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01 / 0471 ----------------------------------------------
Main Route
장한 줄 알면 제발 좀 닥쳐주세요, 형. 얼굴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현아가 형을 제지하고 나서야 겨우 입을 다물었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나마 형을 컨트롤 할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이제 슬슬 보이기 시작한다. 형은 보고서는 적당히 쓰고 술이나 한 잔 하러 가자고 성화였지만 나는 이것만큼은 포기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다. 그런 다음 현아에게 들리지 않을 곳까지 형을 끌고 가서 속삭였다.
"대신에요, 이번 주 토요일에 형한테 보답 제대로 할게요."
"제대로라니?"
"전에 말했던 룸살롱 가서 술 마셔요. 우리."
머릿속에서 일단 유미에게 사과부터 하고 허락을 구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성격상 그리 어려울 것 같지는 않았다. 형이 빙글거리며 재차 물었다.
"아가씨까지 대주는 거야? 2차도?"
".....그런 건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요, 그냥 감사 표시로 술만 사는 거니까요.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세요."
그러자 형은 내 등을 팡팡 두드리며 자기가 알아서 아가씨 꼬셔 볼 테니까 너무 염려 말라고 했다. 그러면서 기껏 현아한테 돌아가서 한다는 소리가 토요일에 한석이가 자기한테 룸살롱 쏴야 되니 저녁에 만나기는 어렵다는, 이딴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쟤한테 안 들리게 내가 따로 말했잖아, 이 사람아!! 나와 눈이 마주친 현아가 황급히 고개를 숙이곤 나가버렸다. 형의 등짝을 향해 있는 힘껏 두 발 모아 플라잉 드랍킥을 날리고 싶었지만 그에 앞서 궁금한 게 있었다.
"저녁에 만나다니요? 둘이서?"
태근이 형은 정말 안 어울리게, 쑥스러워하며 뒤통수를 긁었다.
"어... 화요일 날 장례식장에서 돌아오면서 말이야. 너무 늦었다고 내가 현아 집 앞까지 데려다 줬거든. 그리고 내가 먼저 고백했어. 사귀고 싶다고."
헐. 이 인간. 그때 빈소에서 통 크게 행동하면서도 이런 디테일은 잊지 않고 챙기고 있었구나. 외유내강... 아니, 외강내강인 형의 이야기를 재촉한다.
"그래서요? 그러겠대요?"
"일단... 좋은 분위기였고, 현아도 긍정적으로 생각해보겠다고 했어."
그렇구나. 뭐.. 처음에는 두 사람이 아무래도 부녀지간처럼 보이는, 좀 언밸런스한 커플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럭저럭 둘이 있는 모습을 계속 보다 보니 어울리는 것 같기도 했다. 비록 중간에 은애로 인한 사단이 조금 있었지만 현아의 깨달음과 형의 다소 거친 방법을 통해 해결되지 않았던가. 그때 형이 보여준 모습이 조금 충격적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형이 상식적인 사람이라고 믿었다. 나도 물건 달린 남자긴 하지만 ROSE를 다니면서 보아온 남자들이 하고 다니는 꼬락서니는 물론 소란이의 불행을 야기한 종교인의 더러운 욕망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러나 형은 그런 사람들과는 다르리라, 그리고 현아에게도 잘 해주리라 믿었다.
"후후. 암튼 잘 부탁드려요. 현아가 어렸을 때는 좀 드세기는 했지만 지금은 아주 참한 애니까요. 형이 잘 해주세요."
고개를 끄덕이던 형은 이내 뭔가 이상한 부분을 눈치챈 모양이다.
"어렸을 때? 둘이 원래 알던 사이야?"
현아가 이야기를 안 한 모양이다. 나는 내가 현아를 알아보지 못했던 일과 지난 번 투서 사건 때문에 집을 찾아갔던 일, 그리고 현아의 언니들을 만나 어렸을 때의 일을 전해 들었던 것들을 간략하게 설명했다. 형이 좀 말은 거칠게 해도 기본은 명석한 사람이었고 내 부족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잘 알아들었다.
"좋아. 그럼 이제 언니들에게 잘 보여서 점수 따는 일이 남았구나. 후후후."
