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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아저씨. 거의 다 도착했대요. 일어나세요."
"으음?"
"입가에 침 닦아요."
황급히 입을 닦고 자세를 바로 했다. 어라? 꿈이었나? 아직 비행기 안이었다. 승무원들이 돌아다니며 노란색으로 된 어쩐 종이와 볼펜을 나눠주고 있었다. 아직 잠이 덜 깬 난 그걸 들여다보며 인상을 찌푸렸다.
"이건 또 뭐야."
"아저씨, 영어 잘 해요?"
"뭐.. 그럭저럭은?"
받아들어 보니 입국심사서였다. 승무원들이 여권에 기재된 것과 똑같은 스펠링으로 쓰라고 강조했다. 고개를 끄덕이고 좌석에 달린 탁자를 끄집어 내어 기재하기 시작했다. 유미가 자기 것도 써달라면서 나에게 내밀었다. 내 왼편에 앉은 유미가 창문 쪽을 보며 뭔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았지만 그녀는 그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우리 자리에서 창문 너머까지 잘 보이진 않았지만 유리벽 바깥을 때리고 있는 물방울의 흔적은 그럭저럭 보이는 편이었다.
"비오는 거야?"
"아까 라디오 듣고 있으니 무슨 태풍이 온다고도 하던데..."
유진이가 걱정스럽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난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그래도 놀 때는 날씨 좋을 거야. 도착하면 제일 먼저..."
때마침 기내 방송이 흘러나온다.
"저희 비행기는 이제 5분 후, 목적지인 아가냐 공항에..."
바로 그 순간.
거대한 충격이 우리를 덮쳤다. 처음에는 공간이 일그러지는 듯한 착각을 느꼈다. 그러나 바로 그 직후, 1초 후에는 그것이 착각이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를 둘러 싸고 있는 공간, 그러니까 비행기의 외벽이 사납고 거친 소리를 내며 실제로 우겨지고 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들이 튕겨 올라 천장에 부딪히고 또한 찢어진 외벽 틈으로 검은 바깥이 보일 때, 거기를 통해 튕겨 날아가버린 사람도 있었다.
"으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 비행기의 비명. 찢어지는 공기의 비명이 동시에 엉켜 들린다. 나는 본능적으로 팔을 뻗어 유진을 끌어안았다. 녀석의 머리를 아래로 밀어 넣고 우측에 있는 유미를 향해 팔을 뻗었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순간, 머리 위에 있는 짐칸의 문이 강제로 열려지며 그 안에 담겨 있던 짐들이 쏟아져 내린다. 머리 위에 노란 등이 켜지고 비상용 호흡기가 튕겨져 나왔다.
"꺄아아악!!"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고, 사람들이 죽어갔다. 이 모든 장면이 불과 몇 초 되지 않는 순간에, 정말 눈 깜짝할 사이에 전부 일어나버렸다. 안전띠가 내 몸을 시트에 고정해 준다고는 하나 그건 고작해야 하나의 끈일 따름이다. 거기에 내 체중이 온전히 실리다보니 순간적으로 호흡이 곤란했다. 괴로웠다. 비명을 질렀고 내 비명은 더 많은 사람의 비명과 그보다도 더 큰 비행기의 비명에 묻혀 들리지 않았다. 조명도 순식간에 사라졌다. 환한 빛이 사라지고 그 자리를 주황색 비상등이 대신하긴 하지만 광도 자체가 낮아 어둠을 몰아내기는 역부족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어둠에 놀라기도 전에 무언가 뜨거운 빛이 저 너머에서 일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 잘못 되고 있다. 여기서 벗어나야 한다.
"유미! 유진! 빨리 안전띠! 빨리!!!"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이상한 각도로 눌린 몸과 배로는 숨 쉬기 조차 쉽지 않았다. 그러나 난 기어이 몸을 비틀어 빼내고 양옆에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는 두 사람을 추스렸다. 사방은 비명소리와 신음소리로 가득했고 비행기 동체 앞부분에서는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앞 부분이라니! 우리가 있는 곳과 앞 부분은 말 그대로 절단이 되어 있었다. 저 멀리 허옇고 퍼런 배를 드러내며 굴러있는 동체가 보인다. 순식간에 실내는 매캐한 연기로 가득차서 시야가 제한되기 시작됐다. 무언가 타는 냄새로 가득했다. 고기 굽는 냄새와 비슷하지만 노린내가 지독한 이 냄새는.... 본능적인 불쾌감을 안겨주었다. 사람의 살이 타고 있다. 지옥이, 바로 이곳에 있었다.
"엄마! 엄마!"
"으아아악!! 사람 살려!!!"
끊임없이 이어지는 사람들의 찢어지는 비명. 그것을 귀에 담는 건 대단히 고통스러웠다. 유진의 안전띠를 간신히 풀어냈다. 유미의 것도 풀어내고 몸을 일으켰다. 극심한 고통이 발목을 강타했다. 도무지 왼쪽 발목으로 설 수가 없었다.
