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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06화 (10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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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침하게 딱 잘라 말하며 얼음 주머니를 내미는 녀석을 보고 할 말이 없었다. 병 주고 약 준다는 옛말은 들어봤지만 물어 뜯고 얼음 주머니 준다는 말은 처음 들어본다.

"빨리 올려놔요. 벌써 빨개지고 있잖아요."

그러면서 다시 내 손을 가져다가 테이블 위에 올려놓더니 그 위에 얼음 주머니를 척하고 올려놓는다. 말도 안 되는 생각이지만... 차가운 감촉이 날 따뜻하게 감싼다.

이게 무슨 난폭한 짓이냐고 힐난해 보았지만 유진은 고집스럽게 입을 꾹 다문다. 자신이 방금 저지른 행동에 대해서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아무리 다그쳐도 덜 익은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무니 따지는 건 그냥 포기했다. 손등의 통증이 어느 정도 진정 된 후에 얼음 주머니를 싱크대로 갖다 놓았다. 반대편 손으로 물린 곳을 문지르면서 자리로 돌아와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이렇게 자료를 모아서 어떻게 할 생각이야?"

그제야 입을 연다.

"모르겠어요. 저도 딱히 무슨 생각이 있어서 모아본 건 아니니까요."

그 심정이 이해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뭐라도 해보고 싶은 심정.... 나라고 왜 없었겠는가. 그렇지만 나는 생각만 하고 있었고 녀석은 행동으로 옮기고 있었다. 대견하긴 했지만 그래도 녀석을 조금 탓해본다.

"그렇지만 학교는 나가야 될 거 아냐."

그러자 고개를 살짝 들어 고양이 같은 눈매로 날 한 번 흘겨본다.

"아저씨가 데리러 오면 갈 생각이었어요."

말이나 못하면 으이구...

"......그래, 내가 잘못 했다. 이제 내가 왔으니까 내일부터는 학교에 꼭 나가. 알았지?"

"봐서요."

이런, 제멋대로가 아주 그냥 백화점 사치품 코너 마냥 고품격인 녀석을 보았나. 내가 혀를 차고 있자니 녀석이 몇 마디 덧붙였다.

"가능하면 저도 이 자료를 사건을 수사하는 쪽에 전달하고 싶기도 했어요. 신문 스크랩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이 자료 같은 건 저도 참 어렵게 구했거든요. 구해다 준 사람의 말에 의하면 절대로 정상적인 경로에서는 못 구할 자료라고 할 정도니까요. 말세교에서는 절대로 유출이 안 되게 하려고 사력을 다하던 장부라던데요."

그렇게 말하면서 유진이가 가리킨 것은 어떤 감열지였다. 팩시밀리에 사용하는 그런 종류의 종이였다. 거기에는 어떤 단체나 사람의 이름과 금액, 그리고 무슨 의미인지 모를 숫자 등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마치 어떤 장부의 한 페이지를 그대로 떠다 놓은 것처럼 생겼다. 나로서는 그게 무슨 의미를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만약 이게 말세교에서 감추고자 하는 문서였다고 한다면 수사하는 측에서는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만큼 의구심이 먼저 드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 정도로 중요한 문서를 일개 여고생인 유진이가 구했다고?

"누가 구해줬는데?"

"그건 말 못 해요. 그런 분이 있어요. 저도 엄마 소개로 간신히..."

"간신히?"

뭔가 더 말하려던 유진은 고개를 좌우로 저으며 말했다.

"아무튼, 이건 그런 거란 말이에요. 출처를 말하면 절대로 안 된다고 했어요. 그렇게 막상 모아보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제가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냥 보면서 기분만 더 울적해지고 있었어요."

호오. 그래서 기분전환도 할 겸 이빨로 남의 생살을 콱! 하셨다? 이렇게 비아냥거리고 싶었지만 유진의 표정이 워낙 어두워서 차마 그러진 못 했다. 누구보다 친한 친구를 잃은 사람은 다름 아닌 이 녀석이니까. 나도 덩달아 침착해져서 가만히 그걸 내려보고 있다가 문득 한 사람이 떠올랐다. 내 폭행사건을 변호하던 하영이라는 변호사가 했던 말이 생각났다.

