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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19화 (11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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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은 자신의 추억을 떠올리며 이런저런 감정에 빠져들었지만 나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형은 유미의 비밀, 그러니까 앞날을 볼 수 있다는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모르는 모양이었다. 갑자기 잘살게 되었다는 그의 이야기에서 유미의 능력이 작용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을 해본다. 그리고 빨리 아이를 낳기 위해 서둘렀다는 이야기를 떠올려보면 그렇게 이른 나이에 결혼생활을 한 것도 납득이 갔다.

"그러면 말입니다. 아까 이야기했던 장미를 좋아한다는 사람, 그것도 유미였어요?"

"그렇지, 뭐. 아마 누나가 좋아하던 꽃 이름으로 가게 이름을 정했나 보다. 근데 왜 원래 이름을 버리고 유미...라는 이름을 한 걸까?"

"그분 속을 우리가 어찌 알겠습니까."

"그것도 그래. 그 누나는 옛날부터 대체 뭘 생각하는지 모를 때가 많았다니까. 그때만 해도 나한테..."

형은 무언가 이야기하려다가 입을 다물었다. 말을 하려면 할 것이지 왜 중간에 멈추는지 모르겠다. 내가 쳐다보자 형은 좀 당황해 하며 자신의 말을 수습한다.

"암튼... 지금 생각해보니 누나는 내 첫사랑이었어. 난 단 한 번도 누나한테 엄마라고 부른 적이 없어. 효진이는 곧잘 불렀지만... 나에겐 언제나 미자 누나일 뿐이야. 첫인상이 너무 강렬해서... 아마 난 그 이후로도 그런 이미지의 여자를 찾고 있었는지도 모르지."

유미의 이전 모습을 상상해본다. 본 적이 없으니 잘 그려지질 않는다. 그녀의 어린 모습이라고 할 수 있는 유진이의 모습을 끌어다가 거기에 유미의 성격을 얹어 본다. 앳된 얼굴, 태평한 성격... 뭐 대충 그러려나?

"그래서 그게 지금 현아다?"

"뭐... 굳이 결론을 내자면 그렇지, 뭐."

쑥스럽다는 듯이 웃으며 뒤통수를 긁적이는 형을 보고 있으니 나도 웃음이 나왔다. 서로 비어있는 잔을 채워주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유미 보러 이제 우리 가게에 자주 오시겠네요, 형?"

"아니, 그건 또 아니야."

"에? 왜요?"

조금 전까지는 그렇게 좋아 어쩔 줄 모르지 않았던가? 당연히 그러리라 생각했는데 왜 그렇지? 형은 들고 있는 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반갑기도 하고 그립기도 했지만... 사실 무섭기도 했어. 내가 누나한테 미안한 게 많아서 말이야. 다시 보게 되면... 그걸 어떻게 사과해야 하나 정말 많이 고민했거든. 그렇지만 막상 다시 보니 입이 떨어지지 않았어. 아마도 다음에도 또 그럴 테니 차마 볼 엄두가 안 나."

"뭔 죄를 그리 많이 지었는데 그래요?"

"글쎄. 이건 비밀이다. 인마."

형은 그 커다란 주먹으로 내 머리를 툭 밀었다. 아까 같은 강펀치는 아니었고 그는 좀 부끄러워하고 있는 것 같았다. 부끄러워하는 태근이 형을 지척에서 보는 일은 나에게 참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인내, 참을성... 뭐 이런 가치 말이다. 우리는 잔을 마주했다. 내가 다음에는 진짜 비싼 곳에서 형을 벗겨 먹겠다고 하자 그는 껄껄 웃으면서 자기가 전에 가본 곳 중에 아예 벗고 노는 곳이 있으니 그리로 가자고 했다. 그건 사양했다.

형이 돌아간 뒤, 나는 사무실로 향했다. 유미 혼자 소파에 앉아 있었다. 사무실로 들어가 그녀에게 다가가며 일부러 인사를 다시 한다.

"여어, 미자 씨~"

그러자 그녀는 보고 있던 장부를 내려놓고 피식 웃었다.

"갔나 보네?"

주어는 생략되어 있었지만 누굴 이야기하는지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그녀의 맞은 편에 앉으며 말했다.

"응. 인사라도 하고 가라고 했더니.. 자기는 미자 누나 말을 잘 듣는다나 어쨌다나. 다시 찾아오지도 않겠다고 하던데?"

"그래, 태근이는 원래 그랬어. 착하고 말을 잘 들었지."

저 사람이 아는 박태근과 내가 아는 박태근은 아무래도 다른 사람 같다.

"뭐 좀 물어봐도 돼?"

"안 돼."

어쩜 거절을 그렇게 환하게 웃으면서, 그것도 아주 단칼에 잘라 말할 수 있는지 의문이다. 물론 그래야 유미라고 할 수 있지. 테이블 위에는 아까 내려놓았던 사업자 등록증이 아직 있었다. 그걸 끌어다가 들여다보며 말했다.

"아까는 경황이 없어서 떠올리지 못 했는데... 이제서야 생각났어. 그때 유미가 바에서 마티니를 마시면서 한 이야기."

그녀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기에 나 혼자 말을 이어 나갔다.

