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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차를 공대 주차장에 세웠다. 어차피 술 마실 건데 차 가져가기도 뭐하고 여기서 ROSE가 그리 먼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차에서 내려 휴대전화를 켰다. ROSE일을 본격적으로 맡으면서 나에게 전화하고자 하는 사람이 많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송화 때문에 장만한 거였다. 그 "발정"이라는 게 언제 발생할지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녀에게 전화가 오고, 나도 그리 바쁜 일이 없다면 그대로 만나러 간다. 그리고 오늘처럼 몸을 푼다.
그녀와 나의 관계는 그렇게 몹시 드라이했다. 나는 딱히 불만이 없지만... 그녀는 어떨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그녀와 몸을 섞는 일은 많았지만 대화를 나누는 일은 드물었다. 대화를 해도 주로 수사 진척 상황에 대해 이야기 나눌 뿐, 그녀가 어떤 환경에서 자란 여자인지 가족은 몇인지 이야기해 본 적이 없다. 그러고 보니 모텔 말고는 어디 다른 곳에 간 적도 없다. 굳이 꼽자면 처음 만났을 때 커피숍에서 만난 적 정도...?
띠리리리리-
전화를 켜고 얼마 되지 않아 벨이 울렸다. 태근이 형인가 싶어 받아보았는데 아니었다.
"여태 뭐 했어요?"
전화를 받자마자 들려오는, 여보세요 따위는 가볍게 생략하고 다짜고짜 따지는 말투에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공부했지. 도서관에서 핸드폰을 켜놓을 수는 없잖아."
"잠깐잠깐 쉬는 동안 켤 수도 있잖아요."
"커피 마실 때는 켰는데? 니가 그때 전화 안 했나 보지."
"그런가...?"
보지 않아도 고개를 갸웃거리는 유진의 얼굴이 눈에 선하게 그려진다. 내가 휴대전화를 샀다는 걸 알자마자 번호를 알려 달라고 졸라대던 녀석이었다. 내가 넌 나를 너무 귀찮게 할 것 같아서 안 가르쳐 준다고 했더니 심통이 나서 하루 동안 삐져 있었다. 그러나 나도 이젠 이 녀석을 다루는 방법을 조금씩 알아가던 참이라 삐진 걸 알면서도 그대로 놔두었다. 결국 하루 만에 백기를 든 이 녀석이 너무 자주 걸지는 않을 테니 알려 달라고 말하게 되었다. 나는 짐짓 겁박 비슷하게 말하며, 업무용으로 산 거니까 너무 자주 걸면 안 된다고 생색을 내며 알려주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알려준 번호인데.... 그래도 역시 자주 건다.
"왜 전화 한 건데? 무슨 일 있어?"
"무슨 일은 아니구요... 전에 말했던 여행사 카탈로그 받아왔어요. 같이 보고 결정하게 한 번 오세요. 이제 시험 끝났죠, 아저씨?"
"아아, 그거 말이야?"
근래는 내가 시험기간이라 과외를 가지 않았다. 이제 시험이 끝났으니 다시 과외를 하러 가기도 해야 하고 곧 있을 유진이 녀석의 기말고사도 함께 준비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그 전에 정해야 할 중요한 일도 있었다. 내가 시험에 바빠 조금 잊고 있었다.
"그냥 네가 보고 결정하면 안 되려나? 난 봐도 모를 것 같은데?"
"내 맘대로 정하면 나중에 뭐라 그럴 거잖아요."
"안 뭐라 할게."
"긴말 하지 말고 일단 오세요."
"나 바쁜데...."
그러자 녀석의 목소리가 한 톤 올라간다.
"시험도 끝났다면서 뭐가 바빠요! 혹시 또 여자 만나요?"
"아마도.... 그럴까?"
"이씨, 진짜."
요즘 이 녀석과의 대화패턴은 늘 이런 식이다. 유진을 살짝 골려 먹을 줄 알게 된 나와 자신이 골려지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이 녀석의 투덜거림. 녀석의 행동과 말투에 늘 일방적으로 휘둘리고 당하던 나의 비약적 발전이 가져온 쾌거다.
"이봐. 니 말대로 유미 씨와는 안 그러고 있거든? 그런 나한테 다른 여자까지 만나지 말라고? 가장 성욕이 왕성한 이십 대 초반의 남자에게 그건 너무한데?"
고등학생에게 대놓고 할 소리는 아닌 거 같다만... 어디 이 녀석이 보통인 녀석이어야 말이지. 내 예상대로 녀석은 한층 더 씩씩거리며 말한다.
"진짜 그렇게 나온다 이거죠? 흥. 정말 두고 봐요."
"아이고, 무서워라. 무서워서 너 보러 못 가겠다. 다음에 두고 보도록 해."
"우이씨. 일단 카탈로그는 보러 오라니까요."
여기서 더 놀렸다가는 살짝 위험할지도 몰라 오늘은 이미 시간이 늦어 곤란하고 내일 오후에 보러 가기로 약속했다.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고 있자니 저쪽에서 태근이 형이 오고 있었다. 형은 손을 들어 내게 인사하며 말했다.
"뭔 전화를 그렇게 히죽히죽 웃으면서 해? 애인이랑 통화라도 하고 있던 거야?"
"애인은 뭘요. 유진이랑 통화하고 있었는데요?"
"아, 그때 그 애 말이지? 귀엽고 당돌한 애."
태근이 형에게는 유진이에 대한 인상이 그 날 빈소에서 있었던 일로 딱 정해진 모양이다. 나중에 내가 걔를 과외하고 있다고 이야기했더니 형은 "안 봐도 고생이겠네."라는 말로 대답을 대신했었다. 내 옆에 나란히 선 우리는 후문 쪽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형은 유진이 이야기를 계속 걸고 넘어졌다.
