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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04화 (10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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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됐거든!!"

화를 내보아도 유미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다. 한숨을 내쉬며 사무실을 나서려다가 한 가지 물어보기로 했다.

"유미, 딱 이거 하나만 물어볼게."

"뭔데?"

주변을 두리번거린다. 다행히 아무도 없었다. 목소리를 낮추어 살짝 물어본다.

"...대체...나랑 왜 한 거야? 자기 딸에 대해서 그렇게 말할 거면서?"

기억을 돌이켜 보면, 자기 딸을 가리켜서 날 향한 연적이라고까지 말했던 그녀다. 기회를 잡고 날 올라탄 것까지는 이해하겠는데 지금은 또 자기 딸에게 날 보내려고 하고 있다. 대체 갈피를 잡을 수 없다. 이런 질문을 들은 유미는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며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자기는 동물의 왕국 좋아해?"

"뭐?"

손범수 아나운서의 그 혼신 넘치는 동물 성우 연기가 재미있어 가끔씩 보곤 하는데... 그게 나와 대체 뭔 상관이지? 설마 나와 했던 걸 일종의 교미행위라고 말하고 싶은 건가? 이런, 짐승! 이렇게 말하려는 건가?

"난 그거 되게 좋아해. 자주 보곤 해. 특히 개코원숭이. 이런 애들 보면 귀엽지 않아?"

묻는 말에 대답은 안 하고 여전히 알 수 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유미를 향해 인상을 찌푸려 보이곤 ROSE를 나왔다. 택시 하나를 잡아타고 아파트를 향하면서 생각했다. 유진이는 정말 학교를 그만두려는 걸까. 짝이자 친구인 소란이의 불행을 생각해보면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는 건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이유로 나에게도 이별 아닌 이별을 통보했지... 그렇다고 학교를 그만두려고까지 하는 건 너무 오바가 아닌가 싶었다. 생각이 채 정리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도착해버렸다. 택시에서 내리고도 한참 동안 서성거렸다. 아파트 단지를 코앞에 두고도 바로 들어가기가 무엇하여 주저했다. 그러다가 일단 예전에 자주 가던 카페에 들어갔다. 이렇게 늦은 시간인데도 열려 있다니... 동네 카페 치고는 특이하다고 생각했다.

딸랑-

"어서 오세요."

문에 달린 종이 울리는 소리에, 카운터에 서 있는 점원이 반사적으로 인사를 건넸다. 늘 주문하던 곳으로 다가가 물어보았다.

"여기 테이크아웃도 되죠?"

"네."

동그란 눈매의 여점원이 주문을 받았다. 늘 마시던 브랜드커피 두 잔을 포장해 달라 주문하고 기다렸다. 뭔가 이상하게 생긴 기계를 써서 커피 원액을 뽑아내는 그녀의 뒤태를 잠시 감상했다. 예전에 아무 생각없이 이 카페를 오고 갔는데 유진이가 쓸데없는 소리를 한 이후 나도 모르게 여기 점원을 눈여겨보게 되었다. 키도 작고 얼굴도 어려 보이는 인상이었지만 무엇보다도 커다란 특정 부위가 자꾸만 시선을 빼앗는다. 못해도 지혜 정도는... 아니, 지혜를 능가할지도 모르겠다. 짙은 색의 커다란 박스티를 입고 있어서 눈으로는 정확한 측정이 어렵기는 하지만 가슴 아랫부분에 드리워진 그늘이라던가 양감을 통하여 추정해보면....

"오랜만에 오시네요?"

"네?"

잠시 넋놓고 보고 있느라 얼빠진 소리를 냈다. 주전자를 들어 컵에 물을 채우고 뭔가 첨가하는 등의 작업을 하면서 그녀가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말했다. 귀를 기울이지 않으면 잘 들리지 않을 정도로 작은 소리였다. 그녀는 다소 주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전에는... 낮에 항상 오시다가...."

