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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07화 (107/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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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네, 그러십니까. 그치만 저도 집에 가면 제 침대가 있으니 거기서 자도록 하겠습니다."

"쳇."

팔짱을 턱 끼며 딴 곳을 보는 녀석의 표정이 어쩐지 귀여웠다. 볼따구를 한번 잡아 토닥여 주고는 가방을 둘러메었다. 그러다 문득 궁금한 게 생각나서 물어보았다.

"근데 말이야. 그 중학생 과외가 선영이라는 건 대체 어떻게 안 거야? 언제부터 알았어?"

아직 기분이 덜 풀린 유진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내뱉듯이 대답했다.

"아저씨가 중학생 시험지 들고 있을 때요. 그때부터 어느 정도 눈치채기 시작했어요."

"뭐? 거기에는 이름도 적혀 있지 않았는데?"

"제가 한 번 훑어봤잖아요. 선영이 언니는 글자 쓸 때 좀 특이한 버릇이 몇 개 있어요. 그런 게 서너 개 반복해서 보이길래 이상하다고 생각했죠. 혹시나 해서 그 날 저녁에 가게에 가서 언니가 쓴 걸 몇 개 찾아봤어요. 그리고 확신했죠."

나는 기가 막혔다. 그때 유진이가 시험지를 오래 본 것도 아니었고 말 그대로 한번 훑어 봤을 뿐이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글씨체가 어떻고 하는 그런 게 한 눈에 확인이 된단 말인가. 내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을 보이자 유진은 이렇게 중얼거렸다.

"뭘 말해야 내 말을 믿으려나.... 음, 아까 그게 공이, 칠오팔에, 팔일팔육이요."

"뭔 소리야?"

"아까 아저씨가 사온 커피숍 전화번호요. 종이가방 바깥쪽에 작게 써 있었잖아요. 게다가 그 커피숍, 전에 제가 종업원이 가슴 크다고 말했던 데 맞죠? 엄마도 그렇지만 저도 기억력이 쓸데없이 좋아요."

나는 입을 딱 벌리고 말았다. 아까 종이가방을 유진이가 받아들고 거실로 돌아온 이후에는 커피만 꺼내어 가방은 그냥 내 옆에 내려놨었다. 녀석이 유심히 들여다보거나 하지 않았단 말이다. 한 번 훑어본 것만 가지고 번호라든가 상호를 그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허어.... 물론 유진이가 머리가 좋고 공부도 잘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기억력을 가지고 있을 줄은 전혀 몰랐다. 유진은 쓸쓸한 말투로 말했다.

"제 기억력은....  좀 특이해요. 어지간한 건 전부 기억한다구요. 예를 들어,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어렸을 때가 기억이 안 난다면서요? 그렇지만 저는 두 살 때의 일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어요. 그래서 더 괴롭죠."

괴롭다니? 이건 또 무슨 소리지? 사람이나 목소리 기억 못 하기로 유명한 나로서는 꽤 부러운 능력인데...? 나도 모르게 얼빠진 목소리로 되묻게 된다.

"기억력이 좋으면... 좋은 거 아냐?"

그러자 유진이가 날 빤히 올려다본다.

"세상일 중에는 때로는 잊는 게 더 나을 때도 있어요."

짧은 순간이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유진의 얼굴은 퍽 쓸쓸해 보였다. 나까지 가슴이 아파지는... 그런 표정이었다. 이 쪼끄만 녀석이 세상일 어쩌고 운운하는데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다.

그러나 미스터리는 여전히 남는다. 유진이가 기억력이 좋은 거야 원래 공부도 잘하고 싹싹한 녀석이다 보니 그런가 보다 하겠는데... 유미도 기억력이 좋다고? 말도 안 돼. 이거야말로 못 믿겠다. ROSE에 다니고 노트북을 받아서 내가 만든 게 하나 있었다. 전표정리를 편하게 하려고 엑셀로 각종 시트를 만들고 여러 매크로를 넣어서 자동으로 계산되게 만든 페이지 말이다. 만들기는 힘들었고 내용이야 복잡하지만 쓰는 것 자체는 간편하기 이를 데 없다. 유미에게 몇 번이나 설명했다. 한쪽에 색칠되어있는 칸에 수치만 입력하면 된다고 그렇게나 반복하여 말하였지만 그녀는 몹시 어려워하며 한번 했던 설명도 까먹기 일쑤였다. 매번 내게 달라붙어 가르쳐 달라고 조르고 있단 말이다.

