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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 생각을 그렇게 하고 있어? 이거 써보라니깐?"
"어? 어...."
멍하게 서 있던 난 유미가 내민 선글라스를 써보았다. 거울을 보니 생각보다 나쁘지 않았다. 면세점 직원도 몹시 칭찬하며 하나 장만하라는 말을 아끼지 않았다. 유미가 내 머리를 붙들고 거울에 대어 좌우로 비춰본다.
"잘 어울리는데? 내가 사줄게. 하나 해."
내가 무어라 대답을 하기도 전에 유미는 점원을 시켜 계산을 마쳤다. 다른 걸 구경하다가 이쪽으로 온 유진이가 날 올려다보며 물었다.
"선글라스?"
아차.... 그러고 보니 며칠 전에 백화점에 갔을 때 녀석도 나에게 선글라스를 권했었다. 사주겠다고도 했었지만 비싸다는 이유로 거절했던 기억이 났다. 난 급히 변명했다.
"아, 이건 말이야... 그러니까..."
"내가 사주는 거야. 어때, 잘 어울리지?"
눈치코치 없는 유미가 불쑥 끼어들며 유진이에게 묻는다. 유진은 흥- 하는 콧방귀를 끼고는 먼저 가게를 나가버렸다. 씩씩거리며 걸어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화가 제법 난 것 같았다. 그러자 유미가 날 돌아보며 묻는다.
"안 어울리나?"
"....내가 안 어울린다고 쟤가 삐질 애는 아닌 것 같습니다만."
"왜 삐졌을까...."
유미의 태도를 보고 있으면 정말이지... 얄밉기 그지없다. 이 여자는 지금 분명히 다 알고 있으면서 이러는 거다.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일단 선글라스를 벗어 케이스에 담고 가방에 넣어두었다. 원래 우리가 있던 자리로 돌아와 유진을 달래고 있는데 안내방송이 흘러나온다.
"금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괌으로 향하는 대한항공 801편 탑승객 여러분께서는 3번 게이트로 이동해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탑승을 시작합니다. 다시 한 번 말씀 드립니다. 금일 20시..."
유진은 한마디 말도 없이 자기 짐만 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게이트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갔다. 나는 한숨을 푹 내쉬고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등 뒤에서 전혀 긴장감 없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자기야."
"왜?"
"나 화장실."
무슨 애도 아니고...
"혼자 가!"
라고 버럭 소리 질러보았지만 유미가 손에 들린 짐이 많다고 투정을 부리는 바람에 결국은 동행하게 되었다. 게이트에서 조금 떨어진 화장실로 갔다. 유미가 여자화장실로 들어간 동안 나도 미리 볼일을 처리할까 싶었다. 들고 있던 짐은 세면대 옆 공간에 올려두고 볼일을 보았다. 쏴아아... 하는 물소리가 옆에서 났다. 무심코 쳐다보니 무뚝뚝한 표정의 중년 남자가 있었다. 어깨에 달린 견장과 머리에 쓰고 있는 모자에서 어쩐지 군인의 풍모가 느껴진다. 얼굴은 살짝 피곤해 보였지만 눈매는 부리부리한 게 다소 고집이 있어 보였다. 볼일을 마치고 세면대로 와서 손을 씻고 있는데 그 역시 내 옆으로 오더니 손을 씻는다. 고개를 들어 거울을 보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다. 그가 말했다.
"승객이신가 보죠?"
"아, 예."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차림을 본다. 평범한 정장이 아닌 뭔가 유니폼의 느낌이 난다. 혹시나 싶어서 물어보았다.
"혹시 파일럿이세요?"
"그렇습니다. 조금 있다가 괌으로 가는..."
"아!"
설마 하는 생각으로 시간을 물어보니 내가 타는 비행기의 기장이란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짐을 챙기며 말했다.
"그 비행기의 승객입니다. 비행기 여행이 처음이라 좀 긴장하고 있어요."
손수건을 꺼내어 손을 닦던 그는 너털웃음을 지었다.
