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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03화 (103/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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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살을 섞은 여자를, 그런 식으로 부르면 안 돼요. 차라리 이름을 부르던가 연상이라 마음에 걸리면 누님이라고 부르던가요. 근데 전 누님이라고 불리면 나이 들어 보여서 싫구요 그리고 선생님이 저한테 존대하는 것도 싫구요."

"그러면.... 유미?"

그녀가 활짝 웃는다. 안 그래도 예쁜 얼굴이 더욱 활짝 피어난다.

"훨씬 낫네. 앞으로는 꼭 그렇게 불러."

유미는 이제 말까지 놓는다. 남에게 말 놓는 것이 익숙지 않은 나는 조금 주저했다.

"어떻게 그래요."

"남 보기가 그러면 단둘이 있을 때만 그렇게 부르던가. 나는 이제부터 자기라고 부를 테니까. 이쪽 세계에서 딱딱한 호칭을 붙여 부르는 건, 어째 손님에게 호칭하는 느낌이 나서 말이야. 난 별로 좋아하지 않아."

아아. 문득 선영의 얼굴이 떠올라 버렸다. 언젠가부터 나를 향해 자기, 라고 부르던 그녀의 입술이 떠오른다. 그게 언제부터였더라. 그녀의 어머니 산소를 다녀온 다음이었던가. 난 그게 아무한테나 다 갖다 붙이는 호칭일 거라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 그랬던 걸까. 그랬는데... 이제 그녀는 더 이상 날 그렇게 부르지 않겠지.

"자기야?"

"어? 어...."

순간 깜짝 놀랐다. 고개를 들고 유미를 쳐다보자 그녀가 빙긋 웃었다.

"다음에 언제 한 번 우리 집에도 놀러 와."

"집에는 왜?"

그러자 그녀는 내 귓가에 입을 대고 숨결을 불어넣으면서 말했다.

"나한테 말이지, 유진이네 학교 교복도 있어. 그거 입고 한 번 해줄게. 날 보고 유진이라고 부르면서 한 번 해봐. 어때, 상상해보니 흥분되지?"

뒷목이 뻣뻣해진다. 제아무리 막 나가는 유미라고는 하지만 정말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내가 손을 들어 됐다고 고사를 했더니 기껏 한다는 소리가,

"흐음~ 역시 유진이랑 직접 하고 싶어....?"

.......이딴 소리나 하고 있다. 난 살짝 화를 냈고 그녀는 그렇게 화를 내는 날 보면서도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하아. 덕분에 오늘 물어보려고 했던 이야기를 까먹고 말았다.

금요일. 모든 평가가 오늘부로 끝난다. 4주.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그동안 있었던 일을 돌이켜보면 가장 먼저 불행한 일이 생각나서 안타깝기는 하지만 그래도 많은 사람을 만나고 많은 학생들을 대할 수 있어서 좋은 시간이기도 했다. 특히 효진의 오빠인 태근이 형을 알게 된 거나 어린 시절 친구였던 현아를 다시 만나게 된 일은 퍽이나 신기한 일이었다. 지척에서 바라본 지애라는 선생님을 통해 그동안 막연하게 머릿속으로만 그려내던 교사라는 직업에 대한 면면을 느끼게 되었다. 여러모로 상실과 수확이 엇갈리는 기간이었다.

오후에 교무실에 실습 동기와 담당 사수들이 모여 실습 종료를 선언하고 평가내역을 전달받았다. 나와 태근이 형, 현아 모두 "수" 평가였다. 늘 보고서도 대충 쓰고 수업이라고 해보아야 애들이랑 시시덕거리면서 노는 게 전부였던 태근이 형이 최우수 교생으로 뽑힌 건 상당히 의외였지만... 학생들과 친구처럼 허물없이 지내는 것은 물론 다양한 선생님들과 친밀하게 지내 온 형을 생각해보면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었다. 누구보다 교사가 되어 싶어 했던 형이니 앞으로도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란다며 아낌없이 축하해 주었다.

당일 저녁, 처음에 왔을 때와 마찬가지로 선생님들을 모시고 횟집에서 전체 회식을 했다. 담당 사수였던 지애가 내 옆에 붙어 앉아 이것저것 챙겨주었다. 마지막에 술을 따라주며,

"나중에 임용고시 붙으면 연락해요. 도와줄 테니."

