싶은 것 뿐인데 왜 이렇게 태클이 많냐...."

"태클이요?"

"난 투서 이야기 듣고 처음에 우리 집에서 넣은 건 줄 알았다. 나 선생 못 되게 하려고."

"에에?"

이건 또 무슨 소리다냐. 선생님이 되겠다는 걸 반대하는 집안이라니.

"내가 얘기 안 했나? 우리 집에서는 내가 선생하겠다는 거 반대야."

"왜요? 선생님이 어때서...?"

"우리 아버지의 기준은 모든지 돈이지. 첫째도 돈. 둘째도 돈. 셋째도 돈..... 아마 가족이니 뭐니 하는 건 삼만 오천 번째 정도 일거다. 내가 선생하겠다고 하니까 바로 나온 소리가 뭔지 아냐? 그게 돈이 되냐는 거지. 안되면 때려치우래."

효진이는 자기 아버지의 일에 대해서 "땅 장사 하는 분"으로 무심하게 이야기했었다. 변호사를 따로 법률자문으로 두고 하는 땅 장사가 뭔지는 몰라도 결코 평범하리란 생각은 들지 않았다. 모르긴 몰라도 엄청 부자인 것 같았다.

".....그래서 부자인 건가요?"

"아니, 순서가 틀렸어. 부자가 되고 나서 돈을 밝히게 된 거지. 원래는 그런 분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아주 엿 같단 말이다."

평소 실실 웃고 다니는 얼굴과는 전혀 다른 얼굴을 보여주는 태근이 형의 모습이 좀 낯설었다. 그러고 보니 효진이도 자기 집에 대해서는 한사코 이야기를 안 했던 것 같다. 모르긴 몰라도 형과 효진의 가정사는 조금 복잡한 것 같다. 애써 묻고 싶지는 않아 잠자코 있었다. 형이 말한다.

"암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지. 말해봐. 네가 이걸 어떻게 알고 있고 갖고 있지?"

"듣기는 저도 송 선생한테 들었구요. 나중에 학교 도서관에서 이걸.... 출력하고 있는 현아를 발견했죠."

"뭐?"

생긴 것 만으로도 박력이 철철 넘치는 사람이 고함까지 지르니 무섭기 짝이 없다. 외마디 비명에 주변 사람들이 불평을 하려고 돌아보았다가 형의 흉흉한 기세를 보고 다들 말이 쑥 들어가는 모양이었다. 형의 목소리가 떨렸다.

"현아가...? 현아가 이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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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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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즈에 나온 알바생은 예전에 Refife님이 쓰시던 소설에 나오던 캐릭터였습니다.

소라넷에 연재하던 시절 그분께 사후허락을 맺고 사용한 기억이 나네요.

지금도 노블레스에서 활발히 연재하고 계시죠. <잘 알지도 못하면서> 꼭 보세요. 여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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