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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점원을 향해 쳐다보며 말했다.
"들고 자시고 간에 이런 건 처음이라...."
사람이면 사람 무늬를 입어야지, 왜 동물무늬를 입는 건데. 호랑이가 저런 무늬를 가지게 된 거는 자연 속에서 사냥감으로부터 자신의 존재를 감추기 위해서라곤 하는데 사람이 저런 걸 입었다가는 당장에 눈에 확 띄잖아! 잠깐, 그러면 사람 무늬는 대체 뭐지...? 살색 수영복이라도 입어야, 그게 사람 무늬려나.
"그런 분을 위해 이런 단색 무늬도 있답니다. 심플하게 라인만 잡아드리는 종류예요. 저희 브랜드가 이번에 백화점에 입점하면서 디자인을 다양하게 시도하고 있거든요."
점원은 물러서지 않고 또 다른 커플 수영복을 내밀었다. 다행히도 이건 동물무늬가 아니었지만 스판 재질인 것은 여전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니 유진이가 재촉한다.
"우리 한번 입어볼까? 저희 이걸로 입어 봐도 되겠죠?"
"물론이에요. 이쪽으로 오세요."
어어, 하는 사이에 유진과 점원에게 이끌려 탈의실까지 갔다. 여전히 사람이 많았다. 점원이 난처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사람이 많아서 그런데... 어차피 두 분이 연인이시면 탈의실 하나를 써도 괜찮으시겠죠? 이쪽 탈의실은 공간이 좀 넓거든요."
이 사람이 대체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내가 입을 벌리기도 전에 유진이가 내 팔을 확 잡아당기면서 말했다.
"그럼요!"
유진은 점원의 손에서 수영복을 낚아채듯이 가져오더니 날 탈의실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입구의 커튼을 확 닫아버렸다.
"인마. 너 지금..."
"돌아보지만 않으면 되잖아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게 말하면서 계속 보고 계실 거예요?"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등을 돌렸다. 등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으으.. 아무래도 상상이 되는 것 같아 시선을 아래로 향했더니 이번에는 거기에 허물처럼 벗어 내려놓은 유진의 하늘색 원피스가 눈에 들어왔다. 뭐야, 이 녀석, 진짜 벗은 거야?
"어? 이거... 좀 어려운데....?"
등 뒤에서 유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묻기도 전에 바깥에서 아까 그 점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등 부분이 똑딱이로 되어있거든요. 잘 안 맞춰지면 애인분께 해 달라고 하세요."
흐악. 그러고 보니 바깥과 이곳은 고작 커튼 하나로 나뉜 공간일 따름이다. 이런 곳에서... 이상한 생각은 금물이다.
"이상한 생각 말구요, 이것 좀 도와주세요. 아저씨."
........히꾹. 순간 딸꾹질을 할 뻘 했다. 귀신이냐, 너는. 전에는 내 얼굴 보고 내 생각을 맞춘다고 하더니 이제는 내 숨소리만 듣고도 맞추는 거야? 그런 거야? 따지고 싶었지만 애써 참으며 뒤를 돌아본다. 거기에는 비키니 팬티를 입고 아직 위는 덜 채운 브라를 붙들고 있는 유진의 뒷모습이 있었다.
"거기에 동그란 버튼 같은 거 있잖아요. 그걸 맞춰주세요."
"이...이거?"
"전 안 보이니까요. 잘 해보세요."
생각해 보니 난 이미 녀석의 알몸을 본 적이 있었다. 비록 상반신뿐이었지만.... 지금보다 훨씬 더 은밀한 곳에서 단둘이 있으면서... 말이지. 그러니 굳이 이런 상황에서 당황할 필요는 없다. 뭐... 그렇게 애써 스스로 생각한다.
"아저씨, 숨소리 이상해요."
흡- 하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안, 이상하거든?"
"내 목에 와 닿는 숨결이 좀 불규칙한데요?"
".....착각이다. 그리고 맞췄어."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녀석이 날 돌아본다. 그렇게 넓은 곳은 아니라서 녀석과 나는 거의 밀착하듯이 서 있어야 했고 녀석의 봉긋한 가슴골이 내 배에 거의 닿을듯 말듯했다.
"어때요? 괜찮은 거 같아요?"
"그...글쎄."
녀석... 은근히 전보다 성장했구나. 키는 잘 모르겠고... 그... 부위도 자기 엄마 닮아가는 걸까. 애써 시선을 돌려 다른 곳으로 향한다. 그러자 녀석이 날 타박했다.
"제대로 보고 평가를 해줘야죠. 딴 데 보면 어떻게 해요? 언니, 여기 혹시 거울은 없어요?"
유진이 밖에 대고 말하자 예의 그 점원이 말했다.
"다 입었으면 나와 보세요. 이쪽 더 안쪽에 거울 있어요."
유진이 커텐을 걷고 나간 틈을 타서 잽싸게 나도 수영복을 입어본다. 처음에는 스판이라고 해서 선입견이 있었는데 막상 입어보니 편하기는 했다. 다만 그 부분이 너무 튀어 나오는 게 난감했다. 유진이는 떠났지만 이 공간에, 바로 앞 순간에 녀석이 머무르며 뿜어낸 페로몬이 여전히 남아있는 것 같았다. 속으로 애국가를 부르며 황급히 성질을 죽인다.