- 제 친구 중에 검사로 있는 년이 하나 있어요. 걔가 조사하고 있는 게 바로 그 교회라서 어쩐지 신경이 좀 쓰이는군요.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딱 튕겼다. 이런 내 행동을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보는 유진을 향해 말한다.

"저기 말이야. 내가 이거 책임지고 수사하는 곳에 전달해 줄 테니까, 그러면 너 꼭 내일부터 학교에 가는 거야. 어때?"

"아저씨가 무슨 수로요?"

"나 이번에 폭행 사건 때문에 경찰 갔을 때 말이야, 태근이 형이 변호사를 붙여줬었거든. 그때 그 변호사가 이 사건을 수사하는 검사와 친한 사이라고 했어."

심지어 "년"이라고 호칭할 정도로 말이다. 아니, 잠깐만. 그러면 친한 게 아닌 건가.... 갑자기 확신이 없어진다. 내가 아리까리한 표정으로 있자니 유진도 날 의심스럽다는 듯이 쳐다본다.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 확신을 가장하고 힘주어 말한다.

"물론 네가 친구를 잃었다는 점에서 많이 슬퍼하고, 또 이런 준비를 해왔다는 거는 나도 어느 정도 인정을 하겠어. 대견하다고도 생각하고 있어. 오히려 내가 이렇게 하지 못했다는 게 미안할 정도야. 그렇지만 넌 학생이야. 언제까지고 학교에 다니지 않고 이런 것만 조사하고 있을 수는 없잖아. 내가 반드시 그 사람에게 이 자료를 전달할 테니 너는 학교로 돌아가."

숨도 안 쉬고 확 이야기해 버린다. 한참 망설이던 유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자기 고집이 세기는 아주 고래 힘줄 같은 녀석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경우를 아는 녀석이기도 하다. 더 딴소리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눈앞에서 확신을 주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무선전화기를 가져와서 예전에 받아두었던 하영의 명함을 보고 그녀의 휴대전화로 전화를 걸어 본다. 시간이 좀 많이 늦기는 했지만 그녀라면 받을 것 같았다.

"여보세요?"

신호가 얼마 가기도 전에 그녀가 받았다. 다행히 졸린 목소리는 아니었다.

"아, 안녕하세요. 접니다. 최한석."

"이 시간에 무슨 일이시죠?"

유진이가 내 귀에 대고 있는 수화기 쪽으로 얼굴을 바싹 들이댄다. 자기도 수화기에서 나오는 소리를 들을 요량인 모양이다. 한 뼘도 되지 않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얼굴을 가까이하고 있자니 녀석의 풋풋한 몸내음이 그대로 전해진다. 딴생각이 들지 않도록 목소리를 가다듬고 말한다.

"밤늦게 죄송합니다만 좀 급한 일이라서요. 다른 게 아니라 지난번에 하영 씨 친구가 그 말세교 사건을 수사한다고 하지 않았었나요?"

"그랬죠."

"제가요, 그 사건에 관련된 자료를 몇 가지 가지고 있는데 그분에게 전달할 수 있을까 해서요."

아닌 밤중에 홍두깨라고, 하영이 조금 놀란 눈치다.

"자료? 어떤 거죠?"

"무슨 장부 같은 건데요... 좀 중요한 건가 봐요."

"한석 씨가 무슨 수로 그런 걸 손에 넣으셨죠?"

이런 질문이 나올 줄 알았다. 유진 쪽을 보자 두 손을 들어 X자를 만들어 보인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저도 우연한 기회에 얻은 건데, 저한테 이걸 넘겨준 사람이 출처를 밝힐 수 없다고 했어요. 하지만 중요도는 보장한다네요. 말세교의 최대 비밀 중 하나라고."

