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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옷을 제대로 다 갖춰 입은 그녀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먼저 밖으로 나갔다. 나 역시 휴지를 뜯어 이런저런 액체가 말라붙어 있는 것들을 닦아내고는 바지를 제대로 입었다. 밖으로 나가다가 여자화장실로 들어오는 누군가와 마주치면 어쩌나 꽤 두근거렸는데 다행히도 아무도 마주치지 않았다.
매장으로 돌아와 내 원래 자리로 가서 앉는다. 그런데 이런.... 옆 테이블의 맞은 편 자리, 그러니까 나와 사선 방향으로 있는 좌석에 조금 전 그녀가 앉아있었다. 그녀도 날 알아보더니 꽤 당황한 눈치였지만 굳이 내색하지는 않았다. 나 역시 이럴 때는 시선을 마주치지 않는 게 예의일 것 같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노트북만 들여다보고 있었다.
시계를 본다. 약속시각에서 25분가량이 흐른 후다. 고개를 들고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여전히 하영은 보이지 않았다. 상대방에게 내가 얼마나 얼빵하게 생겼나를 전해준다고 했던가. 쳇. 그럴 거면 나한테도 상대가 대체 어떻게 생긴 년인지 알려주어야 할 것 아닌가. 그렇다고 외모 뜯어먹을 일이 있는 소개팅 하러 나온 건 아니지만 말이다.
띠리리릭-
날카로운 전자음 소리에 나도 모르게 소리 나는 쪽을 쳐다보았다. 화장실의 그녀, 아, 이렇게 호칭하면 좀 미안하긴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저 여자의 이름을 아는 건 아니니까... 암튼 그녀가 품 안에서 전화기를 꺼내어 받고 있었다. 쳐다보고 있기가 좀 무엇하여 시선을 다시 제자리로 향했지만 저 방향을 향해 쫑긋거리는 귀까지 가라앉히는 건 무리였다. 그녀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를 향해 화를 내고 있었다.
"뭐야, 너 사람 오라가라 해놓고... 뭐? 뭐라고? 아, 진짜. 이 영심이 주제에.....그 사람? 내가 어떻게 알아, 얼굴을 모르는데.... 키가 그 정도? 으....음.... 그리고? ....음.... 알았어. 잠깐만. 끊지 말고 기다려."
의자 끄는 소리가 나더니 아까 그녀가 내가 앉은 테이블 옆에 와 섰다. 내가 고개를 들어 바라보니 그녀는 내 시선을 피하면서 묻는다.
"호...혹시, 최한석 씨?"
"그렇습니다만..."
그러자 그녀는 손에 들고 있던 전화기를 귓가에 대고 말한다.
"만났어. 그래. 끊어."
그제야 알아차렸다. 그녀가 방금 통화한 사람은 분명 하영인 모양이다. 반가운 마음에 자리에서 일어나서 손을 내밀었다.
"손하영 씨에게 온 연락이죠? 반갑습니다. 제가 최한석입니다."
그러나 그녀는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볼 뿐 마주 손을 뻗어 악수하지 않았다. 머쓱해진 내가 손을 거두어들이자 그녀는 내 맞은 편에 털썩 앉았다.
"서울중앙지검의 채송화라고 합니다. 1203호실에 있죠."
"아, 예."
그녀가 내 시선을 피하는 것도 이해가 갔다. 조금 전 화장실에서 그런 식의 관계를 갖고 잊어달라고 했는데... 그래놓고 다시 마주하기란 보통 고역이 아니었다. 차라리 서로 모른 척하고 지나갈 수 있다면 모르겠지만 그녀와 나 사이에는 앞으로 해야 할 이야기까지 있으니 말이다. 점원이 와서 주문을 받길래 아이스 커피 한 잔을 더 시켰다. 송화에게 뭘 시킬 거냐고 물었더니 그녀도 커피를 시켰다. 점원이 돌아가고 다시 커피를 가져올 때까지도 그녀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나와 시선도 맞추지 않았다. 얼음이 짤랑거리는 잔이 놓이고 나서 한참 만에야 그녀가 먼저 말문을 열었다.
