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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며칠 후, 유진에게 전화가 왔다. 갑자기 전화한 주제에 차를 가지고 자기 집 앞으로 오란다. 집에서 혼자 공부하는 중이라고 거절했다. 전화를 끊었더니 불과 10분도 되지 않아 녀석이 우리 집에 쳐들어왔다. 하늘색 원피스를 입고 찰랑거리는 금색 리본이 달린 모자를 쓰고 있었다. 노크도 없이 불쑥 들어선 녀석은 내 방을 스윽 둘러보며 중얼거렸다.
"정말 혼자네..."
그리고 내 책상에 펼쳐있는 자격증 수험서와 연습장을 힐끔 보더니 한 마디 덧붙인다.
"진짜 공부하네..."
"아까 전화로 공부한다고 했잖아."
"여자랑 있는 줄 알았죠."
.....대체 뭘 생각하고 쳐들어온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녀석은 여행 준비를 해야 한다며 나를 재촉하여 차를 가져오게 했다. 그리고 다짜고짜 백화점으로 끌고 간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올라가 거기서부터는 에스컬레이터로 이동했다. 남녀 캐쥬얼 의상이 있다는 4층부터 둘러보기로 했다. 녀석은 상당히 들떠있었다. 난 의아하게 생각했다.
"넌 쇼핑을 안 좋아하는 거 아니었어?"
그런 이야기를 들었던 기억이 나는데 말이다. 그러나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쇼핑을 안 좋아하는 여자애가 어디 있겠어요? 같이 나갈 사람이 없어서 그렇지."
살짝 눈을 흘기며 앞장서는 유진을 따라간다. 매장을 둘러보면서 이것저것 재어보는 녀석에게 묻는다.
"같이 나갈 사람이 왜 없어? 엄마나 선영이한테 가자고 하면 안 돼?"
그러자 녀석이 날 돌아보더니 한숨을 내쉰다.
"그분들이 몇 시에 퇴근하는지나 알아요? 그렇게 힘들게 일하는 사람들에게 쇼핑하러 나가자고 조를 만큼 바보는 아니에요, 나는."
녀석은 대수롭지 않다는 듯이 말했지만 듣고 있는 살짝 가슴이 아팠다. 녀석의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지만 틀린 말이 아니기에 더 가슴이 아프다. 게다가 선영이 이름을 무심코 꺼냈다만 녀석은 거기에 대해 굳이 뭐라 하지 않았다. 선영은 대체 뭐 하고 있을까. 그녀와 마지막 시간을 보낸 일이 불과 몇 달 전인데도 아득한 먼 옛날처럼 느껴진다. 그렇게 떠난 그녀는 어떤 소식도 들려주지 않았다. 전화도, 편지도, 아무 것도 없었다.
"그럼 친구랑 같이 쇼핑 다니면 되....잖아."
말을 하다가 중간에 아차 싶었다. 단짝 친구인 소란이를 그렇게 보낸 지 얼마나 되었다고 이런 경솔한 소리를... 유진이는 입을 틀어막는 날 보면서도 그저 빙긋 웃을 뿐이었다. 그 웃음이 너무 쓸쓸해 보여 순간 가슴이 먹먹했다. 나이는 나보다 어릴지 몰라도 백 배는 더 어른스러운 녀석을 보고 있자니 무척 미안해졌다.
"음, 그럼 말이다. 다음부터는 쇼핑하러 갈 때, 내가 같이 가줄게. 가고 싶으면 언제든 이야기해."
앞서 걸어가던 녀석이 날 돌아보더니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네? 아저씨가 왜요?"
속으로 아차 싶었지만 황급히 이유를 만들어낸다.
"거 왜, 쇼핑할 때 짐도 들어야 되고 또 집에까지 날라 줄 사람도 필요할 거 아냐. 그러니까 내가 차 가지고 있으니까 도와주겠다는 거지. 뭐, 다른 생각은 없어."