하영은 잠시 말이 없었다. 늘 나에게 비아냥거리는 말투로 대하던 그녀였기에 이런 내 말을 흘려 들으면 어쩌나 고민했지만 그건 기우에 불과했다.

"알았어요. 제가 그 년에게 연락을 해보도록 하죠. 안 그래도 수사가 마음먹은 대로 진행되지 않는지 여러 가지로 요새 많이 힘들어하는 거 같기도 하니까요. 지푸라기라도 잡을테니, 한 번 전해보죠."

그녀는 친구에게 연락을 해보고 답을 알려 주겠노라며 이쪽 전화번호를 물어보았다. 그걸 알려주자 그녀는 곧 전화하겠다며 전화를 끊었다. 내가 통화를 마치고 전화기를 내려놓자 유진이가 째려보고 있는 게 느껴졌다.

"왜 또 그렇게 쳐다보는 건데?"

"아저씨는 정말이지...."

유진이가 주저하며 뭔가 더 말하려고 했는데 전화가 울렸다. 정말 초스피드 반응이다. 내가 받았다.

"여보세요?"

"하영입니다. 연락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쪽에서 직접 전달받고 싶어한다는 것과 내일 어디서 볼지를 알려주었다. 처음 들어보는 커피숍이었지만 위치를 자세히 전해 듣고 나니 못 찾아갈 것도 없지 싶었다. 하영은 자신도 시간이 되면 나가겠지만 장담은 못 한다고 하였다. 그 검사라는 사람이 어떻게 생겼는지 모르는 내가 어떻게 만나냐고 했더니,

"그쪽이 얼마나 얼빵하게 생겼나 제가 전해두도록 하지요."

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마지막 말은 좀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그때 여태까지 계속 내 전화 내용을 같이 듣고 있던 유진이가 말했다.

"나도 가겠어요."

"에? 니가 왜?"

유진은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말했다.

"지금 통화내용 듣자 하니 변호사라는 사람도 여자고 지금 나온다는 검사라는 사람도 여자라면서요? 대체 아저씨는 어디서 뭘 하고 다니길래 여자만 꼬이는 거예요?"

그러면서 유진이 어디 한 군데를 빤히 쳐다본다. 그 시선을 따라가 보니 거기에는 테이블 위에 올려진 내 왼손이 있었다. 아직 물리지 않은 손 말이다. 황급히 손을 뒤로 감추고 이렇게 말했다.

"너, 나랑 약속했잖아. 내일부터 학교에 나가기로 말이야. 지금 이렇게 통화되었으니 확실히 전달할 수 있겠지."

유진의 얼굴에서 불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지만 결국은 내 말대로 하기로 했다. 이 녀석의 성격상 자신이 한번 말한 건 틀림없이 지키는 편이라는 걸 이제 나도 알 것 같다. 유진은 자신이 정리한 스크랩북을 내게 넘겨주며 똑바로 잘 전달해야 한다고 잔소리를 아끼지 않았다. 알았다고 대답을 하며 시계를 보니 벌써 열두 시가 넘어가고 있었다. 너무 늦은 시각까지 있는 게 아닐까 싶어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유진은 현관으로 향하는 내 뒤를 따라오며 중얼거렸다.

"자고 가도 되는데...."

전 같으면 당황하고도 남았겠지만 이제는 웃으면서 대응할 수 있을 것 같다. 신발을 신은 다음 따라 나온 유진의 머리를 한번 쓰다듬었다.

"그때 빈소에서 겪어보니까 네 잠버릇이 하도 심해서 말이야. 같이 자다가는 내가 니 발길질에 차여서 침대에서 굴러떨어질 것 같아서 안 되겠다."

그러자 잔뜩 골이 난 녀석이 발을 동동 구르면서 외쳤다.

"누가 같이 잔다 그래요? 아저씨는 저기 소파에서 자고 난 내 방에서 잘 거라구요. 무슨 생각하는 거야, 대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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