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97화 (9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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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초반에는 나나 효진, 선미가 번갈아 가면서 3점씩 따서 야금야금 먹었다. 유진이는 주로 광을 팔거나 아니면 죽곤 했다. 유진이가 죽겠다고 선언할 때마다 효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잘 못 하는데 억지로 하자고 한 거 아니니?"

그러자 유진은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아뇨. 그런 걱정은 안 하셔도 돼요."

솔직히 나도 걱정은 좀 되었다. 아무리 똘똘한 아이라고 하나 무려 이백만 원이나 되는 현금을 걸고 도박을 하는 거 아닌가. 이 정도로 무모한 아이는 아닐 거라 믿긴 했지만... 그렇게 판이 돌고 돌아 어느 순간 유진이 선을 잡았다. 녀석은 익숙한 손놀림으로 패를 섞으며 조용히 말했다.

"그럼 이번에는 제가 선이네요."

그때부터였다. 게임의 공기가 바뀌었다. 유진이가 몰아치기 시작하더니 단 몇 분 만에 효진이와 선미는 기절 직전, 나는 기절초풍에 이르렀다. 유진이가 손을 흩뿌릴 때마다 마치 무협지 고수가 던진 암기가 혈도에 꽂히듯 착착 맞아떨어진다.

착- 착-

패와 패가 달라붙는 소리는 몹시 경쾌하다. 그리고 뒤이어지는 목소리도 아주 상큼했다.

"청단 떴고요, 이거 아까 제가 싼 거 먹는 거니까 피는 두 장씩 주세요. 이걸로 났고요. ...음. 다들 별 거 없으니 고 할게요."

아까부터 눈앞에서 뭔가 왔다갔다 하는데 하도 빨라서 눈으로 쫓기도 바빴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유진이의 앞에는 뭔가 수북이 패가 쌓이는데 효진이나 내 앞은 별로 없다는 거다. 그나마 효진은 몇 장씩 가지고 있지만 나는 그런 것도 거의 없다. 그렇게 멍하게 있는 동안 한 판이 끝났다.

"제가 고 세 번 했지요? 그러니까 쓰리고라서 두 배, 아까 흔들었으니까, 또 두 배, 9점에 네 배니까 36점이구요, 효진 언니는 피박, 선생님은 피박에 광박이니까 언니는 72점, 선생님은 144점이네요."

엄청난 암산 실력이구나! 그 정도면 계산기가 필요한 게 아닐까 싶었는데 유진이는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얘... 너 혹시 공부 잘 하니?"

이제 앞에 쌓인 만 원짜리가 처음의 절반으로 줄어들은 효진이였지만 그녀는 실망하거나 분노하지 않았다. 대신 흥미롭다는 눈빛으로 유진을 보며 물었다. 패를 섞고 있던 유진은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좀 해요."

대답의 진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해 효진이가 날 쳐다보기에 고개를 끄덕이며 부연 설명을 해주었다.

"우리 반 반장이고 전교에서 한 자리 등수 곧잘 한다."

그러자 효진이가 감탄을 하며 말했다.

"못한다고 하면 이거 할 시간에 공부나 하라고 했을 텐데...흐아...대단하구나, 너?"

"일단 패 돌립니다."

유진은 딱히 젠체하거나 내 말을 부정하지도 않고 그냥 무심하게 게임을 다시 재개시켰다. 다시 패가 손에 쥐어진다. 이번에는 효진이가 죽었다. 손에 들린 패에 피어난 꽃과 나무를 보고 있는데 유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설령 여기서 돈 떨어졌다고 오링이라고 까주고 이런 거 없어요. 돈 잃으면 잃은 만큼 차용증 쓰세요. 개평은 드릴 테니 걱정 마시구요."

아마도 몹시 돈이 없어 헐거운 내 앞을 보면서 하는 말이겠지? 착잡한 마음에 한 가지 물어본다.

"........너 대체 어디 하우스 소속이냐. 좀 있으면 장기도 내놓으라고 하겠어?"

"알아서 뭐하시게요?"

