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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20화 (12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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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저씨, 아저씨! 듣고 있어요?"

"어? 어.... 듣고 있어."

건성으로 대답했더니 유진이가 금세 이맛살을 찌푸렸다. 요 녀석은 내 반응 하나하나를 캐치해내는데 아주 타고났다, 타고났어. 최한석 어워드라도 줘야 할 정도다.

"딴생각하고 있었잖아요. 내가 방금 어디 이야기했어요?"

"발리...였던가?"

"아뇨! 하와이였어요! 발리는 아까 이야기했구요. 대체 요새 왜 그래요? 계속 멍해가지고."

"그...그랬나?"

"네."

"그런가 보다. 요새 갑자기 닥친 일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이래저래...."

콜롬보 형사의 추리력을 능가하고 호랑이의 사냥본능보다 더 훌륭한 후각을 지니신 암표범님 앞에서 감히 거짓을 고하기보다는 어느 정도 살짝살짝 진실을 섞어서 말하는 게 낫다. 요새 들어 깨닫게 된 생활의 발견이다. 아니면 사냥감의 생존 욕구라고 해야 할지도...

"무슨 일인데 그래요?"

내 말을 듣고 살짝 걱정스레 물어보는 유진을 향해 애써 웃어 보인다.

"그냥 뭐 이것저것 다 그렇지. 대학 졸업반이라는 게 원래 그래. 생각이 많고 할 일도 많아지거든."

"그런가... 뭐, 알아서 힘내세요."

"그래, 인마."

테이블에 펼쳐둔 카달로그에 다시 집중하는 유진을 내려다보며 나는 또 상념에 빠진다. 사실 일반적인 대학 졸업반이 이런 걱정을 하고 살지는 않는다. 대개는 학점관리라던가 혹은 취업준비라던가... 아니면 나같이 군대를 미루고 미루다 여기까지 온 놈팡이들은 대학원을 꿈꾸든가... 셋 중 하나인데, 나는 그런 것은 차치하고 전혀 다른 것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다.

"유럽도 괜찮다고는 하는데 오가는 비행기에서 고생을 많이 한다고 하더라구요, 그러니 될 수 있으면 가까운 곳으로 가고 싶기도 하고..."

쫑알거리며 이것저것 따져보는 유진의 옆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 녀석에게 출생의 비밀에 대해 알려주어야 할까. 자기 학교에 체육 교생으로 왔던 그 곰 같은 아저씨가 오빠라고, 나와 그렇고 그런 사이였다는 걸 알게 되고 냅다 내 손등을 깨물었던 계기가 된 효진이가 사실은 자기 언니라는 걸, 그리고 제 아버지가 사실은 엄청난 갑부라는 걸 다 이야기해야 되려나. 그런 마음이 물씬물씬 피어올랐지만 애써 억누른다. 제 엄마인 유미도 이야기하지 않을 걸 내가 무슨 권리로 이야기하겠나 싶었다. 내 머릿속을 짓누르는 고민은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지난번에 ROSE에 갔을 때만 해도 그렇다.

"알아보니까 증여보다는 상속에 부여되는 공제금액이 더 커. 굳이 지금 증여하기보다는 두었다가 상속을 하는 편이 유리해. 전체 금액이 꽤 되거든. 감정을 해보니까 유미가 가지고 있는 성남의 그 땅만 해도 현재 시세가..."

"아아, 자기가 알아보고 결론 이미 내렸으면 됐어. 나한테까지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남은 기껏 힘들게 알아보고 나서 알려주려 하는데도 마다하는 유미의 태도에 잠깐 버럭 했지만 별로 소용은 없었다. 하긴... 그녀는 이런 것에 전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나를 공동명의에 올린 이후부터는 가게 일에 아예 관심을 안 두고 있었다. 가끔은 말도 없이 출근하지 않고 어디론가 사라지기도 했다. 예전에 선영이가 가게 문제 때문에 골치 꽤 썩었던 것을 상기하며 그걸 아무 고민 없이 얼떨결에 이어 받아버린 내 처지를 저주했다. 한숨을 내쉬며 그녀가 듣든 말든 내 이야기를 계속한다.

"일단 지금 만기가 지난 채권은 전부 현금화했고 그걸로 유미 앞에 종신보험을 들어두었어. 3억 원짜리고 어지간한 특약도 전부 들어두었어. 수취인은 피상속자인... 유진이야."

"음, 그건 잘했네."