"다른 것도 입어 봐도 되나요?"
"물론이죠."
바깥에서 유진과 점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이윽고 유진이 도로 들어왔다. 녀석은 내 수영복 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이렇게 말했다.
"전에도 봤지만... 아저씨도 몸이 나쁘진 않네요?"
"뭐, 인마?"
순간 녀석이 말한 전이라는 게 언제인지 생각나 버렸다. 화를 내려는 날 보고 깔깔 웃던 유진은 두 번째 수영복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난 황급히 뒤로 돌았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들으며 생각했다. 이 녀석이 날 골리는 방법이... 이제 말로 안 되니까 다른 걸로 시도하는구나. 내, 이 녀석을 그냥 콱.... 콱.... 어쩌지?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수영복 쇼핑을 마치고 나왔다. 지나치게 친절하여 이것저것 사정없이 권해대는 점원을 상대하느라 진이 다 빠졌다.
"우리... 일단 밥부터 먹고 하자. 이제 저녁 먹을 시간도 거의 다 되었잖아."
이번에는 유진이도 고집을 피우지 않았다. 백화점 맨 위층 식당가로 가서 자리를 잡았다. 샐러드와 햄버그 등 이것저것 시켜두고 음식을 기다렸다. 옆 좌석에 내려놓은 쇼핑백들을 보며 한숨이 나왔다.
"흐음... 암튼, 몰랐다. 네가 쇼핑을 이렇게 좋아하는 줄은."
"저도 이렇게 오랫동안 한참 구경하고 그런 건 처음이에요."
유진이가 푸른색 잔에 물을 채우더니 내게 내밀었다. 쌩큐, 라고 답하고 받아들었다. 녀석은 뭔가 곰곰이 생각하는 눈치더니 내게 묻는다.
"오늘 저녁은 가게 빠지면 안 돼요?"
"가게까지? 백화점이 그렇게 늦게까지 하나?"
"백화점이 아니라 동대문도 가보고 싶어요. 새벽시장이라는 게 있다고 잡지에서 봤는데 궁금해서 그래요."
이 녀석은 오늘이 무슨 쇼핑 데이 오브 더 이어라고 되는 걸까. 짐꾼 한번 되어주었더니 아예 뽕을 뽑으려고 한다. 난색을 표한다.
"안 그래도 요새 유미 씨가 하도 가게를 빼먹어서 나까지 빠지면 곤란해."
그러자 유진이가 샐쭉한 표정을 지었다.
"뭐야. 벌써부터 사장 노릇 하는 건가요?"
"유미 씨가 없다면 나라도... 자, 잠깐......헙. 그걸 어떻게 알았어?"
참고로 난 이 녀석에게 ROSE에서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정확히 이야기해 준 적이 없다. 내가 ROSE에서 일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싫어하는 녀석이기 때문에 그렇다. 그냥 뭉뚱그려 유미의 일을 돕는다고만 말했을 뿐이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안 거야? 넌 나를 미행이라도 하는 거냐? 공동대표가 된 건 나중에 이야기하려고 했는데?
"언니들한테 들었어요. 아저씨는 가게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나한테 입 꾹 할 생각인지는 모르겠지만... 언니들한테 한 번만 물어보면 다 들을 수 있다구요. 치잇."
입을 삐죽거리는 녀석을 보면서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그렇다. 잠깐 잊고 있었다. 가게의 아가씨들은 기본적으로 유진이를 다들 귀여워하고 있었다. 사장 딸이라서 그런 것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유진이가 귀엽기도 하니까... 나는 유진이의 정보원들에게 둘러싸여서 일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아가씨들이랑 엉뚱한 짓 안 하길 천만다행이구나.... 그리고 일반 사람들에게는 정을 잘 못 붙이는 유진이지만 이상하게도 그쪽 업계의 아가씨들과는 친하게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중에서도 가장 대표적이고 가장 유별났던 분이 지금 이곳에 있지 않아 이러한 사실을 잠시 잊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그녀는 뭐 하고 있을까.
"사장된 거는 언제 이야기하려고 했어요?"
".....뭐,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면 되는 거 아냐?"
"아뇨."
유진은 고개를 저었다. 녀석이 고개를 들고 날 똑바로 바라본다.
"난 아저씨에 관한 건 아저씨에게 직접 듣기를 원해요. 다른 사람을 통해서 듣는 건 싫어요."
그 말투는 뭐랄까. 따지는 것 같으면서도 묘하게 날 책망하는 것 같기도 했다. 이전에도 녀석에게 "말하지 않은" 일들이 있던 나로서는 찔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알았어. 노력할게."
정말 다행스럽게도 때마침 음식이 나와주었다. 포크를 들고 샐러드를 쿡쿡 찌르면서 잠시 다른 대화를 했다. 주로 오늘 쇼핑하면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했고 공부 이야기도 조금 하다가 녀석이 짜증을 부려서 그만두었다. 여행 가서 뭐 하고 놀까도 제법 많이 이야기했다. 근데 여행일정을 이야기하다가 녀석이 문득 말을 멈추고 엉뚱한 소리를 꺼냈다.
"근데요."
"응?"
"아저씨가 나랑 엄마랑, 이렇게 여자들하고 여행 가는 거... 애인이 안 싫어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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