소속이 아니라는 소리는 안 하는 구나. 이런 잔망스러운 계집 같으니라고.... 그나마 소득이 있었다면 오가는 패 속에서 유진이가 날 향한 물꼬를 텄다는 거다. 물론 "선생님, 죽으세요." 라든가 "선생님, 피 한 장 주세요." 뭐... 이런 대화라서 좀 그렇기는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이게 어디냐.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다시 붉은 패가 날아다닌다.

"여기서 스톱 할게요."

뜨악!! 잠시 딴 생각을 하며 치고 있었더니 이번에도 유진 앞은 수북, 선미 앞은 허전, 내 앞은 황량하다. 이제 그나마 남아있는 돈도 모조리 뺏기게 생겼다.

"이쪽은 또 피박에 광박에 멍박..... 선생님은 대체 남들 고스톱 칠 때 뭐하고 있었어요?"

점수 계산을 하던 유진이가 짜증을 부릴 정도다.

"뭐하긴! 나도 치고 있지!"

열심히 항변을 해보지만 결과는 그리 좋지 않다. 유진은 계산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내 손을 내밀었다.

"쳇. 암튼 256만원 빨리 주세요."

"뭐? 계산이 어떻게 그렇게 돼!"

"8점으로 끝났고 포고 했으니까 네 배, 그럼 32점이죠? 선생님은 피박, 광박, 멍박이니 2의 3제곱. 여덟 배네요. 32곱하기 8. 256 맞잖아요. 아니에요?"

"끄아아아아악!!"

고 녀석, 암산이 참 빠르기도 하지. 공학용 계산기 없으면 구구단은 물론 암산도 못하는 공대생으로서 그저 비명만 지를 뿐이다. 256만원은 고사하고 내 앞에는 지금 56만원도 채 남아있지 않았다. 유진이는 내 앞에 놓인 지폐를 훑어가더니 세어 보고 말했다.

"36만원니까 이제 선생님은 저한테 220만원 빚진 거예요. 아는 사이니까 특별히 이자는 받지 않겠어요. 대신 다음에 만날 때 꼭 가져오세요. 가져오지 않으면 그때부터는 아는 사이가 아닌 거예요."

내가 미쳤지, 미쳤어. 애초에 점당 만원이라는 터무니없는 소리를 받아들이지 말았어야 했다. 효진이가 200만원을 빌려줄 때, 그 때 고사를 했어야 했다. 머리통을 부여잡고 괴로워했지만 그렇다고 날아간 돈이 돌아오지는 않았다. 220만원이 뉘 집 개 이름이냐. 예전에 선영이한테 돈 때문에 꼼짝없이 붙들렸던 기억이 나서 더 쓰라렸다. 이제 유진이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라도 해야 할지 모르겠다. 그렇게 땅을 치며 후회를 하고 있는데 효진의 표정이 뭔가 이상했다. 그녀의 시선은 아까부터 유진이에게 꽂혀있었다. 몹시 흥미롭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얘, 너... 이름이 유진이라고 했지?"

"그런데요?"

"혹시 이거 치는 거 누구한테 배웠어?"

"네? 배우다뇨?"

패를 섞고 있던 유진의 손놀림이 멈췄다. 효진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내가 아는 사람이랑... 음.. 뭐랄까. 바둑으로 치면 기풍이라고 해야 되나? 그런 게 되게 비슷해. 말투도 그렇고.... 너 분명히 초반에는 아주 찔끔찔끔 잃고 있었잖아. 그때 우리를 관찰하고 있었지? 그러다 어느 순간 되어서 한석 군 죽일 타이밍 되니까 엄청 쎄게 몰아붙이고... 솔직히 지금도 봐봐. 한석 군 오링 나는 동안 나나 선미도 잃지 않은 건 아니지만 그 정도는 아니거든. 이렇게 한 명만 착실하게 죽이는 패턴을 내가 어디서 본 거 같은데?"

효진 답지 않은, 논리 정연하고 근거 있는 지적임에도 불구하고 유진은 대답을 회피했다.

".....운이 따른 거죠. 패턴 같은 게 어디 있어요? 고작 고스톱에."