"으그으윽....."
몸 구석구석이 성한 곳이 없었다. 엄청난 펀치력을 가진 복싱선수가 내 몸을 골고루 패버린 것 같은 기분이다. 유진은 거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었다. 녀석의 이름을 부르며 뺨을 두드린다.
"유진아! 유진아! 정신차려!!!"
천장이 없다. 비가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불과 몇 분 전까지만 해도 나는 안락한 비행기 좌석에 앉아있었거늘 말 그대로 눈 깜짝할 사이에 나락을 향해 추락한 기분이다. 유진의 몸을 붙들고 흔들어 보지만 녀석의 축 처진 몸은 가누기조차 쉽지 않았다. 고개를 들게 하고 얼굴을 살핀다. 숨은 쉬고 있다. 아무래도 놀라서 기절한 모양이었다. 다른 부분의 외상은 보이지 않았다.
"유미, 좀 도와...."
그녀를 돌아본 난 소리없는 비명을 질렀다. 그녀의 옆구리를 관통하고 있는 쇠파이프를 본 까닭이다. 파리한 빛의 얼굴을 한 그녀가 날 올려다본다. 그리고 웃는다. 웃어? 정말... 당신이란 여자는....
"얼른.... 유진이를 데리고...."
"가만 있어. 말 하지 마!"
내 다리를 움직이는 것만 해도 엄청난 고통이 따르고 있었지만 오히려 그 고통이 나로 하여금 더 정신을 차리게 해주고 있었다. 유미의 옆에 무릎 꿇고 앉아 살펴본다. 어떤 철봉 같은 것이 그녀의 등 뒤에서부터 배 앞까지.... 불쑥 튀어 나와 있었다. 어떻게든 뽑아내면 그녀도 옮길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난 혼자였고 돌봐야 할 사람은 둘이었다. 물론 사방에 다른 사람도 있었지만 태반은 이미 죽은 사람이거나 죽어가는 사람뿐이었다. 그나마 비명을 지르며 허우적 대는 사람이 나은 경우다. 내가 그녀의 배에서 튀어 나온 철봉을 붙잡고 낑낑거리고 있자니 유미가 날 만류했다.
"빨리... 나는 두고... 유진이를...."
나는 고함을 질렀다.
"유진이는 멀쩡해! 일단 당신부터....."
철봉을 당기는 건 쉽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철봉이 무언가 대단히 기분 나쁜 끈적한 액체로 범벅이 되어 있어 자꾸 미끄러졌다. 그 액체가 무엇인지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이건 현실이 아니다.
"아냐. 현실이야."
그녀가 내 팔을 붙들었다. 말도 안 된다. 내 생각을 읽은 건가? 소리 지르고 싶었다. 그녀에게 외치고 싶었다. 그러나 그녀의 표정은 지극히 평온했다.
"침착하게 여길 벗어나. 서둘러. 시간이 없어."
단호한 말투에는 힘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딸을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시 날 쳐다보았다. 그 눈빛은 여지껏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빛으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다른 무언가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숨을 들이킨다. 그리고 단 한 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빠르고 단호한 말투로 빠르게 말의 폭포를 쏟아낸다.
"데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이쪽 방향을 등져. 언덕을 내려가면 길이 나올꺼야. 바람이 불어오는 방향으로 걸어가. 가다보면 거대한 송유관이 나올거야. 그 앞에서 기다려. 구조대는 바로 거기에 도착할 테니까. 너희 둘은 살 수 있어. 그렇지만 여기... 여기 있는 사람들을 돌아보지 마. 괜히 발목만 잡게 되니까."
여기 있는 사람들에는 자신도 포함된다는 걸, 그녀는 모를 리 없다. 아주 잘 알고 있다. 지금 이 순간은 물론이고, 아주 예전부터 알고 있었을 것이다. 난 울부짖었다. 그녀의 말이, 그녀의 이런 단호한 태도가 날 미치게 한다.
"왜! 왜! 진작에 말하지 않았어! 이런 일이 있을 거라는 걸! 그랬다면...그랬다면...."
그녀가 고개를 젓는다.
"내가 말했잖아.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쿨럭.....라고. 나도 즐겁게 놀고 싶어서... 자기랑... 유진이랑...."
그녀의 입가에서 피가 흘러내리고 있었다. 내장이 상한 모양이다.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나는 그저 울고만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이어진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은... 확실히 정해져 있어....내가 보았어. 넌 살아. 그러니 돌아보지 말고 걸어. 절대로 돌아보면 안 돼. 유진이를... 부탁해."
난 한사코 고개를 저었다. 그녀를 두고 갈 수 없다. 이렇게 외롭게... 이런 지옥같은 곳에 그녀를 두고 갈 수는 없는 거다.
찰싹-
내 뺨에 가해진 강렬한 충격. 유미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그녀는 조금 전 때린 내 뺨을 만지며 말했다.