라고 말했다. 대체 뭘 어떻게 도와준다는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감사를 표했다.

"감사합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내가 해준 게 뭐가 있다고."

찰랑거리는 술잔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런저런 상념이 들었다. 그녀도 그런 눈치를 챘는지 자신의 잔을 들어올리며 말했다.

"늘 학생들을 생각하고,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솔직해져요. 그러면 뭐든지 답이 보일 거야."

"네."

서로의 잔을 맞부딪히고 술을 마셨다. 이미 거국적으로 건배제의와 잔 돌리기는 어느 정도 마친 터라 술이 상당히 올랐다. 지애도 그러한지 조금 꼬부라진 목소리로 이런 이야기까지 했다.

"여자는.... 가려서 만나고....."

"네? 무슨...."

"그 눈빛 이상한 여자는 만나지 말고 말이야. 옷차림은 꼭 술집 여자처럼 해가지고...."

눈빛 이상한 여자라는 게 누굴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옷차림이 술집 여자 같은 분이라면 한 분 알고 있다. 그 사람은 술집 여자처럼 입은 게 아니라 술집 여자가 맞다고 지애의 오류를 정정해주고픈 욕구에 휩싸였지만 애써 참았다.

"아, 예."

그냥 이렇게 대답했을 뿐이다. 회식이 끝나고 지애와는 악수를 나누고 헤어졌다. 나에 대해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그녀를 전혀 모르진 않았지만 어쩐지 그녀와 나는 어울리지 못 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다른 곳을 보고 있는 느낌이 어렴풋하게 들었다. 그렇게 회식은 끝이 났다. 이제는 여자친구가 생겼다고 술을 자제하는 태근이 형이 현아를 데려다 준다고 같이 가는 걸 보았다. 나 역시 발걸음을 돌렸다. 밤이 도시를 지배하고 인간이 만들어 낸 불빛이 길거리에 가득한 시간이 되었지만 이 시간이 가장 활발한 곳이 있으니 말이다.

"어머, 술 좀 했네, 자기?"

ROSE 사무실에 도착하자 유미가 내 상태를 곧바로 알아보고는 주방에 일러 꿀물을 타오도록 했다. 소파에 몸을 깊숙이 파묻고 넥타이를 거칠게 빼내었다. 한숨을 내쉬는데 숨결에 술 냄새가 섞여 나온다.

"오늘 끝난 거지, 교생은?"

"응. 그러네."

머릿속에서 4주간의 일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처음 날 보고 눈을 동그랗게 뜨던 유진이의 모습부터 그 옆자리에 있던 소란의 모습까지....  정말 좋은 형처럼 대할 수 있는 태근이 형과 어린 시절의 모습을 까맣게 잊은 국민학교 동창 현아, 제 꾀에 제가 빠져 사라져 버린 은애...와 같은 동기들도 떠오른다. 학교에서는 누구보다도 엄했지만 바깥에서는 따스한 모습을 많이 보여주었던 지애도 생각난다. 그런 그녀가 했던 마지막 당부도....

"누가 그러더라."

"누가, 뭘?"

지나가 가져다준 컵에서 뜨거운 기운이 모락모락 올라오고 있었다. 내 옆에 붙어 앉은 유미는 찻수저로 그것을 가만히 젓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허리에 손을 둘러 내 쪽으로 당기며 말했다.

"나보고 유미 만나지 말라던데? 눈빛도 이상하고 옷차림도 이상하니까 사람 가려 만나라고."

"후후후. 누가? 그때 그 여자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미는 컵을 내밀며 말했다.

"흐음, 그래? 그럼 이제 자기랑 못 놀려나. 그럼 나야, 뭐, 다른 사람 만나면 되지."

몹시도 시크한 그녀의 말투에서 상처를 받지 않았다면 거짓말이지만 그래도 그녀의 직업이 직업이기에 어느 정도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녀와 선을 넘었다고는 하지만 호칭만 바뀌었을 뿐, 기본적으로 그녀가 날 대하는 태도는 크게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빙글거리며 놀리는 게 전부다. 불평을 조금 해보았다.

"너무 가볍게 날 대하는 거 아냐? 조금이라도 아쉬워 할 줄 알았는데."