"긴장하실 필요 전혀 없습니다. 지난 십 년간 비행기 사고로 죽은 사람을 다 합쳐도 단 일 년 동안 자동차 사고로 죽은 사람 수에는 미치지 못하는 걸요. 편안한 비행이 되시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그는 내게 가볍게 경례까지 붙이고 화장실을 나갔다. 나 역시 화장실을 나가서 좀 기다리자니 유미가 나왔다. 그녀와 함께 게이트로 향했다. 유미의 짐까지 내가 들고 있느라 손에 들린 게 좀 많았다.
"티켓 확인 부탁드립니다."
환한 미소를 띠우며 우릴 맞이하는 승무원에게 표를 보여준다. 그녀가 가리킨 방향을 따라 좁고 기다란 연결통로를 거쳐 비행기 내부로 들어선다. 생각보다 크고 넓었다. 내부에 2층도 따로 있다는 사실을 듣고 깜짝 놀랐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촌놈 티를 일부러 낼 필요는 없었다.
"가방 올려드릴까요?"
"아, 예. 부탁드립니다."
자리 근처에 도착하니 또 다른 승무원이 짐을 선반에 싣는 것을 도와주었다. 우리 자리는 가운데 열의 맨 뒷자리였다. 네 개의 좌석이 나란히 붙어 있었는데 우리의 자리는 2, 3, 4번 자리였다. 유진이는 2번 자리에 먼저 앉아 팔짱을 끼고 있었다. 그 뾰로퉁한 모습을 보며 유미가 소리 내 웃었다.
"자기가 쟤 옆에 앉아."
"내가?"
"응. 옆에 앉아서 좀 달래봐."
쟤를 열 받게 한 사람은 당신이거든? ...이라고 쏘아붙여 주고 싶었지만 이미 그녀에게는 고가의 선물을 받아버린 터라 그냥 시키는 대로 하기로 했다. 내가 유진의 옆에 앉고 유미가 내 옆, 그러니까 통로 쪽에 앉았다. 원래는 유미와 유진이 나란히 앉고 내가 통로 쪽에 앉기로 되어 있었는데 사정이 그리되었다. 난 조심스럽게 유진이에게 말을 붙여보았다.
"유진아... 많이 화났어?"
"아뇨."
.....기왕이면 말투와 말의 내용을 동일시하는 건 어떨까 하는 아주 작은 소망이 있다만.
"난 사겠다고 말도 안 했는데 네 어머니가 그냥 계산해 버린 거야. 진짜라니깐."
"그래도 결과적으로 넙죽 받은 거잖아요."
"내가 또 언제 넙죽 받았니? 얼떨결에 받은 거지...."
그러자 유진이가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쳇. 그러면 나도 앞으로 얼떨결에 사서 안겨버릴 거야. 무르기 없기에요?"
"그...그래라, 그럼."
간신히 유진이를 달래는 데 성공했다. 이런 내 모습을 보면서 빙긋 웃고 있는 유미를 향해 얼굴을 찡그려 보였다. 이게 다 누구 때문인데!
"저희 비행기 KE801은 보잉 747기종으로, 한국시각으로 8월 5일 20시 7분, 김포공항을 출발하여 목적지인 괌 현지시각으로 6일 오전 1시 43분, 아가냐 국제공항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활주로 제반 사정으로 인하여 출발이 다소 지연되고 있습니다만 승객 여러분은 모두 제자리에 착석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중간에 기내식이 한번 제공될 예정이며..."
안내방송이 흘러나왔지만 사람들이 하도 부산해서 제대로 들리지도 않았다. 잠시 후, 안전벨트 착용등이 켜졌고 승무원들은 사람들로 하여금 착석하게 하며 이것저것 점검하며 돌아다녔다. 이륙 직전, 기장의 목소리가 기내방송으로 흘러나왔다. 자신은 베테랑 조종사이며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모시겠다는 그의 목소리를 들으며 옆에 있는 유진에게 속삭였다.
"나, 아까 저 아저씨 화장실에서 봤어."
"그래서요?"