"때려서 미안해.... 그렇지만 정신 차려. 부탁이야. 유진이를 살려줘. 내 마지막 부탁이야.... 그러니 어서 가!"
결국 난 그녀가 시키는 대로 했다. 늘 그랬듯이, 이 모녀가 시키는 일은 도무지 거절할 방법을 모르겠다. 자꾸 흐트러지는 유진을 추슬려 등에 업고 갈라진 벽 틈으로 빠져나갔다. 나가기 직전 유미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빙그레 웃으면서 손에 키스를 담아 이쪽으로 보낸다. 마치 ROSE 사무실에 앉아있을 때처럼, 태연하기 그지없는 얼굴이었다. 웃는 것 같으면서도 우는 것 같았다. 자세히 보이지 않았지만 느낌이 그러했다. 어디선가 피어오르는 매캐한 연기가 그녀와 내 사이를 막았다.
쏴아아아아-
밖으로 나오자 더 강한 빗줄기와 바람이 우릴 맞이했다. 바닥에 쓰러져 있는 사람의 옷을 벗겨 그걸로 등에 업은 유진이를 동여 맸다. 그 사람은 이미 죽어있었다. 옷은 필요없을 테니 조금 빌리겠어요. 사방에서 들리는 비명을 애써 무시한다. 미안해요. 미안해요. 난 지금 하나를 구하기 위해 이미 하나를 버렸어요. 아이들의 비명. 여자들의 비명. 사람들의 비명. 비명. 비명. 눈을 감아도 귀는 막을 수 없다. 그 비명들이 끝도 없이 내 고막을 후벼 판다.
발에서 느껴지는 고통도 무시한다. 기괴하게 뒤틀린 왼쪽 발목이 대체 어떤 식으로 걸음을 만들어내는지 모를 지경이다. 더군다나 남쪽이 어디인가. 모르겠다. 하지만 유미는 이쪽을 등지라고 했다. 무작정 방향 하나를 정해 언덕을 내려가기 시작한다. 40여 미터도 채 가지 않아 뒤쪽에서 폭발음이 들렸다. 아까 내가 보았던 불길이 우리가 벗어난 동체 조각까지 닿아있었고 거기에서 폭발이 일어나고 있었다.
- 돌아보지 말고 걸어.
유미의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재생된다. 그래서 빨리 벗어나라고 한 건가. 그런 건가. 나는 그녀가 시키는 대로 걸었다. 방향은 자신이 없었지만 악전고투 끝에 차량이 오가는 흔적이 있는 길을 찾아내었다. 그걸 따라 걷는다. 바람을 맞서 걷다보니 몇 번이고 고꾸라졌다. 얼굴과 온 몸이 진흙투성이가 되었다. 저 멀리 언덕 위에서 불타오르는 거대한 불길이 조명 아닌 조명이 되어주고 있었다. 저 안에서 타고 있을 수 많은 사람...그 외침들...그 비명들을 등지고 걷는다. 또 걷는다.
왜에에에엥-
얼마나 걸었을까. 눈앞에는 거대한 파이프가 보였다. 사람 키만한 그것은 길을 가로질러서 놓여있었고 많은 구급차와 소방차가 맞은 편에서 경광등을 울리며 대기하고 있었다. 아마도 사고 현장으로 향하던 차들이 이 관에 막혀 더 이상 접근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그중 누군가가 우리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이 쪽을 향해 조명이 쏟아지고 사람들이 달려오기 시작한다. 탈진한 나는 그대로 쓰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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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항공 801편 추락사고.
아주 예전에 그런 질문을 받은 적이 있죠. 왜 굳이 배경이 1997년이냐고요.
핸드폰도 그렇고 IMF도 그렇고.... 그리고 마지막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이걸 쓰기 위해 관련 자료 및 항공사고 다큐를 몇 번이고 보았습니다.
참혹하더군요. 안타까웠습니다.
이미 몇 분은 앞 부분에서 어느 정도 짐작을 하고 계시더군요.
전후 맥락에서 팩트와 다를 수 있겠습니다만... 직접 가보지 못한 저의 한계고 소설 표현의 한계입니다. 양해 바랍니다.
다시 한 번, 그때의 피해자들과 그 유가족에게 삼가 조의를 표합니다.
글 쓰는 녀석이지만 당시의 그 슬픔은 무어라 표현할 방법이 없군요.
고작 야한 소설이나 써제끼는 주제에 이런 소재를 가져다 쓴 것을 죄송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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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석과 유진이가 앉은 좌석 위치는 사고 관련 문서( http://www.airdisaster.com/reports/ntsb/AAR00-01.pdf
)의 Survival Aspects에서 좌석 배치도를 참고하였습니다.
이미지로 크게 나온 건 다음과 같네요.
http://upload.wikimedia.org/wikipedia/commons/b/b0/KoreanAir801Survivorloc.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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