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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18화 (118/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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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절벽에 매달린 사람이 밧줄을 붙잡고 있다가 놓치는 것처럼... 그렇게 힘을 잃은 손은 스르륵 내려와 그의 허벅지 위에 놓인다. 유미는 가볍게 웃으며 자리에서 벗어났다. 내게 별다른 이야기를 남기지 않고 그녀는 그대로 나갔다. 룸에는 형과 나만 남았다. 형은 기운이 쭉 빠진 표정이었고 눈빛은 공허해졌다. 맥주병 하나를 가져다가 내 앞에 있는 잔을 스스로 채워 마신다. 내가 두 번째 잔을 마실 때쯤, 형이 날 쳐다보았다.

"아까 아가씨들이 말하길...."

형의 눈빛이 몹시 흔들렸다. 목소리는 낮았다. 조금 전까지 주인이 있어 꼬리를 치고 재롱을 부리려던 강아지가 이제 낯선 손님을 상대로 이빨을 드러내고 있다.

"너랑... 미자 누나랑 모종의 관계가 있다던데... 그게 사실이야?"

맥주를 마시고 있는데도 목이 텁텁하다. 갈증이 자꾸 난다. 단 한 번이지만, 그래 있었지. 그렇지만 그게 뭐? 그녀는 그것에 대해 전혀 신경조차 쓰지 않을 거라고. 그녀는 날 가지고 놀고 있어. 이런 기나긴 설명 대신 짧게 대답한다.

"모종의 관계가 뭔데요?"

".... 내 입으로 굳이 말해야겠냐?"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형이 몸을 일으킨다. 안 그래도 커다란 사람이 눈을 부라리며 일어나니 방 안의 공기가 변한다. 그가 내게 다가왔다. 나는 앉아있고, 형은 일어나 있으니 고저 차가 평소보다 훨씬 심해져 고개를 들어 쳐다보기도 벅차다. 뒷목이 뻣뻣하다. 형의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이어진다.

"말해봐. 대체 네가 미자 누나랑 무슨 사이길래 누나가 널 그렇게 신임하고 너한테 가게까지 맡기는 거냐고. 말해봐, 인마!"

몸이 확 쏠린다. 형과 눈높이가 비슷해지고 나서야 형이 내 멱살을 잡아 끌어올렸다는 사실을 알았다. 이글거리는 그의 눈빛이 날 뚫어 버릴 것 같다. 아까부터 느꼈던 불안감은 이런 거였나.

"이 새끼야! 너 설마 유진이한테도 손 뻗은 거야? 그런 거야?"

침이 튄다. 더럽다. 쳇.

"난 아직 아무 말도 안 했어요. 형. 혼자 무슨 단정을 하고 그렇게 흥분하는 거죠?"

"묻는 말에나 대답해!"

"소리 지르지 말아요. 이 거리면 조용조용하게 말해도 다 들려요."

"이 새끼가 진짜!"

퍽-

기어코 형의 펀치가 내 뺨에 작렬한다. 소파 위로 내가 나동그라졌고 때마침 들어온 지나와 다른 아가씨 한 명이 우리에게 달려들어 사이를 갈라놓는다. 지나가 악을 썼다.

"왜 그래요! 아까까지 잘 놀다가!"

"비켜!"

형이 내 쪽으로 다가오기 위해 씩씩거리고 있었지만 지나가 달라붙어 완강하게 뜯어말린다. 날 부축한 사람은 희정이였다. 입안쪽이 터진 모양이다. 휴지를 달라고 하여 거기에 침을 뱉었다. 피가 섞여 나온다. 형의 외침이 방안에 쩌렁쩌렁하게 울린다. 다행이라면 이 가게의 특성상 방마다 방음을 아주 잘해놓았으니 다른 방까지 이게 들릴 일은 별로 없을 거다. 영업에 방해는 되지 말아야 할 텐데...

"너 이 새끼! 일로 안 와? 내가 널!!"

"형!"

배에 힘을 끌어모아 형이 지르는 소리보다 더 크게 외친다. 형의 동작이 우뚝 멈춘다. 나는 희정이와 지나에게 일러 나가도록 했다. 아무도 이 방에 들이지 말라고 했다. 지나가 두 사람을 두고 나가야 되는 걸 몹시 주저하기에 사장으로서의 명령이라고 일러두었다. 젠장. 사장으로서의 첫 명령이 이딴 거라니, 정말 볼품 없군 그래. 지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도 일단 형을 자리에 앉게 하고 희정을 데리고 나갔다. 난 형 옆으로 가서 술잔을 내밀었다.