"....뭐, 그렇다고."
다 풀린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닌 모양이다. 흐음. 곧 웅웅거리는 소리와 함께 비행기가 조금씩 미끄러져 가는 것을 느꼈다.
"오, 진짜 움직이네."
촌티를 안 내려고 여태까지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옆에 있는 유진이가 콧방귀 뀌는 걸 애써 무시했다. 이후의 비행은 순조로웠다. 유진이는 승무원에게 헤드폰을 구해 달라고 요청하더니 앞에 있는 라디오 방송용 잭에 꽂고 음악을 듣는 모양이었다. 녀석은 신발을 모두 벗고 다리를 시트 위로 올려 두 팔로 꼭 끌어안고 있었다. 화가 풀렸다고 생각한 건 나뿐인 모양이었다. 나 역시 가만히 앉아있다가 꾸벅꾸벅 잠이 들었다.
한참 자고 있는데 누군가 날 깨웠다. 중간에 기내식이 제공되려고 할 때에 크게 한번 덜컹거려서 식사 제공이 잠시 멈춰지긴 했지만 이내 재개되었다. 승무원들은 이런 난기류는 한 번쯤 있는 거라고 사람들을 안심시키며 돌아다녔다.
화장실도 한 번 정도 다녀오고 계속 꾸벅거리며 졸고 있는데 누군가 날 흔들어 깨웠다. 유진이였다.
"아저씨. 거의 다 도착했대요. 일어나세요."
"응?"
"입가에 침 닦아요."
유진이의 핀잔을 들으며 자세를 바로 했다. 하늘의 감동을 느낄 사이도 없이 눈 깜짝할 사이에 도착했다. 잠시 후, 우리는 공항에 도착했고 미리 예약해둔 숙소에서 보내 준 차를 타고 호텔로 향했다.
"네? 방이 하나밖에 안 잡혀 있다고요?"
호텔 지배인이 한국 교민이어서 말은 잘 통했다. 그러나 중간에 무슨 전달 착오가 있었던 모양이다.
"예약하실 때 가족이라고 하셔서요, 저희가 임의로 방 하나에 배정했습니다. 지금이 워낙 성수기라..."
"아무리 그래도 그렇죠. 분명히 방 두 개를 잡았는데 어째서..."
내가 짜증을 부리려고 하자 유미가 나섰다.
"일단 그쪽이 임의로 처리하신 거니까요, 금액에 대한 환불은 물론이고 추가 침대에 대한 요금은 받지 말아 주세요. 기왕이면 보다 좋은 서비스를 기대했는데 이러면 실망이네요."
점잖게, 그러나 무게감 있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지배인은 쩔쩔매며 알았다고 대답했다. 나중에 아침식사를 룸서비스로 보내주겠다고 한다.
"이런 곳에 와서 그렇게 날 세울 필요는 없잖아. 자기야."
"그래도..."
"지금 유진이가 많이 피곤해 하고 있어. 얼른 들어가 쉬자."
유진을 돌아보니 선 채로 꾸벅거리고 있었다. 자정이 넘은 시각이라 피곤할 만도 했다. 녀석을 들어 안고 방으로 향했다. 다행히도 방은 넓었고 전망도 좋았다.
"유진이는 일단 여기에 앉혀줘."
"응."
"그리고 자기도 여기에."
"어라?"
삽시간에 나와 유진, 그리고 유미가 한 침대에 엉켜 눕게 되었다. 유미가 날 바라본다. 그녀는 팔을 뻗어 내 목을 끌어안더니 깊숙이 입을 맞춘다. 그러자 새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금 내 앞에서 뭐하는 거예요?!"
아뿔싸. 유진이가 완전히 잠든 게 아니었다. 당황한 나와 달리 유미는 태연했다. 그녀는 내게서 입술을 떼더니 자기 딸을 돌아보았다.
"너도 하면 되잖아."
그렇게 말을 하자마자 그녀는 유진이의 두 뺨을 붙들고 찐한 키스를 하기 시작했다. 뭐...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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