"아, 예. 하던 일이 좀 바뀌어서요."

날 기억하는 건가? 하긴 그 손님도 별로 없는 낮시간에 와서 제일 싼 커피만 하나 달랑 시켜놓고 줄곧 앉아 시간만 죽이고 있었으니 좀 얄미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부터는 좀 비싼 걸로 시켜야 하나... 그녀의 질문은 이어졌다.

"학생 아니셨어요? 일하시는 분이었나요?"

"아, 그게요."

거의 다 깨긴 했지만 아직 조금이나마 술기운도 있고 저쪽에서 먼저 물어본 것도 있기에 바로 얼마 전까지 교생 일을 했다는 것을 이야기했다. 그게 오늘부로 끝났고 이제 원래 학생으로 돌아간다고 했더니 그녀는 살짝 미소까지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 이제... 다시 오시겠네요?"

"네? 뭐.... 아마도요?"

아아, 남자라는 동물은 이래서 문제다. 여자가 무슨 말만 하면 말이다, 혹시 이 여자가 날 좋아하나... 하는 말도 안 되는 착각을 종종 하곤 하니 말이다. 날 향해 미소를 짓는 점원에게 한순간 혹하기는 했지만 이내 머리를 흔들어 정신을 비웠다. 불과 작년까지만 해도 여자들이랑 말도 잘 못 했었는데 여러 우여곡절을 거치면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상상까지 하는 경지에 이르렀다. 예를 들면, 저 가슴 큰 점원과 내가 사귄다거나... 하는 망상 말이다. 영업용 미소일 게 분명한데도 거기에 설레는 난 또 뭐냐. 속으로 한숨을 푹푹 쉬며 쓸데없는 생각을 지웠다. 계산은 마치고 종이가방에 담긴 두 잔의 커피를 건네받는다.

"또 오세요."

"네에."

점원에게 목례를 하곤 돌아섰다.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어가고 있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면서 살짝 겁이 났다. 유진이가 무서운 건 아니다. 솔직한 심정을 말하라면 다시 보고 싶기도 했다. 그렇지만 그 아이와의 나 사이에는 대체 뭐가 있는 건가 생각하면 이렇게 밤늦게 찾아가는 게 주저되는 것도 사실이다. 자신의 몸을 줘가며 다짐을 받았던 선영과의 약속은 이미 없다. 유미는 말 안 들으면 덮치라고까지 했다. 비록 날 향해 실망과 배신감을 토로하며 등을 돌린 녀석이었지만 그래도 한때는 나에게 상반신 알몸 어택까지 했던 녀석이다. 정말.... 정말 괜찮은 걸까. 스스로 끊임없이 되묻지만 답은 나오지 않는다. 심호흡을 하고 유진이네 집 현관 앞에 섰다. 벨을 누른다. 호랑이 굴에 들어가도 정신만 차리면 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누구세요?"

"나야."

그러나 문을 바로 열리지 않았다. 카메라까지 달린 인터폰이기에 내가 누군지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녀석은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나가 누군데요?"

".......최한석입니다."

통렬한 무언가가 마음을 헤집는 듯한 느낌이다. 나의 절절한 목소리에도 불구하고 문은 열리지 않았다. 여전히 차가운 목소리가 되돌아온다.

"저는 모르는 사람인데요."

휴우. 그럼 그렇지. 한숨을 내쉰 다음, 손에 들린 테이크아웃 커피가 담긴 종이 가방을 들어 카메라에 비추었다. 그리고 말했다.

"실례합니다. 이 집에 사시는 진유미 씨가 따님께서 늦게까지 공부하신다고 커피를 배달시켰습니다. 저는 커피배달원입니다."

이런 낯 부끄러운 대사를 읊어댈 수 있는 건 내 몸에 아직도 알코올 기운이 절절히 흐르는 까닭이다. 유미는 이거 대신 콘돔이나 사가라고 했지만 난 이걸 택했다. 이번에도 모르는 사람이니 돌아가라고 하면 어쩌나 싶었는데 다행히도 이번에는 통한 모양이다.