"그때 유미는 자기 자신을 가리켜서 곧 죽을 사람이라고 했지. 당신이 가지고 있는 그 이상한 능력도 털어놓았고. 그때는 그게 대체 뭔 소리인가 싶었는데 말이야. 지금은 어느 정도 확신이 들어. 정말 당신이 미래를 본다는 거... 느끼고 있다는 거 말이야."

"한번 말하면 바로 못 알아듣는 타입이구나, 자기는."

"그래. 난 그런 놈이야. 그렇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에둘러 말하는 거나 비유적으로 말하는 건 정말 못 알아들어. 근데... 근데 말이야. 내가 아는 것을 취합해보고 주어진 상황을 종합해보니까 당신이 날 여기 공동명의로 올린 이유를 알 것 같아. 그건..."

"말하지 마."

그녀의 표정에서 웃음이 사라져 있었다. 오늘따라 그녀의 말이 참 짧고 단정적이다.

"듣고 싶지 않아."

"유미, 내 말은..."

"무슨 말일지 아니까, 자기가 말하지 않아도 난 이미 그 말이 뭔지 아니까 말하지 말라면, 자기가 기분이 나쁘겠지? 그리고 난 내 이야기를 남에게 하는 건 좋아하지만 남이 나에 대해서 이야기하는 건 좋아하지 않아."

그게 대체 무슨 도둑놈 심보냐. 이기주의의 극한을 여기서 본다. 모든 게 자기 편할 대로 해석되는 유진이의 성깔이 대체 어디서 나왔겠는가. 자기는 실컷 남에 대해서 다 이야기해놓고.... 꽤 오래 투덜거려보지만 그렇다고 유미가 입장을 바꿀 사람도 아니었다. 한숨을 내쉬고 그걸로 털어버렸다.

"알았어. 유미가 말한 공동명의 건은 받아들이도록 할게. 잘할지 모르겠지만... 일단 지금처럼만 하면 되는 거지?"

그러자 유미의 표정이 원래대로 돌아왔다. 그리고 고개를 살짝 젓는다. 나는 다시 불안해지기 시작했다.

"뭐야, 지금처럼 하면 안 된다고?"

"그게 아니라.. 저기 내 책상에 두 번째 서랍 좀 열어봐 줘."

자리에서 일어나 그녀의 자리로 향한다. 책상 서랍을 여니 뭔가 서류철 같은 게 몇 개 있다.

"어떤 거야?"

"전부다."

다 꺼내어 그녀 앞으로 가져간다. 그녀는 그걸 펼치더니 내 앞에 도로 내밀었다. 나로서는 생소한 모양의 서류들이다.

"이게 뭔데?"

"자기는 똑똑하니까 보면 알 텐데? 나도 뭔지는 잘 몰라서 그냥 처박아 두고만 있는 거였거든."

하나씩 집어 올려 읽어본다. 그것은 등기부등본을 비롯한 각종 땅문서, 채권, 주식 등 그녀 이름으로 된 거의 모든 자산에 관한 서류들이었다. 종류도 많았지만 그 금액도 결코 적지 않았다. 평소 이 가게의 장부를 다루고 있는 사람으로서... 매출의 규모도 규모거니와 이 가게나 유미 앞으로 잡혀 있는 대출이 하나도 없다는 걸 알고 깜짝 놀랐었는데 이제 다시 한 번 더 놀란다. 유미가 이 정도의 자산가였다니.

"이걸 다 어쩌게?"

"글쎄. 나도 받아만 두고 별로 생각은 안 하고 살았거든. 딱히 돈이 궁하지도 않았고... 어차피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살았으니까 말이야. 언젠가는 유진이에게 도움이 되리라 생각하고 일단 그냥 둔 거였어."

기가 막혔다. 땅이야 당장 금액이 어찌 될지 모르니 그렇다 치고 채권이나 주식은 그 액면가만 해도 지금 그녀가 살고 있는 아파트를 대여섯 채는 사고도 남을 금액이었다. 실제 가치는 감정을 해봐야 알겠지만.. 이 여자.. 엄청나게 부자였어! 대체 이런 가게를 왜 하고 있는 거지?!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잘 모르겠으니까 자기가 알아봐 줘. 상속이든 증여든... 어느 쪽이 유진이한테 더 유리할지. 처분이 필요하면 그렇게 하고 다른 형태로 바꾸려면 그래도 되고. 그러면서 자기 몫도 좀 챙겨도 돼. 잘할 수 있지?"

무슨 먹다 남은 케이크를 먹으라고 밀어놓는 것도 아니고... 그녀는 놓인 서류들에 대해 그다지 눈길조차 주지 않고 나에게 전부 밀어놓았다. 아주 산뜻한 표정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나려는 그녀를 불러 세웠다.

"자..잠깐! 정말... 정말 당신은 그걸 대비하고 있는 거야?"

말하지 말라고 했으니 말은 않겠다. 그러나 이런 엄청난 것들을 맡아 처리하라면서 그 이면의 것을 알고도 말하지 못한다는 건 너무 슬픈 일이었다. 내 표정이 너무 안 좋았던 걸까. 그녀는 손을 뻗어 내 뺨을 몇 번 토닥이더니 귀에 대고 이렇게 속삭였다.

"자기가 있으니까, 문제없어."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녀의 표정은 슬펐다. 정말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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