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87화 (8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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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가 말한 구경 값은 다름 아닌 육체노동이었다. 기절한 은애를 업어다가 하영의 차 뒤에 태우는 일을 내가 맡게 되었다. 형도 일어나서 거들었다. 은애를 태운 하영의 차가 출발하고 나자 형은 내게 물었다.

"내가.. 너무 심했냐?"

"글쎄요. 저는 대답하지 않겠습니다."

"그래도 뭐라고 말 좀 해봐, 인마. 한 순간 머리통에 열이 확 받아서 어디서 본대로 해보기는 했는데.... 하아. 이거 사람이 못 할 짓이구나 싶기도 하고."

지금에 와서는 이미 늦은 후회였지만 그렇다고 형을 탓하고만 싶지는 않았다. 조금 심하다고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은애 고것이 여태까지 하던 짓에 비하면 일견 후련한 부분도 없잖아 있었기 때문이다. 확실히 나란 놈은 좋은 놈이 되기 글렀다. 대신 다른 게 걱정되었다.

"은애가 더 난리치지 않을까요?"

"일단 하영이가 알아서 잘 처리 해주길 바라고.... 그 다음에는...."

"다음에는요?"

"그러면 정말 선생이고 뭐고 그만두고 말란다. 내년에 다시 신청해봐야지. 은애 같은 애가 없길 바라면서.... 그래도 은애 저 년이 이제 현아에게 껄떡거리지는 못 하겠지. 날 상대로 화를 내기도 바쁠 테니까."

이 사람의 문제가 뭔지 알겠다. 남에 대해서는 생각을 잘 하면서도 자기 자신에 대해서는 지나치게 쿨하다. 나 같으면 지금 실려 간 은애가 신고하면 어쩌나 걱정되어서 잠도 안 오겠는데 말이다. 믿는 구석이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그냥 대범한 걸까.

시계를 보니 새벽 3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어차피 집에 들어갔다가 다시 학교를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이라 형과 함께 학교 앞 찜질방에 가서 씻고 잠깐 잠을 청했다. 거기서 바로 출근 했다. 잠깐 잔 정도로는 피로가 풀리지 않아 학교에서 오전 내내 멍하게 있었다. 지애에게 몇 번이나 주의를 받았다. 어떻게 지나났는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고 집으로 간신히 돌아왔다. 오자마자 침대에 뻗어 그대로 잠이 들었다. 까무룩 정신을 잃고 있던 내가 잠에서 깬 건 저녁 시간, 허기를 느껴서 였다.

"하아...."

낮잠을 지나치게 많이 자서 그런지 머리가 아프고 무거웠다. 밥이나 먹으러 가야겠다는 생각에 문을 열고 나서려는데 맞은 편 집 문이 열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달려가 문을 열고 소리쳤다.

"마리야!"

그러나 나타난 사람은 전혀 예상 밖의 사람이었다. 검은 정장의 검은 선글라스... 다름 아닌 예린이었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그녀의 검은 분위기에 일순 쫄고 말았다.

"어, 예린 씨. 오랜만이야. 리사는?"

"안에 계십니다. 들어오시죠."

안으로 들어간다. 지난 번 그렇게 아쉬움을 남기고 헤어졌던 리사였다. 다시 볼 때는 어떤 표정으로 봐야 하는지 생각도 못 하고 있었는데,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반가움의 포옹이라도 해야 하나. 아니면 오랜만의 입맞춤이라도? 그것도 아니면 더한 것도.....? 아아. 예린이 있으니 좀 참아야 할런지도. 그러나 나의 이런 기대는 리사의 딱딱한 표정 앞에서 무너지고 말았다. 식탁에 앉아있는 리사는 여태 내가 보지 못했던, 그런 종류의 표정을 지은 채로 있었다.

"리사야...."

"오셨군요. 오빠. 낮에 들어오신 줄은 알았지만 피곤해 보여서 굳이 깨우지 않았어요."

"어? 어....."

그녀의 맞은편에 앉았다. 내가 앉기를 기다린 리사는 조용히 말문을 열었다.

"어쩜 그럴 수 있죠?"

"뭐...뭐가."

"마리 말이에요."

"마리?"

속으로 뜨끔했다. 리사가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지난 번, 효진과 그러고 있는 것을 녀석에게 들키고 난 후 녀석을 전혀 보질 못 했다. 더군다나 학교 일과 투서 문제로 머릿속이 꽉 차 있느라 마리에게 전혀 신경을 쓰지 못 했다. 어쩌면 내 무의식 속에서 일부러 녀석에 대해서 떠올리지 않으려고 애썼던 것 같기도 하다. 내가 대답을 못하고 있자니 리사의 목소리가 점점 올라간다.

"요 며칠, 마리가 어디 있는지 아세요?"

"학교.... 다니고 있던 거 아니었어?"

"아니에요!"

소리를 버럭 지르는 리사라니. 나도 모르게 움찔한다.

"지금 며칠째 연락도 안 되고 그러고 있다구요. 서울 와봤더니 어디 갔는지 보이지도 않고..."

"혹시 자전거를...?"

이제서야 생각이 난다. 빌라 입구에서 녀석의 자전거가 보이지 않은 지 꽤 되었다. 리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마음 가득히 두려움과 슬픔... 외로움....을 담고 있으면서 아아. 대체 이 녀석은 어디서 뭘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구요."

리사가 말하는 건 아마도 전에도 말했던 그 뭐냐. 링크되어 있다는 감각을 말하는 거겠지?

"그 연결되었다는 감각으로는, 어디 있는지 못 찾는 거야?"