내가 생각해도 어처구니없는 이유다. 스스로 짐꾼을 자처하다니. 그러나 녀석은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내 한숨을 내쉬었다. 살짝 성질이 났다.
"인마, 사람이 모처럼 호의를 내비쳤는데 그런 태도는 대체 뭐냐."
그러자 유진이 여상스럽게 대꾸했다.
"싫다고는 안 했어요."
"그럼 그 한숨은 뭔데?"
"그런 소리를 하기 전에는 적어도 저랑 드레스 코드 정도는 맞춰서 다녀주셔야죠."
"드레스 코드는 또 뭐야?"
세상을 살다 보면 분명히 아는 단어와 아는 단어의 조합인데도 전혀 못 알아들을 소리가 종종 있곤 하다. Dress와 Code라니. 설마 Dress도 C언어처럼 Source Code가 필요한 거였나. 그러면 컴파일은 대체 뭐로 하는 거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자니 녀석이 면바지 하나와 티셔츠 하나를 내밀었다.
"가서 이걸로 갈아입고 오세요."
"응? 지금?"
"네. 지금 상태로는 쪽팔려서 같이 못 다니겠어요."
내가 입고 있는 옷이 어때서! 비록 어제와 그제....와 같은 옷을 입고 있기는 하지만 아직 냄새도 안 나고 국물 같은 것도 안 흘렸는데. 툴툴거리면서 갈아입고 왔더니 녀석이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다. 녀석이 계산을 하려고 하기에 내가 먼저 나서서 계산을 해버렸다. 먼저 입고 있던 옷은 쇼핑백을 하나 받아 거기에 넣었다. 그리고 매장을 나왔다. 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오늘은 일단 그렇게 입고 다니시구요, 이제부터 시작하죠."
"응? 뭘 시작해? 다 산 거 아냐?"
녀석이 어깨를 축 늘어뜨렸다. 그리고 고개를 홱 들더니 날 째려본다. 아따, 얼라가 솔찮게 무섭네 째보네.
"제가 처음에 뭐라고 했어요. 오늘 여행 준비하겠다고 했잖아요. 잔말말고 따라오기나 해요."
그 후부터 나의 고난이 시작되었다. 백화점 4층부터 6층까지 전부 돌아보고도 성이 차지 않은 유진은 근처에 있는 아울렛 매장에 가보길 원했고 거기에 가서 한참을 둘러보더니 다시 백화점으로 가자고 한다. 똥개훈련이냐!! 라고 버럭 하고 싶었지만 애초에 같이 다녀주겠다는 소리를 한 것도 나였으니 그냥 팔자려니 하고 따라다녔다. 다시 돌아온 백화점에서 녀석의 옷을 몇 벌 사기도 했지만 주로 내 것을 많이 샀다.
"이런 무늬를 입으라고?!"
"왜요, 원래 휴양지에서는 다들 이렇게 입는 거예요."
"우리가 가는 곳이 휴양지였어?"
"그럼 출장지인가요? 일루와서 한번 갈아입어 보세요."
녀석의 고집을 도무지 꺾을 수 없는 나는 난생처음 사람 머리통만한 꽃무늬가 그려진 하와이안 셔츠도 입어보고 몸에 달라붙는 스판재질의 스포츠 셔츠를 입기도 했다. 입어본 걸 다 사지는 않았지만 지출이 만만치 않았다. 한 개에 20만 원 넘는 선글라스를 나보고 껴보라고 권하더니 잘 어울린다고 꼭 사라고 부추기는 유진을 보면서 생각했다. 이 녀석... 평소에 안 써서 그렇지 한 번 쓰면 손이 크구나.... 하긴 점당 만 원짜리 고스톱을 치자고 이백만 원 뭉치를 판돈으로 내놓던 녀석이었지. 허어. 이것 참.
"이건 너무 비싸."
"남반구로 가면 햇살이 여기보다 더 눈부시대요. 꼭 필요하다던데.. 돈 모자라서 그런 거면 제가 사드릴게요."