이것만큼은 나도 못 참겠다. 짜증이 나서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이 여자야! 내가 지금 이야기한 건 당신이 죽어야 나오는 보험금이라고! 그런데도 그런 태도가 어디 있어?!"

갑자기 소리를 지르느라 목이 따끔거리고 괴롭다. 뒷골이 땡긴다. 그러나 나의 이런 태도도 유미에게는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한다.

"여기, 있잖아."

"끄아아아아아!"

유미를 단독으로 대하고 있노라면 정말 이 세상은 아직까지 지극히 상식적이고, 잘 돌아가고 있다는 사실이 부정적으로 느껴진다. 그 미친놈들이 말하는 말세가 와도 이상하지 않을 것 같다. 선영이가 속세에 대한 미련을 끊고 성직자의 길로 가버린 것에 유미의 이런 태도가 일말의 보탬이 되지 않았나 감히 생각한다.

"아저씨, 아저씨! 듣고 있어요?"

"어? 어.... 듣고 있어."

그녀의 딸이 내지르는 날카로운 소리에, 다시 현실로 돌아온다. 눈을 껌뻑이며 유진을 쳐다보았다. 녀석의 짜증지수가 제법 상승한 게 눈에 보인다. 한계점 근처다.

"그럼 말해봐요. 내가 방금 어디 이야기하고 있었나."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대비를 하고 있었다. 뇌의 절반은 생각에 쓰고 있고 절반 정도는 유진이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할당하고 있었기 때문에 곧바로 대답이 가능했다.

"괌도 좋다면서. 비자도 따로 필요 없으니 편리하다고."

"그랬죠. 흐음. 분명 딴생각하는 얼굴이었는데...."

뭐냐, 이 녀석. 꼬투리를 잡을 채비를 하고 있던 건가. 눈을 부라리며 답한다.

"뭐, 인마?"

"암튼요. 어때요. 후보지를 꼽아보았는데."

몇 달 전부터 유진이가 고민해온 결과가 내 눈앞에 펼쳐진다. 제주도, 발리, 괌, 태국, 몰디브, 호주, 스위스 .... 이렇게 놓고만 보니 무슨 신혼여행지 후보군 같은데? 실제로 유진이가 보던 카탈로그중에는 무슨무슨 허니문 기획이라는 타이틀이 붙어 있는 것도 있었다.

"그렇게 고민하더니 결국 압축이 안 되는 거야?"

"모르겠어요. 처음 나가보는 거라 다 좋아 보이기도 하고..."

평소에는 똑똑하기 그지없는 녀석이지만 선택에 있어서는 영 소질이 없는 모양이다. 하기야 나도 한 번도 나가본 적이 없으니 아무런 조언도 못 해주고 그냥 보고 있기만 했으니 뭐. 대신 다른 부분에 대해 걱정해 본다.

"돈이 모자라지는 않아?"

"정 모자라면 제 용돈을 보태면 돼요."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유진을 보며... 녀석의 용돈이 얼마인지를 굳이 묻지는 않았다. 내가 알기로 평소에도 유진은 꽤 넉넉한 용돈을 받고는 있지만 녀석은 그걸 딱히 쓰지 않고 죄다 모아두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의 어머니가 가진 돈도 돈이거니와 그녀의 마인드상 유진이가 달라는 대로 주고도 남을 위인이기 때문에 유진이가 돈 때문에 이 여행에서 곤란함을 겪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내 비용은 내가 낼게."

나도 요새 돈을 좀 벌고 있다. 유진이 과외비는 물론 ROSE에서 받는 월급도 솔직히 적은 편이 아니다. 내가 그럴 생각이 없어서 그렇지 당장 내가 현금화시켜서 들고 나를 수 있는 돈만 해도..... 아, 이건 패스. 암튼 근래 들어 엄마한테서 용돈을 송금받기는커녕 내가 오히려 엄마한테 돈을 보내드리고 있을 정도다. 선영에게 차를 받을 때는 유지비에 대해서 걱정을 하기도 했는데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그 정도로 나에게 여유자금은 제법 있었다.

"너만 내면 좀 그렇잖아."

내가 이렇게 덧붙이니 유진은 날 보면서 피식 웃었다.

"벌써 잊었어요? 애초에 이 돈의 베이스는 다 아저씨 돈이었는데 말이죠."

".......그것도 그렇군."

그렇구나. 그랬지. 참. 쳇. 흥. 젠장. 최종 후보지를 놓고 다시 고민을 시작하는 유진을 보며 지난번 일을 떠올렸다.