"네 어머니는 대체 어딜 봐서 기억력이 좋다는지 모르겠다만... 내가 한 번 가르쳐 준 것도 맨날 다시 알려 달라고 매달린단 말이야."

"어떻게 매달리는데요?"

"어, 그야 당연히 내가 컴퓨터 할 때마다 뒤에서 몸을 밀착해서..."

그러자 유진이 인상을 팍 썼다가 이내 피식 웃었다. 어라? 웃어?

"역시 아저씨는.... 에휴."

사람을 부르면서 한숨을 내쉬는 그런 나쁜 버릇은 없으면 좋겠다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다만 너는 내 소망을 들어주지 않겠지.

"그거야 당연히 핑계고 아저씨한테 한 번이라도 더 달라붙으려고 그러는 거죠. 아직도 우리 엄마를 몰라요?"

"그...그러냐."

"등에 뭐가 닿던가요?"

"뭐가 닿다니...? 아!"

그제야 매번 내 등에 와 닿던 뭉클하고도 커다란 감동, 아, 아니, 감동이 아니라 가슴이 대체 누구의 것이었나 떠올리게 된다. 여전히 유진이는 날 빤히 쳐다보고 있었기에 애써 그 시선을 외면하며 헛기침했다. 유진이는 허리에 손을 얹고 내게 선언하듯 말했다.

"엄마랑 대체 뭐하고 다니는지 더 묻지 않을 테니 티 내지도 말아요. 알았어요?"

"어, 음. 그래."

"알았냐고요."

"네, 네. 알겠습니다."

유미가 자신의 딸을 가리켜 자신의 연적이라고 표현하던 게 생각났다. 이런 쪽으로 발달한 레이더가 미군의 최신 장비를 능가하는 유진이는 나와 선영의 사이를 짐작해냈듯이 유미와 나 사이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부처님 손바닥에 올려진 손오공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싶었다. 여기서 대화를 더 나누다가는 유진이에게 손등은 물론이고 각종 부위를 물어 뜯길 것 같은 위기감이 들어 서둘러 인사했다. 내일 서류를 전달하고 나서 다시 연락을 해주거나 여기에 오기로 했다. 그렇게 유진이네를 나섰다. 집으로 돌아와 침대 위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오랜만에 느지막이 늦잠을 자본다. 나갈 준비를 하고 챙길 것을 챙긴 다음 어제 하영과 약속한 장소로 차를 몰고 갔다. 시 외곽에 위치한 그곳은 주변이 딱히 복잡하지 않아 설명만으로도 찾기 충분했다.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고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혼자 있는 점원이 날 맞이한다.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눈에 띄는 얼굴은 없었다. 시계를 보니 아직 약속시각이 되려면 30분도 더 남은 시간이었다. 너무 일찍 도착한 모양이다.

날씨가 점점 더워지고 있어 자리를 잡고 시원한 아이스 커피를 주문한다. 노트북을 꺼냈다. 그동안 하지 못했던 리포트 정리를 하기 시작했다. 곧 나온 아이스 커피를 마시고도 목이 말라 물을 청해 더 마셨다. 그렇게 한참을 있다 보니 슬슬 약속시각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 사이에 손님이 몇몇 들고 나긴 했지만 하영은 보이지 않았다. 하영이 말한 친구라는 사람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이 여자... 내가 얼마나 얼빵하게 생겼는지 전하겠다고 했는데 제대로 전한 거 맞는 거야? 아, 아니지. 말로만 듣고 내가 얼빵하게 생겼다고 알아보는 사람이 있어도 그것 나름대로 곤란하지 싶었다.

그러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점원에게 화장실이 어디냐고 물었더니 안쪽에 한 장소를 가리켰다. 좁은 복도를 따라 한참 들어가니 화장실이 있었다. 일단 소변을 보았다. 손을 씻는 세면대가 남자 화장실과 여자화장실 가운데 놓여 있었다. 그 곳에서 물을 틀어 손을 씻고 있는데 여자화장실 쪽에서 요란한 소리가 났다.