".......오해는 하지 말아요."
"네?"
"결코 아무 때나, 그리고 아무 남자나 붙잡고 그런... 건 아니니까."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아까의 행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걸까? 그녀는 두 손으로 잔을 꼭 쥐고 천천히 이야기했다.
"난 여태까지 혼자서 잘 이겨냈어요. 괜히 당신이 나타나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그만...."
그녀의 말은 이해하기 힘들었다.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한숨을 푹푹 쉬던 그녀는 이내 자세를 바로 했다. 마음을 다잡았는지 날 똑바로 보며 또박또박 이야기했다. 굉장히 허스키한 목소리여서 처음에는 나한테 싸우자는 건 줄 알았지만 이야기를 듣다 보니 원래 그렇다는 걸 알았다. 그녀는 하영과 자신이 사법연수원 동기라는 것과 자신이 말세교 수사를 진두지휘하고 있다는 점을 이야기했다.
"그래서, 한석 씨가 저한테 줄 자료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요. 여기 있습니다."
가방에서 유진이의 파일을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그녀를 향해 밀어놓는다. 그녀가 그것을 펼쳐보더니 휙휙 넘긴다. 그녀는 자신의 짙은 눈썹을 살짝 찡그렸다.
".....음...이건 말세교에 관한 그냥 전반적인 사항 아닙니까. 이 정도는 저희도 충분히 확보....어?"
페이지를 넘기던 손이 어느 순간에 딱 멈추고 만다. 그거다. 유진이가 결코 말할 수 없는 출처에서 구했다는 예의 그 장부 카피본 같은 거 말이다. 그녀는 황급히 안주머니에서 수첩과 펜을 꺼내더니 무언가 메모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날 쳐다보았다. 눈빛이 아주 매섭다.
"대체... 이런 걸 어디서 구했죠?"
"네? 저도 잘 모르는데요....?"
유진이는 자신도 설명할 수 없는 곳에서 이 자료를 구했다고 했다. 유미의 도움을 받아.... 그러니 내가 설명할 수 있을 리 만무하다. 그녀는 날 타이르듯이 말했다.
"중요하긴 정말 중요한 정보입니다만... 어디 한번 말씀해 보세요. 대체 이걸 누구한테서 구한 겁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정보원은 철저히 보호해드립니다."
나는 두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아뇨, 제가 숨기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 몰라서 그래요. 애초에 이걸 구해서 저한테 준 사람도 모르는 모양이더라구요."
송화는 그 종이를 한참이 뚫어져라 보고 열심히 옮겨 적었다. 힐끗 보니 거의 다 베끼는 것 같았다.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필요하면.. 가져가셔도 됩니다. 아니면 복사를 해드릴까요?"
그러자 그녀가 고개를 저었다.
"독수독과론. 증거법 상의 대원칙이에요. 수사와 재판에서 불법적으로 수집된 증거는 법정에서 그 효력을 발휘할 수 없어요. 내용은 무척 요긴하지만 그렇다고 출처가 분명하지 않은 이것 자체가 증거가 되는 일은 없을 거예요."
"독수...독과...요?"
"정보원을 밝힐 수 없다고 하셨죠? 그런 게 있습니다."
거참. 예전에 하영도 그렇고 지금 이 여자도 그렇고... 법 쪽에 있는 사람들은 다 그런가 싶다. 말을 해도 사람이 알아듣게 이야기를 해야지. 전혀 무슨 말인지 모르겠지만 대충 짐작은 갔다. 조금 실망스러운 마음이 들었다.
"그럼, 이건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는 거네요?"
괜한 짓을 한 건가 싶었다. 유진이가 학교까지 빠져가며 구해온 자료이거늘... 유진이의 실망 섞인 표정이 떠올라 살짝 우울해졌다. 그러나 송화는 살짝 부인했다.