"어쩐지 수상한데? 저쪽에서부터 니 얼굴 보고 있었는데... 분위기만 보면 여친이랑 통화하는 줄 알았단 말이지. 정말 단순한 과외 선생님과 학생 사이 맞아?"
이 인간이 이렇게 가끔씩 날카롭게 찌르고 들어올 때가 있다. 살짝 긴장했다. 뭐, 그렇다고 내가 유진이랑 무슨 짓을 한 건 아니지만.... 아주 아슬아슬한 경계에 놓여 있기는 하지.
"마...맞는데요."
"다른 거 가르쳐주고 막 그런 거 아니지?"
"다른 거라니, 무슨 말씀입니까."
"그런 이야기 많잖아. 과외 선생님과 여학생의 은밀하고 농염한 비.밀.스.러.운.행.위."
형은 자기 덩치와 전혀 어울리지 않게 요염한 말투로 되도 않는 것을 애써 묘사한다. 그 모습을 보고 너털웃음을 터트리던 나는 뭔가 이상한 기분이 느껴졌다.
"어?"
같이 걸어가다가 내가 발걸음을 딱 멈추자 조금 앞서 가던 형이 돌아보았다.
"왜 그래?"
"아, 아뇨. 분명히 전에 이런 대화를 누군가와 했던 거 같은데?"
"누구랑?"
"글쎄요. 기억은 그닥 잘...."
머릿속에 뭔가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 그러자 형이 말했다.
"혹시 그거 그런 거 아냐? 데자뷰인가 뭔가 하는 거 있잖아."
"그런가요?"
"내가 예전에 TV를 보다가 들었는데 그게 사실은 정말 있었던 일이 아닌데 뇌의 한 부위가 착각해서 그런 거라더라. 인간의 기억력이라는 게 그리 완벽한 것만은 아니라는 거야."
"그럴 려나요?"
우리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곧 후문에 도착해서 택시를 잡았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형이 말했다.
"이럴 거면 아까 헤어지고 뭐하러 또 만나. 그냥 우리랑 같이 셋이 놀다가 현아 데려다 주고 둘이서 가면 되지."
"허이구. 사이좋은 두 사람 사이에 낀 불청객이 되고 싶진 않아요. 그리고 저라고 뭐 스케쥴이 없는 줄 아세요?"
"호오. 그러셔?"
형은 날 보며 대견하다는 듯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시계를 들여다보니 다시 묻는다.
"근데 지금이면 룸에 가기는 좀 이른 시간 아냐? 언니들도 아직 출근 안 했을 거 아냐."
"상주인원이 많지는 않겠지만 아마 지나 같은 애들은 나왔을 거예요."
"지나 같은? 어째 거기 언니들을 아주 잘 모양이네? 대체 얼마나 단골이면 그렇게 되는 거야?"
"어... 그게요....."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형에게는 이야기해도 되지 싶었다. 난 그곳이 유진이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곳이라는 사실과 여러 사정에 의해 내가 그곳에서 일을 하고 있다는 것을 설명했다. 그러다 보니 룸살롱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내가 수시로 그곳을 드나들게 되었다는 걸 털어놓았다. 형은 고개를 끄덕이며 듣다가 이렇게 대답했다.
"머리가 똑똑하면 그걸로라도 룸을 갈 수 있는 거구나. 몰랐네."
".......어떻게 하면 결론이 그렇게 납니까?"
정말 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화통하다 못해 엉뚱할 때가 종종 있다. 물론 내가 룸에 다니고 있다고 해서 쓸데없는 오해 같은 걸 하지 않는 점은 참으로 고맙지만... 이럴 사람인 줄 알고 털어놓은 거기도 하니까 나도 그냥 웃어넘기고 만다. 형은 손을 비비며 말했다.
"뭐, 중요한 건 니 덕에 내가 꽁술을 먹게 된다는 거고 그것도 어여쁜 언니들과 함께라고 하니 좋은걸?"
"다시 한 번 말하지만 2차 나가는 건 형이 알아서 하세요."
"하하하. 이 자식. 니 입에서 2차 소리 나오니까 진짜 안 어울린다. 게다가 벌써부터 언니들 관리하는 거야? 알았어, 알았어. 현아 때문이라도 내가 그러지 않을 테니 걱정 마라."
얼마 전에 이 사람이 안마 어쩌고 했던 것도 생각나고 그 이상한 비밀주점도 머릿속에 스쳐 지나갔지만 애써 내색하지는 않았다. 대신 더 궁금한 다른 것을 물어본다.
"그러고 보니 현아랑은 어디까지 갔어요?"
"뭐? 너도 그런 게 궁금하냐? 으하하하하. 뭐, 알아서 잘하고 있다."
내 등을 팡팡 내려치는 형을 보며 괜한 것을 물어보았다고 생각했다. 무척 아팠다. 그러나 어지간한 건 나한테 다 이야기하는 형이 애써 얼버무리는 걸 봐서 나름대로 할 건 다 하고 있는 모양이지 싶었다. 이 사람이랑 현아랑....? 으으. 상상이 안 가. 그러는 동안 금방 도착했다. 학교에서 가게까지 그리 먼 곳이 아니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았다. 차에서 내린 형이 간판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호오. ROSE라, 그러면 장미...라는 뜻이네?"
"그렇군요! 제가 몰랐네요."
누가 그걸 모르나. 이 사람아. 그런 식으로 핀잔을 주려고 쳐다보는데 형의 표정이 조금 달라져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살짝 쓸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예전에 장미를 좋아하던 어떤 분이 생각나서 말이야."
"옛애인?"
"애인은 무슨..."
형은 너털웃음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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