그러자 유미가 깔깔 웃었다.

"뭐야. 자기한테는 어차피 유진이가 있잖아. 나 같이 늙은 사람은 그냥 가볍게 만나면 되는 거지, 뭘 또 집착하려고 해?"

한숨을 내쉰다. 정말 이 여자의 사고방식은 따라가기가 버겁다.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했다.

"유진이가 오늘도 학교 안 나왔어. 대체 집에서 뭐해?"

유미는 내 질문에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다가 내 얼굴을 올려다보더니 이렇게 말한다.

"글쎄, 뭔가 다른 거 공부하고 있는 거 같던데?"

너무 태연하게 말하는 그녀의 말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다른 거 공부라니? 대체.... 뭘....  그때 문득, 빈소에서 유진이가 태근이 형에게 했던 대꾸가 생각난다. 그때 유진이는 분명 이렇게 말했다.

- 이제 안 가려구요. 꼴 보기 싫은 사람이 있어서.

아오... 진짜, 이 기집애가.... 정말 학교를 그만두고 검정고시라도 준비하고 있는 건가 싶었다. 아무리 내가 싫어도 그렇지, 그렇다고 지가 잘 다니고 있는 학교를 그만둘 만큼 내가 싫다는 건가. 조금 부아가 난다. 난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고 말했다.

"그럼 그때 한 말이 농담이 아니었단 말이야? 정말 학교 그만두겠대?"

"자기한테는 무슨 말인가 한 모양이지? 그야 나야 모르지."

"이봐요. 아줌마. 지금 다른 사람이나 다른 나라 학생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고 바로 당신 딸 이야기하고 있는 거거든? 말투가 너무 무심한 거 아냐?"

내 타박에도 불구하고 유미는 고개를 저었다.

"자기가 그러겠다는데 내가 어쩌겠어? 내가 언제 유진이 일에 간섭하는 거 봤어?"

"그거야 그렇지만... 이 정도의 문제에 그렇게 쉽게....."

"마음에 걸리면 자기가 가서 설득해봐."

설득이라... 아니, 이미 그 전에 나를 만나 주기나 하려나. 슬퍼하던 모습과 퉁명스러운 모습이 번갈아 머릿속에서 스쳐 지나간다. 내가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유미가 엉뚱한 소리를 내뱉는다.

"말을 영 안 듣거든 덮치기라도 해보든가. 그러면 말을 아주 말 듣...."

깜짝 놀라 그녀의 입을 틀어막았다.

"유미!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해?"

이 여자와 살을 섞긴 했지만.... 당최 어떤 여자인지 모르겠다. 진짜 말이면 단 줄 아나. 기겁을 하며 쳐다보고 있는데도 그녀는 전혀 빈말하는 눈치가 아니었다. 아니다. 어쩌면 늘 그렇듯이 날 가볍게 놀리고 있다고 보는 게 더 정확할 테다. 그녀는 내 손을 밀어내곤 어깨를 으쓱하며 말한다.

"그게 제일 확실한 방법이니까 그러지."

"하아... 정말이지... 유미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내 정신이 오락가락해."

그러자 유미는 과장된 동작으로 입을 가리며 말했다.

"어머, 설마 유진이가 싫은 거야? 다시는 안 볼 거야?"

"어... 그건... 그러니까..."

"그럼 됐네. 잘 해 봐."

그녀는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내 팔을 잡아당겼다. 전표 정리는 다음에 해도 된다며 그녀가 날 일으켜 문을 향하여 떠밀었다.

"정말 지금 유진이한테 가라고?"

"쇠뿔도 단김에 빼라잖아. 말 나온 김에 가보지 그래?"

분명 이 시간에 그 집에는 유진이 혼자 있을 테다. 야심한 시각에 자기 딸 혼자 있는 집에, 그것도 살짝 술에 취해 알딸딸해 있는 남자를 들여보내는 게 제정신에 가당키나 하나. 아니, 그 전에 이미 이 여자가 뭐라고 했던가를 떠올려 보면 머릿속이 복잡해진다. 그러나 유미의 태도는 의외로 완강했고 이런 쓸데없는 조언까지도 서슴치 않았다.

"갈 때 콘돔 사가는 거 잊지 말고. 우리 집에는 그게 없거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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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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