"........그 이야기를 또 어떻게 해석하면 그리됩니까?"
그러나 현아와의 관계를 그냥 단순히 사귀는 것만이 아니라 길게 보고 있는 거라면 형의 발언도 아주 틀린 말이 아니게 된다. 형은 턱을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나저나 세상 정말 좁구나. 어떻게 어렸을 때 그렇게 잠깐 본 사이가 이렇게 커서 다시 만나고 그러냐?"
"그러게요. 제가 예전에 어떤 책에서 봤었는데요, 살아만 있으면 언제고 꼭 한 번은 만나게 되는 게 사람 인연이래요."
내 말을 들은 형은 쓰게 웃었다.
"어째 그 말은 조금 무서운걸?"
의외였다. 이 사람이 무서운 것도 있었나.
"왜요? 예전에 뭐 죄지은 사람 있어요? 아니면 돈 떼어먹고 도망쳤다든가. 다시 보면 무서운 사람이 있었나, 형 같은 사람이?"
내가 해놓고도 좀 말이 안 되었다. 다른 건 몰라도 돈은 안 떼어먹었을 게 분명하다. 태근이 형이 대놓고 자랑을 하거나 유세를 떨지는 않았지만 형의 집은 굉장히 유복한 집안임이 틀림없었다. 일단 형이 몰고 다니는 차도 그렇고 그의 동생인 효진이가 대동하고 다니는 변호사도 그러하다. 합의금과 장례식 비용을 턱턱 내어놓는 것은 물론이요, 아까도 내가 그걸 갚겠다고 했더니 웃으면서 그냥 술이나 사라는 식으로 넘어가 버렸다. 한두 푼이 아닌 돈인데 크게 개의치 않는 그를 보고 있으면 어쩐지 사람이 돈이 많다는 게 다른 게 아니라 저런 대범한 성격을 가질 수 있다는 점에서 부럽다고 생각되었다.
내 비록 돈이 궁하다고 막 어렵게 살아오고 찌질하게 살아온 건 아니었지만 시골에서 밭농사 지으시며 서울 유학 간 아들에게 돈 부치는 엄마를 생각하면 수중의 돈을 허투루 쓰기 힘들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면서도 술값, 데이트 비용 같은 엄한 돈이 아예 안 나가는 것도 아니지만 최소한 마음이 아주 편하지만은 않았단 소리다. 그렇기에 유진이 과외를 시작하기도 했지만...
"나는 뭐 무서운 게 없는 줄 아냐. 누구나 그렇듯이 바르게 살아온 것만은 아니니까 보면 껄끄러운 사람이 있기도 하고 그렇지."
형이 특유의 너털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그래도 현아 같이 귀여운 애는 언제고 다시 만나고 싶기는 해. 그런 점에서 지금 있을 때 잘해 줘야지."
아까 먼저 나간 현아를 따라가는 형을 배웅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쓰다만 보고서가 날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자리에 앉아 펜을 잡고 쓰기 시작하는데 어느샌가 종례를 마친 지애가 돌아와 날 타박했다. 여태까지 보고서 한 장 안 쓰고 뭐하고 있었냐고. 으윽.... 태근이 형..... 가끔은 형이 고맙기도 하지만 이럴 때는 참 원망스럽답니다.
지애의 잔소리를 들어가며 간신히 보고서를 다 썼다. 지애의 검토와 결재를 받고 교무주임 선생님의 자리에 올려놓은 다음에야 퇴근할 수 있었다.
"어디까지 가요? 태워 줄까요?"
주차장으로 내려가며 지애가 내게 물었다. 나는 차를 가져왔노라고 대답했다. 주차장에 도착하자 그녀는 내 차,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선영의 차를 힐끔 돌아보고 물었다.
"차도 있었어? 한석... 아니, 최 선생?"
학교 밖에서는 누나 동생으로 지내기로 했지만 여긴 아직 학교다.
"제 차는 아니구요. 당분간 맡아둔 거예요."