"나한테 비싼 건 너한테도 비싼 거야. 이건 좀 보류하자."
선글라스를 가지고 좀 실랑이 했다. 나중에야 내 말을 듣기는 했지만 유진은 선글라스를 내려 놓으며 입을 삐죽거렸다.
"치잇. 이래 가지고 나중에 저랑 쇼핑 다니겠어요?"
"....안 그래도 지금 그 의견을 무를까 말까 진지하게 고민 중이거든?"
"사 준다잖아요."
"필요없다잖아."
유진이 궁시렁거리는 걸 애써 못 들은 척 했다. 제딴에는 내게 뭔가 해주고 싶었던 모양인데, 그래도 이건 너무 비싸다. 내 양손에 들린 쇼핑백의 개수와 무게를 가늠해본다. 많다. 무겁다. 힘들었다.
"우리 좀 쉬었다 가는 건 어때? 짐은 차에 미리 좀 실어두고."
"저기만 가보고요."
"저기?"
유진이 가리킨 곳은 수영복 매장이었다. 본격적인 휴가철을 앞두고 있어서 그런지 여러 개의 브랜드가 합점하여 굉장히 대규모로 하고 있었다. 한쪽에서는 커튼으로 둘린 탈의실이 여러 개 비치되어 있어서 그 앞에는 자신이 고른 수영복을 입어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이고 있었다.
"수영복을 입어 보고 사는 거야?"
"그런가 보네요? 특이하네...."
유진을 따라 매장으로 들어선다. 이것저것 뒤적이는 유진을 보며 나 역시 남자 수영복을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나는 수영복을 입고 물에 들어가 본 적이 한 번도 없어서 수영복 자체가 없었다. 시골에서야 뭐, 그냥 벌거벗고 하거나 옷을 입은 채로 노는 게 멱감기의 기본이고 서울에 올라와서는 수영하러 간 적이 없었다.
"아저씨도 고르게요?"
"글쎄다. 하나쯤은 필요하겠지?"
유진이가 사전 브리핑한 정보에 따르면 그곳에서 스킨 스쿠버 체험은 물론 숙소에 딸린 수영장도 있다고 했었다. 그런 곳에서 시골 놈 멱감듯 놀 수는 없는 요량이니 수영복이 필요하긴 했다. 되도록 좀 점잖은 박스형으로 골라보고 있었다. 그때, 유니폼을 입은 점원이 다가와 우리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인다. 그녀의 명찰에는 특이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초향"이라니. 저게 사람 이름이야, 업소 이름이야? 그녀는 우리 둘을 보고 활짝 웃으며 말했다.
"어머, 연인끼리 오셨나 봐요? 저희 브랜드는 특별히 커플 수영복도 준비하고 있답니다. 어떠세요?"
그러면서 그녀가 들어 올린 남녀 수영복은 다소 대담한 디자인이었다. 남자 것은 스판 재질로 하여 허벅지와 엉덩이, 그리고 그곳에 착 달라붙는 모양새였고 여자 것은 끈으로 된 비키니였다. 게다가 둘 다 호피 무늬. 아니, 이 여자는 대체 우릴 어떻게 보고 이런 걸 추천하는 거지? 게다가 우리 보고 연인이라니, 대체 뭘 보고....
"어머, 오빠. 괜찮겠다. 오빠 생각은 어때?"
갑자기 내 팔을 끌어안으며 찰싹 달라붙는 이 목소리는, 분명 내가 아는 목소리인데도 불구하고 처음 들어보는 말투다. 고개를 돌려 유진을 내려다본다. 녀석은 볼을 살짝 붉히고 있었지만 방금 자신이 내뱉은 말투를 고수할 생각인 모양이었다.
"오빠는 마음에 안 들어?"
점원 쪽으로는 보이지 않게, 그러나 내게는 보이는 각도에서 살짝 혀를 내미는 녀석을 보면서 이게 신종 골려먹기인가 아니면 다른 무언가인가를 진지하게 고민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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