"진정해봐요. 형. 형이 생각하는 그런 일은 이제 없으니까요."

여전히 씩씩거리는 형이 내가 내민 잔을 노려보다 결국은 받아들였다. 거기에 맥주를 채워주었다.

"나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뭔데, 이 새끼야."

"자꾸 새끼새끼 하지 마요. 안 그러면 사장으로서 이 가게에서 추방할 거예요."

욱씬거리는 뺨이 아프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참을만했다. 내 잔에도 술을 채웠다.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유미가 형의 계모였다는 이야기잖아요. 맞아요?"

".....그렇지."

"정말 계모... 뿐이었어요?"

"뭐, 인마!"

형은 벼락같이 소리를 지르며 날 째려 보았지만 이번에는 나도 꿀리지 않는 눈빛으로 쏘아본다.

"나 말이죠. 얼마 전까지는 진짜 둔감하다는 소리 많이 듣고, 형 동생인 효진이한테는 얼빵이라는 소리까지 듣고 그랬지만요... 요새는 사람들을 많이 만나고 겪는 일이 많다 보니 뭔가 조금씩 알 것 같단 말이죠."

".......뭘 말하고 싶은 거야?"

"조금 전 형이 유미를 바라보던 눈빛 말입니다. 그게... 어딜 봐서 오랜만에 만나는 계모를 보는 눈빛이었다고 생각하세요?"

"그...그야."

그는 눈에 띄게 당황했다. 하아. 다른 사람들이 내 표정을 읽는다는 게 이런 느낌이었군. 여태 잘 몰랐지만 이제 확실히 알겠다.

"물론 형은 자기 눈빛이 보이진 않겠지만요. 그렇지만 말해봐요. 대체... 유미랑 형이랑 무슨 사이입니까?"

"하아... 그건 말이야."

형은 들고 있는 잔으로 테이블을 툭- 툭- 건드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그의 대답은 정말 오래 시간을 끌다 겨우 나왔다.

"인마.... 너 어디 가서 이런 거 이야기하면 절대로 안 돼. 알았지? 특히 현아한테는 절대로 이야기하면 안 돼."

"엄창 찍죠."

"풋-"

형은 그제야 기분이 좀 가라앉은 모양이었다. 내 쪽을 돌아보며 씨익 웃었다. 그는 내 뺨을 어루만지며 말했다.

"순간 욱해서...미안했다. 기분 풀리게 너도 나 한대 칠래?"

형의 사과방식은 정말이지 함무라비 법전 방식이 따로 없다. 순간 솔깃하긴 했지만 이내 고사했다.

"내가 때려봤자 형이 아프기나 하겠어요? 그냥 나중에 형이 좋은 데서 따로 술 한잔 사는 걸로 대신해요."

"아아. 알았어. 일단 미안하고... 그래, 니가 제대로 봤다. 굳이... 이야기하자면 미자 누나는 내 첫사랑이었어."

그럼, 그렇지. 그런 거였군. 내가 고개를 끄덕이고 있는 동안 형의 말이 이어졌다.

"원래 우리 집 옆에 살고 있었거든. 그러다가 두 번째 엄마 돌아가시고.... 그러니까 효진이 엄마가 안 계시고 나서부터 우리 두 남매를 많이 돌봐주셨어. 지금 생각해보면 좀 이상하기도 해. 학교도 안 다니는 열일곱 살 짜리 여자애가 남의 집 애를 봐준다는 게.... 그렇지만 우리 아버지는 먹고 사는 문제로 바빠서 우리한테 전혀 신경을 못 쓰는 바람에 효진이나 나나 거의 방치 상태였거든. 먹는 것도 제대로 못 챙겨 먹고 그랬던 우리를 유일하게 신경 써준 사람이 미자 누나였어."

애잔한 목소리로 자신의 어린 시절을 이야기하는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형네 집은 엄청 잘 살고 부자 아니었던가? 아버지가 일하느라 정신없고 아이들이 방치되었다는 이야기는 조금 아귀가 맞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러다가 1년 정도 지났을까? 어느 날 우리 아버지가 누나를 데리고 오더니 이제부터 우리 집에서 같이 산다고 하는 거야. 처음에는 엄청 좋아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게 우리 아버지랑 미자 누나가 결혼한 거였어. 식도 올리지 않고 일단 살고 시작하는 거지만 말이야... 뭐, 그 당시에는 그런 사람들이 많았으니 그게 이상할 것도 없었지. 문제는 누나가 너무 어리다는 거고.... 우리 아버지는 뭐, 그때가 삼십 대 중반이었으니 거의 띠동갑 그 이상이었지."