그러나 효진은 고개를 저었다.

"고작? 운? 고스톱에 운이 어디 있어. 다 실력이지. 안 그래?"

"그래서, 안 치실 거예요?"

그러자 효진이 빙긋 웃으며 말했다.

"안 친다고는 안 했어. 내가 이런 건 어떤 전문가한테 제대로 배웠었거든. 나 역시 이제는 너에 대한 파악이 끝났어. 어디 한 번 제대로 해보자고."

파악이 끝났다는 효진의 말은 허풍이 아니었다. 이제 완전히 손을 떼고 판을 객관적으로 들여다보는 입장이 되고 보니 효진의 기세가 아까와는 다르다는 걸 확실히 알겠다. 유진의 패가 모일 것 같으면 효진이 선취점을 내며 판을 끝냈고 자신이 선을 잡았을 때는 확실하게 몰아서 선미와 유진의 점수를 갉아먹었다. 자정쯤에 시작된 고스톱 판이 새벽 두 시쯤에 이르자 소강상태가 되었다. 유진이는 연신 하품을 하고 있었고 선미는 이미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효진이가 웃으며 말했다.

"확실히... 너는 잘하기는 하지만 오래 쳐본 적이 없구나? 고스톱의 가장 큰 변수가 뭔지 알아?"

"뭔데...요?"

눈을 비벼가며 유진이가 말하자 효진은 들고 있던 폭탄을 깔아가며 말했다.

"결국은 체력 싸움이라는 거지. 자, 이걸로 피 한 장씩 주시고, 나는 투고를 외치고."

두 시 반쯤 되자 선미는 가진 돈을 효진에게 몰아주고 한쪽 구석으로 가서 잠들었다. 맞고로 전환한 두 사람의 싸움은 유진이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자 효진의 판정승으로 끝이 났다. 최종 금액은 유진이는 200만 원 가량 들고 있었고 효진이는 600만원. 금액으로 보면 효진이가 압승이지만 어차피 그게 다 원래 그녀의 돈이었으니 따고 자시고도 없다. 결과는 무승부.

그러나 더 칠 수 있는 효진과 더 칠 수 없는 유진이라는 점에서 그녀의 승리다. 들고 있는 패가 다 보이도록 내려놓고 고개를 못 가누는 유진을 보고 효진이가 살짝 웃었다. 그녀는 나한테 220만원을 주며 나중에 유진에게 갚으라고 했다. 내가 이렇게 큰돈을 받을 수 없다고 했더니 그녀는 빙긋 웃으면서 말했다.

"안 그러면 나중에 쟤가 널 물어뜯을 것 같아서 말야. 내 친구 몸에 기스 나는 건 사양하고 싶어."

그녀는 비유를 한다고 한 것 같은데 어쩐지 묘하게 현실가능성이 높아보였다. 별 수 없이 받아들이기로 했다.

"음.... 그래. 미안하지만 받아둘게. 나중에 꼭 갚으마."

"뭐, 나야 뭐... 갚아도 그만이고 안 갚아도 그만이야. 오늘 재미있게 친 걸로 만족해."

통이 크구나, 효진...  200만원을 꺼내놓으며 점당 만 원짜리 판을 치자고 제안한 유진도 유진이지만 거기에 응하겠다면서 600만원을 만들어와서 네 명이서 놀 판을 만들어낸 그녀도 대단했다. 나로서는 이런 금액이 오고 가는 게 도무지 현실성이 없다. 지금 이 돈만 해도 내 몇 달 생활비를 하고도 남을 텐데 그걸 이런 식으로 건네다니 말이다. 내심 감탄을 하며 유진이가 잘 자리를 마련하고 있는데 효진이가 중얼거렸다.

"쟤가 너 되게 미워하나 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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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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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까지 되도록이면 거의 0시에 맞추어 업로드 하곤 했습니다만 앞으로 이 시간이 아닌 틈틈이 시간 나는 대로 업로드 하기로 하겠습니다. 이 시간에 업로드 하면 너무 늦게 자서 다음 날 피곤하더군요.

양해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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