"아뇨. 제 머릿속에서 참고는 되고 있어요. 이걸 기반으로 도망친 원 목사의 행적을 뒤쫓는 데 아주 큰 쓸모가 있을 것 같습니다."
다 베꼈는지 수첩과 펜을 갈무리한다. 파일을 더 살펴보던 송화는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내게 허리를 굽혀 인사했다.
"수사에 협조를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분명 그 아이도 편하게 눈을 감을 수 있을 겁니다."
그녀의 반듯한 태도에 나도 모르게 울컥해졌다. 아마도 하영을 통해서, 혹은 자신이 지휘하는 사건이고 보니 소란이의 불행에 대해 들어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내가 그 아이와 어떤 관계인지도.... 뜨거워진 눈시울을 비비고 나 역시 자리에서 일어나 공손히 인사했다.
"꼭... 꼭 그 나쁜 놈들이 처단되게 해주세요. 부탁드립니다."
"최선을 다하죠."
볼일이 끝났기에 밖으로 나왔다. 송화도 함께 나왔다. 전철을 타고 왔다기에 내 차를 함께 타지 않겠냐고 권했다. 잠시 망설이던 그녀는 나에게 중앙지검까지 태워다 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딱히 급한 일도 없었기에 가능하다고 했다. 차에 올라타 출발했다. 서서히 속도를 올려 도로에 진입하면서 그녀에게 말했다.
"그리고, 전에도 감사했습니다."
"무슨 말씀이죠?"
"혹시 기억 못 하실지도 모르겠는데요. 지난주에... 그 말세교 사람들이 종로서 앞에서 집회하던 날 있잖습니까. 그때 종로서 후문에서 관계자 아니라고 들어가질 못해 안달하고 있었는데, 검사님이 오셔서 덕분에 안에 들어갈 수 있었어요."
물론 결과적으로는 그 안에서 아무것도 못하긴 했지만... 그래도 도움을 받은 건 받은 거였다. 송화도 그제야 기억이 난 모양이었다.
"아, 그때 선생님? 그렇다면 그 학생의 담당이거나 그런 건가요?"
"아뇨. 그때는 교생이었구요. 어제부로 끝났습니다."
"그렇다면 지금은 대학생?"
"네."
"무슨 대학이죠?"
"K대요. 저기 광진구에 있는...."
"전공은요? 지금 4학년인가요?"
.......어째 점점 이상한 느낌이 난다. 마침 신호에 걸려 차가 멈추었기에 송화 쪽을 돌아본다. 내 시선을 느낀 그녀가 헛기침하며 말했다.
"왜 그러시죠?"
"아뇨. 어쩐지 취조하시는 것 같아서.... 역시 직업은 못 속이는구나 싶어서요."
그러자 그녀는 다소 겸연쩍어하며 말했다.
"미안해요. 그렇게 다그치려고 했던 건 아닌데 어쩐지 말투가 항상 이 모양이군요. 하아."
"말씀 못 드릴 것도 아닌데요, 뭘. 제어공학과고 4학년 맞습니다. 졸업반인데 아직 군대도 안 갔어요."
송화는 고개를 주억거리며 짧게 중얼거렸다. "어리네." 못 들은 척하고 중앙지검 앞에서 그녀를 내려주었다. 문을 열고 내리는 그녀를 향해 안녕히 가시라고 말하는데 그녀가 바로 문을 닫지 않고 서성거렸다.
"왜 그러시죠?"
"....좀 줘봐요."
"네?"
"연락처 좀 달라구요. 수사에 필요할지도 모르니까... 그래서 요구하는 거예요."
연락처 주는 거야 그리 어렵지 않은데... 왜 그걸 물으면서 얼굴이 빨개지는 건지는 모르겠다. 그녀가 내민 수첩에 내 자취방 전화번호를 적어주었다. 수첩을 건네주며 그녀와 손가락이 살짝 닿았다. 조수석 창문을 통해 눈인사를 전한다.
"그럼 이만."
문이 닫히고,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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