달칵-

문이 열렸다. 안으로 들어가니 어깨가 훤히 드러난 끈 달린 원피스 형태의 잠옷을 입고 있는 유진이가 현관에 서 있었다. 무척이나 귀엽고 깜찍한 모습이었다. 바로 침대로 데리고 가도 손색이 없을 차림이기도 하고...... 이런 망상을 펼치다가 마음속으로 내 뺨을 두드렸다. 정신 차리자, 정신! 저건 호랑이다! 호랑이다, 어흥!

인상을 찌푸리고 있는 호랑이가 나한테 손을 척 내밀었다. 손바닥을 하늘로 향하는 걸 봐서 악수를 하자는 건 아니고.. 설마 중세 궁중식 예법으로 인사를 하라는 건가. 그럼 여기서 무릎을 꿇고 손등에 입을 맞춰야 하나... 잠깐, 그 예법대로라면 손등을 내밀어야지.

"뭘 멀뚱히 보고 있어요? 커피 배달 왔다면서요?"

"어? 어...."

쓸데없는 망상은 얼른 지워버렸다. 유진의 재촉이 이어진다.

"커피 주세요."

"커피 말이야?"

"네."

한숨을 쉬며 들고 있던 커피 캐리어를 유진에게 건네주었다. 그걸 내려다본 호랑이, 아, 아니, 유진이는 다시 한 번 인상을 찌푸렸다.

"왜 두 개죠?"

"왜....라니. 나도 마시려고 그러지."

내 대답에 코웃음을 치며 째려보는 유진.

"웃겨? 무슨 배달원이 자기 먹을 것도 같이 가져와요? 이거 완전 사기 아냐?"

것두 그러네. 짜장면 한 그릇을 시켰는데 두 그릇이 배달되어 오더니 배달원이 옆에 앉아서 먹고 있으면 그것도 퍽이나 웃긴 장면이 되겠다.

"미안하다. 내가 잘못했어."

허리를 굽혀 사과한다. 커피 두 잔을 가져와서가 아니었다. 하고 싶었던 말이 있었다. 허리를 아직 펴지 않은 상태에서 생각하고 있던 말을 쏟아낸다.

"소란이 일이 그렇게 된 거에... 나도 몹시 후회하고 슬퍼했어. 도움이 되지 못했다는 자책도 많이 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너까지 학교를 그만두고 그러면 정말 안 될 것 같아. 그 생각은 좀 재고해 보라고 이야기하려고 온 거야."

"......"

"물론 니가 날 싫어한다고 하니 정말 커피만 마시고 돌아갈게. 진짜야."

".....하아..."

나이에 맞지 않게 긴 한숨을 내뱉는 유진... 녀석은 나보고 고개를 들라고 했다. 턱으로 안쪽을 가리키며 말했다.

"진짜 커피만 마시고 돌아갈 거죠?"

"응."

"그럼 들어오세요."

전에는 그리도 잘 드나들었는데 4주만에 다시 들어서는 유진이네 집은 조금 생경했다. 사실 딱히 달라진 것은 없었다. 거실에는 과외할 때 쓰던 테이블이 그대로 놓여 있었고 그 위에는 신문과 잡지, 그리고 뭔가 기록한 메모 같은 것이 어지럽게 흩어져 있었다. 종이가방에서 커피 하나씩을 빼어들고 늘 앉던 자리에 앉는다. 유진도 나처럼 종이컵의 커버를 벗기고 커피를 홀짝거리고 있었다. 둘 다 아무 말이 없었다. 커피를 다 마실 때쯤 되어서야 유진이가 말을 꺼냈다. 녀석은 차분한 어조로 물어보았다.

"대체 누가 그래요?"

"뭘?"

"제가 학교 그만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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