우당탕탕-

무언가 무너지는 게 아닐까 싶은 소리에 놀란 나는 그러면 안 되는 줄 알면서도 여자 화장실 입구로 갔다. 차마 안을 들여다볼 생각은 하지 못하고 안쪽을 향해 조심스럽게 말했다.

"저기요, 안에 무슨 일 있습니까?"

종업원을 불러와야 되나 고민하고 있는데 어떤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목이 졸린 사람이 내는 것 같은, 아주 다급하고 위급하게 숨넘어가는 소리였다.

"나...날...좀....도와...."

여자 목소리치고는 굉장히 저음의 쉰 목소리 비슷하게 들려왔다. 결국 나는 참지 못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으으... 여자화장실이라니.... 첫 경험이다. 여자 화장실은 이렇게 생겼구나.... 닐 암스트롱이었나. 달에 맨 처음 발을 내딛으면서, 한 인간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인류에게는 위대한 도약이라고 말한 사람이? 나에게는 작은 발걸음이지만 남성으로서는... 위대한 변태가 될 수도 있는 도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른 침을 삼켰다.

그리 넓지 않은 실내에 두 개의 칸이 있었다. 안쪽 칸의 문 앞에 한 여자가 쓰러져 있었다. 황급히 다가가 그녀를 부축했다. 투피스로 된 세미 정장 차림의 여자였다. 그녀는 목까지 채워진 자신의 블라우스 단추를 풀려고 애쓰고 있었지만 손이 덜덜 떨리고 있어 그게 마음대로 되지 않는 것 같았다. 숨쉬기에 답답한 걸까? 일단 한 손으로 허리를 받쳐주고 다른 손으로 단추 두 개를 풀어준다. 그 이상은.... 아무래도 위험한 수준이라서 거기까지만 풀어준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나를.... 나를....."

땀을 잔뜩 흘리고 가쁜 숨을 몰아쉬고 있는 그녀의 상태는 어쩐지 심상치 않아 보였다. 눈은 쉴 새 없이 깜빡이고 있었고 아까부터 그랬지만 손도 계속 떨리고 있었다. 역시 아무래도 사람을 불러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녀를 데리고 몸을 돌려 이곳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그러나 품에 안겨 있던 여자가 갑자기 용을 쓰더니 나를 화장실 칸으로 밀어 넣는다. 그리고 자기도 따라 들어와 문을 닫아버린다.

"왜... 왜 이러세요?"

이거 미친 여자한테 제대로 걸렸구나 싶어서 다리가 후들거렸다. 문득 아주 예전에 명희라는 애한테 협박을 당했던 일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간다. 여기서 이 여자가 나한테 강간이라도 당했다고 소리 지른다면 꼼짝없이 뒤집어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이런 내 우려와는 달리 그녀는 날 변기 위에 밀어 앉히고 자신은 내 허벅지 위에 올라탄다. 눈빛이 풀린 그녀가 내 입술을 덮어온다.

"음음!"

정말 당황스럽게도 그녀는 이미 자신의 상의를 거의 풀어헤친 후다. 크림색의 브래지어에 감춰져 있던 젖가슴도 거의 다 드러났다.

"읍...읍...읍..."

키스라기보단 거의 내 혀를 뽑아 먹을 것처럼 덤벼들고 있는 그녀를 밀어내기 상당히 난감했다. 두 팔로 그녀의 몸을 밀어내 보지만 워낙 저돌적으로 달려들고 있는 그녀라서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엉덩이를 앞뒤로 흔들어가며 내 물건을 자극하고 있다.

"푸하- 저기요, 이게 대체..."

간신히 입을 떼어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바람에 그녀는 바닥으로 밀려났고 난 코너에 몰렸다. 바닥에 무릎을 대고 앉은 그녀는 촉촉이 젖은 입술과 눈으로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도와...줘...도와..주세요..."

"네에?"

"난... 지금... 남자가...필요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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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여자분의 이름 기억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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