너무 태평한 소리를 한 걸까. 리사가 기가 막힌다는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며 소리쳤다.

"웃기는 말씀 마세요!"

리사가 이토록 화내는 광경은 처음 본다. 게다가 그 대상이 나. 이런 경험은 처음이다.

"그건 그렇게 편리한 게 아니라 저희들 몸에 내려진 저주 같은 거라구요! 사람이 자기 한 사람의 감정도 추스르기 힘든 법인데....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함께 끌어안아야 한다는 게 어떤 기분인지 모르시죠? 알 리가 없죠! 오빠는! 정말 이기적이에요! 오빠한테는, 오빠한테는...."

리사는 고개를 숙였다.

"정말 기대를 했는데.....오빠라면 우리를...."

머리를 감싸 쥐고 괴로워하던 리사가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본다. 여자의 표정에 둔한 나 같은 놈도 알 수 있을 정도로 그녀의 눈빛에는 나에 대한 비난으로 가득하다. 눈가가 젖어있다. 그러나 리사의 성격상 눈물을 흘리진 않을 것이다.

"오빠에게 정말 실망이에요. 적어도 마리에게 저처럼만 대해주셨어도....."

그녀의 말에 좀 놀랐다. 나에 대해 실망이라는 건 그렇다 치고 그 이유가 대체...

"너처럼 이라니. 그럼 내가 마리랑 .....라도 했었어야 했다는 말이야?"

섹!....이라는 글자로 시작하는 단어를 말할 뻔했다. 가까운 곳에 서 있는 예린을 의식하고 그 단어를 얼버무렸다. 그러나 리사는 전혀 그렇지 않았다.

"그래요! 오빠라면 적어도 실망은 시켜주지 않을 거라고 믿었어요. 제게 그랬듯이 마리도 애정으로 품어 주리라 믿었다고요!"

"하아. 난 대체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어. 그...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야?"

"저도 오빠를 모르겠어요. 저희를 이해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제 착각이었군요."

끝없는 한숨이 흘러나온다. 우리 둘은 그렇게 서로에게 실망하고 이해하지 못한 채로 마주 앉아있었다. 더 할 말이 없다면 일어나겠다고 했더니 리사가 마지막으로 묻는다.

"어젯밤.... 어디 다녀오신 건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건 왜."

"혹시 마리를 찾아다니신 건가요?"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묻는 리사의 질문에, 나는 그 기대를 저버리는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아니. 다른 곳에 다녀왔어."

그러자 리사가 두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떨어뜨렸다.

"알았어요."

그녀는 더 이상 할 말이 없어 보였다. 나도 더 이상 할 말이 없는지라 자리에서 일어나 내 방으로 돌아온다. 굳이 변명을 하라면 할 수도 있다. 마리랑은 제법 잘 해보려고 했었고 나름 진도도 나갈까 싶었지만 다른 여자랑 있는 모습을 들키는 바람에 틀어졌노라고. 어제도 다른 여자를 만나러 가거나 그런 게 아니라 친구의 일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그러나 나는 다른 일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하기 그지없는데 거기에 마리와 리사의 일까지 겹쳐지는 걸 원치 않았다. 리사가 말하는 의도를 어느 정도 짐작은 하지만 그걸 도저히 따를 수가 없다. 분명 내가 마리를 대하기 어려웠던 건 그 녀석의 언니인 리사와 잤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효진이와의 모습을 들키기 까지 하고 나니 아무래도 마리를 편한 마음으로 대하기는 곤란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다가 고개를 저었다. 잠시 후, 앞집에서 나가는 소리가 들렸다. 차에 시동 거는 소리가 들리는 걸로 보아 예린과 리사가 어딘가 나가는 모양이었다. 굳이 나가보지 않았다. 실망스러운 표정으로 날 바라보던 리사의 얼굴이 생각나서 좀 우울해졌다.

복잡한 생각을 지워버리기 위해 일요일 내내 교안 만들고 혼자 연습하는 데만 시간을 보냈다. 집에서 나가지도 않고 하루 종일 그러고 있었다. 점심은 짜장면을 시켜 먹었지만 저녁이 되자 따뜻한 밥이 먹고 싶었다. 늘 가던 기사식당을 갔다. 순두부 백반 하나를 시켜놓고 가게 한편에 놓인 텔레비전을 보았다. 뉴스가 나오고 있었다. 별 생각 없이 뉴스를 보던 나는 어느 순간 눈을 크게 뜨고 말았다.

".........경찰은 달아난 원 목사를 수배하고 부목사 김 모 씨를 구속하였습니다. 이와 더불어 향정신성의약품관리법 위반죄를 적용하여 특정 약물을 지속적으로 투여한 교회 신도 수십 명을 불구속 기소할 방침이라고 밝혔습니다. 이에 재림예수대비말세찬양교회에서는 정당한 종교 활동을 핍박한 정부를 사탄으로 규정하고 적극 항거하기로 결정하였으며 체포된 목사와 신도들을 돌려달라는 시위를 종로경찰서 앞에서 하고 있습니다. 다음 소식입니다. 정부는....."

아주 짧은 순간이었다. 대체 어떻게 알아보았나 나 자신도 모를 정도로 짧은 순간이었다. 화면에 언뜻 비쳐 지나간 그 아이는 분명 내가 아는 얼굴이었다. 하얀 옷을 입고 머리는 풀어헤친 채로 닭장차에 오르는 그 짧은 장면에서 녀석을 분명히 알아보았다. 게다가 그 교회의 이름이 낯설지 않다....... 유진과 종로에서 저 교회 이름을 보고 내가 이렇게 생각했었다. "말세를 찬양해서 어쩌라는 거지."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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