효진에게 받아온 돈을 유진에게 내밀었을 때, 유진은 내 손등을 물어버리는 걸로 대답을 대신했었다. 안 받는 거냐고 재차 물었더니 필요없단다. 그래서 나는 그 돈을 효진에게 돌려주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이 녀석이 보이질 않았다. 하영에게 찾아가 물어보았더니 웬걸. 녀석은 국내에 있지 않았다.

"어, 한석 군. 여기까진 어쩐 일로 전화야? 번호는 대체 어떻게 알았어?"

국제전화요금이 많이 나올까 염려되기는 했지만 어차피 내 전화기도 아니고 하영 사무실의 전화기 였으므로 급할 게 없었다. 난 녀석에게 하영에게 들었다면서 요새 뭐 하고 지내냐고 물어보았다.

"그냥 놀러 다니고 있어. 회사에도 가끔 얼굴 비치고."

"팔자 좋네."

"부러워?"

"솔직히 조금은."

그녀의 깔깔거리는 웃음이 전화선을 타고 내게 전해진다. 안 봐도 어떤 자세로 웃고 있을지 훤히 보인다고나 할까.

"한석 군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텐데... 학교 때문에 무리려나?"

"그래. 난 아직 졸업 전이란 말이야. 시험이나 논문도 남았고."

"만약 취업 안 되면 나한테 이야기해. 우리 아버지 회사에 꽂아줄게."

"아, 말만으로도 고맙다. 근데 나도 일본에 가서 근무해야 되는 거야?"

"여긴 지사인걸? 오고 싶으면 오게 해줄게. 원래 일본 여자들이 꽤 개방적이잖아. 한석 군이라면... 우후후후."

얘랑 이야기하고 있으면 대화의 주제가 꼭 그쪽으로 샌다.

"아저씨 웃음은 그만둬. 듣기에 괴롭다."

효진은 자기 아버지의 입김이 닿아있는 어떤 금융회사의 일본지사에 연수라는 명목으로 가 있었다. 시니컬한 하영의 설명에 따르면 더이상 선보기가 지겨워 아예 국내를 떠버린 효진의 도피행이라나 뭐라나. 나는 그녀에게 지난번 장례식장에서 받은 돈을 돌려주고 싶다고 이야기했고 하영은 직접 말하라면서 효진이 있는 일본으로 전화를 걸어주었다.

"에이, 뭘 그런 걸 가지고 국제전화씩이나 하고 있어. 난 또 한석 군이 내 목소리 듣고 싶어서 전화한 줄 알았네."

내 설명을 들은 효진은 아주 시원하게 대답했다.

"그건 그냥 너 해."

"나 하라니? 나보고 가지라고?"

"응. 원래 노름판에서 개평으로 준 거는 도로 받는 거 아냐. 부정탄다고."

"....그 금액이 개평이었습니까..."

내 한 학기 등록금에 해당하는 금액이라고 이 돈은!

"사실 좀 많지? 그러니 어디 좋은 데 써 봐. 아, 될 수 있으면 그 귀여운 애랑 같이 쓰고 나한테 어떻게 썼나 이야기해줘. 재미있겠다."

"귀여운 애라니... 유진이 말이야."

"응. 그래. 걔. 진짜 귀엽게 생겼더라. 동생 삼고 싶을 만큼."

이때만 해도 효진과 유진의 관계를 모를 때였다. 지금에 이르러 생각해보니... 효진도 나름 핏줄이 땡겼던 걸까? 그런 걸까. 게다가 둘의 이름도... 묘하게 돌림자가 맞다. 이름의 '진'은 대체 무슨 한자를 쓰냐고 물어볼 걸 그랬나.

"암튼 꼭 이야기해줘. 너라면 재미있는 이야기를 가져올 것 같아."

"어쩐지 개그여행이라도 하고 와야 될 것 같은 압박감인데?"

"하하. 뭐든지 말이야."

그렇게 통화가 끝났다. 여차저차 하여 200만 원이 넘는 그 거액은 내게 처치곤란한 금액이 되고 말았다. 이 사정을 유진에게 이야기했더니 뭔가 곰곰이 생각하던 유진은 나보고 여행이라도 가지 않겠냐고 말했다.

"여행? 너랑 나랑? 단둘이?"

아아, 아무래도 내가 유진이나 유미에게 너무 많이 물든 모양이다. 여행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내뱉은 반응이 이렇다니.... 유진이가 고개를 홱 쳐들고 말했다.

"뭔 소리예요? 내가 미쳤다고 아저씨랑 단둘이 여행을 가요? 무슨 신혼여행도 아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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