상상이 가질 않았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의 옆에 서 있는 유미를 상상해본다. 그녀가 결혼? 그녀가 누군가 일정한 상대의 침대에서 함께 잠이 들고 아침에 일어나 식사를 차리고... 출근을 돕고... 그런 일을 했단 말인가? 게다가 그냥 총각도 아니고 다 큰 애가 둘이나 딸린 홀아비를 말이다. 무엇보다도 그녀가 아이들을 돌봤다는 부분에서 이 이야기는 정말 믿기 힘들었다. 자기 딸 하나도 제대로 건사 못 하는 그녀인데...

"뭐가 되었든 난 그저 좋았어. 누나랑 지내는 시간 하나하나가... 나한테는 가장 잊지 못할, 가슴 속 깊이 남아있는 좋은 추억이야. 비록 2년도 채 지나지 않아 우리 집이 좀 이상해지면서 누나가 임신한 채... 그대로 떠났지만 말이야."

"임신한 채 떠났다구요?"

문득 유미를 처음 만났을 때가 떠올랐다. 유진이의 과외비를 받으러 온 이곳 ROSE에서 그녀를 처음 보았다. 그때 그녀는 나한테 그랬다.

- 아무튼 잘 부탁드려요. 제가 워낙 배운 게 없어서 그냥 웃음 팔고 술 팔고 그러고 살지만 유진이는 절대 그러지 않을 애니까요. 잘 이끌어주시고 보살펴 주세요.

그때, 내가 뭐라고 대답했더라? 아, 그래. 난 유진이가 꽤 똑똑하다고 칭찬을 했고 그녀는 그렇게 말했다.

- 아빠 닮았으면 똑똑할 거예요. 암요. 유진이는 아빠가 누군지 모르지만 저는 확실히 알고 있으니까요.

그래. 그랬다. 그걸 듣고 나는 대체 어떻게 하면 딸이 자기 아빠가 누군지 모를 수 있느냐고 생각했지만 형의 이야기를 듣고 있자니 앞뒤가 맞는다. 그녀는 짧은 결혼 생활에서 유미를 얻었고 그 아이가 채 태어나기도 전에 결혼 생활을 끝냈다. 그랬기에 유진이는 자기 아버지를 본 일도 없고 성조차 자기 어머니의 성(姓)인 "진"을 따왔다. 마치 나처럼 말이다....

"근데 집이 이상해졌다니요? 무슨 문제라도 있었나요?"

아까 들었던 것 중에서 궁금한 것을 묻자 형이 겸연쩍어하며 대답했다.

"문제...라면 문제인 게 그때부터 우리 집이 엄청 잘 살게 되었거든."

"네? 그게 뭐가... 이상해요?"

"야, 몇 년 전까지만해도 돌보는 사람 하나 없어 그지꼴을 못 면하고 있던 우리 남매란 말이야. 그나마 미자 누나가 건사해주어서 사람 꼴을 하고 있었다고. 그런데 미자 누나가 떠나기 직전... 한 몇 달 전부터인가 아버지가 하시는 사업이 갑자기 대박이 터지고 사놓은 땅값이 폭등하고 그랬어. 우리 집에 드나드는 사람도 갑자기 많아지고 그 시골 촌동네에서 서울 부촌으로 이사하고 그랬거든."

"어... 그건....."

뭔가 짐작이 갔지만 입을 다문다. 형의 이야기를 듣는다.

"나와 동생은 큰 집에 살게 되었다고 몹시 좋아했지만 그러고 얼마 되지 않아 누나가 떠나겠다고 했지. 정말 깜짝 놀랐어. 당연히 우리 둘은 울고불고 누나를 막아보려고 애썼지만 이상하리만치 우리 아버지는 정말 냉정하게 누나를 내보냈어. 지금도 이해할 수 없어. 만삭이 다 되어서 배가 불룩했던 누나를... 왜 그렇게 모질게 내쳐야 했을까. 왜 그 이후로 한 번도 만나지 못하게 한 걸까. 우리 집을 떠나던 누나의 뒷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해. 그게 내가 보았던 누나의 마지막 모습이었어. 근데.... 여기서 이렇게 만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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