말은 이렇게 했지만 그 당분간이 얼마가 될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녀의 말대로 짧게 잡으면 1, 2년. 어찌 보면 평생.... 내가 맡아두어야 할지도 모른다. 차량 유지비 정도는 꾸준히 벌어야 할 텐데 말이다. 생각해 보니 이것도 살짝 부담되었다.
"혹시 아버지 차?"
검은색의 중형 세단이라 어쩐지 좀 나이 들어 보이는 분들이 몰고 다니면 딱 어울릴 차이긴 하다.
"아뇨. 그냥 아는..... 분인데요."
격정적인 어젯밤, 그리고 오늘 아침까지 나와 어울렸던 여자에 대해 그냥 아는 사람이라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 못내 서글펐다.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길을 걸어가기로 결정했고 뒤에 남은 나로서는 응원 말고는 해줄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내 말을 들은 지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말했다.
"흐음. 운전하는 사람들은 어지간해서 자기 차를 남에게 잘 안 맡기는데... 굉장히 친밀한 사이인가 보네."
"그런가요."
친밀하지 않다면 그건 거짓말이다. 그래. 어떻게 몸을 섞는 사이였는데도 친밀하지 않을 수 있을까. 남자와 여자, 여자와 남자가 만나 가질 수 있는 최고의 교감이 바로 섹스 아닐까. 이제는 더 이상 보기 어려운 그녀가 남긴 가장 큰 선물을 내려다보며 나는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지애는 운전 조심하라는 말을 남기고 자기 차를 향해 갔다. 지애에게 인사를 하고 먼저 보낸 후에 나도 차에 오른다.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목표한 곳까지는 학교에서 그리 멀지 않았다. 가게 뒤에 주차했다. 차에서 내리는데 마침 이쪽으로 오고 있던 아는 얼굴과 마주쳤다.
"어? 한석 씨 잖아요."
"아, 지나 씨. 안녕하세요. 오랜만이네요."
홀복이 아닌 차림의 그녀는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지금 출근하는 모양이었다. 몸에 착 달라붙는 라인이 돋보이는 트레이닝복 차림에 푸른 색 손가방을 들고 가볍게 걸어오던 지나는 나를 알아보았다. 그녀는 손을 들어 인사했다. 나도 손을 들어 대답해주곤 ROSE 뒷문을 향해 같이 걸어갔다. 그녀가 내가 몰고 온 차 역시 알아본 모양이다.
"왕언니는 결국 내려갔나 보네요?"
그러고 보니 선영은 그녀에게 자기 오피스텔 매각에 대해서도 일임해두었다고 했었다. 나한테 확인해달라는 이야기도 있었고... 그 이야기를 물어보았더니,
"거기 오피스텔 맞은편에 황금복덕방 아시죠? 거기에 내놨어요."
라며 선선히 대답해주었다. 종업원들이 드나들도록 해놓은 뒷문은 일단 주방을 거쳐서 안으로 들어가게 되어 있었다. 근래 ROSE에 계속 다니면서 아는 얼굴이 부쩍 늘어난 터라 만나는 사람들과도 눈인사를 주고받으며 안으로 들어간다. 지나가 날 따라오며 쫑알거렸다.
"언니는 천천히 팔아도 된다고 하는데 막상 요새는 수요가 많이 몰리는 시기가 아니어서 복덕방 할아버지가 제값 받기는 어려울 거라고 하던데요. 그거 꼭 팔아야 되나요? 아님 그냥 전세나 달세로 돌려놓으면 안 되나? 혹시 왕언니가 한석 씨에게 따로 이야기한 거는 없어요?"
내가 ROSE에 드나들고 있는 이유가 이 가게의 장부를 정리하는 일이다 보니 지나는 나를 무슨 금융컨설턴트처럼 여기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저 평범한 공대생일 따름인 나로서는 부동산 문제에 대해 가타부타 말하기가 어려웠다. 유미와 의논해보겠다고 일단 둘러대었다. 지나는 몇 마디 더 중얼거리다가 아가씨들 대기실로 들어갔고 나는 사무실 앞에 섰다. 심호흡을 하고 노크한다. 누구라고 말하기도 전에 안에서 들려오는 목소리가 있었다.
"들어오세요, 선생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