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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32화 (13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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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 형에게서 연락이 왔다. 간밤에 전세기 한 대를 수배하여 이쪽으로 보냈다고 했다. 형의 행동력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전세기라니... 그런 건 무슨 영화에서나 나오는 건 줄 알았는데 말이다. 아침이 되자마자 영사관 직원 중 한 명이 날 찾아와 형의 이름을 말했다. 그에게 우리 여권을 맡기자 그는 다른 수속이나 출국 심사는 알아서 할 테니 개인 짐만 챙기라고 했다. 유진이나 나나 어차피 맨몸으로 이 병원에 들어왔기에 딱히 짐이라고 할 게 없었다. 더 챙길 건 없다고 대답하려다가 문득 우리 짐 생각이 났다.

"아직도 수색 중인가요? 시신들은....?"

"네. 동체를 톱으로 잘라가며 내부까지 모두 뒤지고 있다고 합니다. 니미츠힐 근처 계곡도 수색중이구요."

"저기, 사람 수색하기도 바쁜 시기이긴 하지만요, 혹시 나중에라도 모르니까 이런 부탁해도 될까요?"

"뭐든지요. 말씀만 하세요."

한참 주저하던 나는 우리가 가져와 선반에 실었던 슈트케이스의 모양과 색깔에 대해서 설명했다. 내 말을 들은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마 태그가 다 붙어있을 테니까요, 유류품 중에서도 있나 확인해 보겠습니다. 나중에라도 발견되면 국내로 보내드릴게요."

"감사합니다."

그렇게 수속이나 심사 같은 건 속성으로 제치고 나니 이제 나가는 일만 남았다. 영사관 직원은 시신을 실은 관의 수송과 공항까지의 교통편을 수배해 주었다.

잠시 후, 차가 도착했다는 연락을 받고 유진과 함께 나갔다. 커다란 밴의 뒷자리에는 이미 유미가 실려있었다. 나와 유진은 중간 자리에 탔다. 자신의 엄마가 담긴 관을 내려다보면서도 유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공항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건 커다란 프로펠러가 각 날개 아래에 하나씩 달린 수송기였다. 전체 길이는 약 30미터가 조금 안 되었지만 둔중한 생김새가 퍽 인상적이었다. 한 명의 조종사와 두 명의 승무원이 우리를 맞이했다. 그중 한 명은 군의관이라고 했다. 뭐야. 그럼 이 수송기는 군 소속인가? 비록 승무원들이 군복을 입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쩐지 동작에 절도가 있었다.

"저희가 모시게 된 것을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이쪽으로 오시죠."

밝게 웃는 승무원의 안내에 따라 비행기에 올라탔다. 승객 수송이 전문인 여객기처럼 편안한 좌석은 아니었지만 그리 나쁘지 않은 좌석이 앞열에 준비되어 있었다. 맞은 편에는 위성에 연결된 전화기와 TV까지 준비되어 있었다. 불과 며칠 전, 그 참혹한 일을 비행기에서 겪었는데 또 타게 되는 게 두렵기도 했다. 슬쩍 유진을 돌아보니 녀석의 표정은 전혀 변화가 없었다. 그런 녀석 앞에서 떠는 모습을 보이기가 싫어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하며 올라탔다. 유미의 관도 함께 실렸다. 더 이상 태울 인원도 없기에 그대로 후미 도어를 닫고 이륙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활주로를 달리는 동안은 비교적 덜컹거리는 바람에 조금 쫄기도 했지만 이내 이륙이 끝나고 하늘로 날아오르자 떨림은 이내 멈추었다.

기내에 설치된 전화기는 위성을 통한 방식이라고 했다. 날아가는 비행기 안에서 전화를 걸 수 있다는 사실이 제법 놀랍기는 하지만 음질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태근이 형에게 아까 군의관에게 들은 도착 시간을 일러주었다. 형은 미리 장례 준비를 해두었다고 했다. 형이 물었다.

"유진이는... 괜찮냐?"

고개를 돌려 반대편 좌석열에 앉아있는 유진을 힐끔 보았다.

"네. 괜찮아요."

형은 꺼질듯한 한숨을 내쉬며 알았다고 했다. 그는 내게 도착하면 공항에서 누굴 만나야 하고 어디로 나와야 하는지도 모두 일러주었다. 형이 이렇게까지 꼼꼼한 사람인 줄 미처 몰랐다. 긴 통화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왔다. 유진이가 고개를 들어 날 쳐다보았다.

"형이랑 통화했어. 차량을 미리 준비해 두었대."

"......"

"취재진이 좀 있는 모양이야. 형이 공항 쪽에 미리 이야기해서 입국심사를 생략하고 비선을 통해 빠져나갈 길을 만들었대. 그렇게 알아둬."

"......"

"배고프지는 않아?"

유진은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말을 잃어버린 녀석이지만 그래도 의사는 표현한다. 팔걸이에 얹어진 녀석의 손을 가볍게 쥐었다.

"도착해서 바로 이동하고 그래야 되니까 뭐라도 좀 먹어둬. 내가 가서 빵이라도 가져올게."

고개를 젓지 않기에 자리에서 일어나 콕트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크루에게 말하자 곧바로 커다란 빵 두 개를 내어준다. 접시와 칼을 받아 한입에 먹기 좋은 크기로 썰었다. 뚜껑이 달린 컵 하나를 받아 우유도 한 잔 채운다. 불편한 다리를 절뚝거리며 자리로 돌아와 유진이에게 주자 겨우 한 조각 집어 먹는다.

"좀 더 먹어."

이번에는 고개를 젓는다. 피곤한 표정인 것 같아 접시를 한쪽에 밀어두고 어깨를 내어준다.

"잘래?"

유진은 대답 대신 머리를 기대온다. 팔을 뻗어 녀석의 어깨를 감싸 안는다. 창밖에 펼쳐진 운해의 광경을 바라보며 지난 며칠을 떠올린다. 악몽 같았던 그 밤을, 새삼 떠올리기는 싫지만 그 날로부터 시작된 혼란과 아픔의 시간을 좀처럼 지워버릴 수가 없다. 전신에 타박상 정도로 끝난 유진이는 거의 기적 같은 케이스고 나 역시 다리 하나에 부목을 대고 있어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생존은 정말이지 꿈 같은 일이었다. 심지어 아직까지 사망자 수는 제대로 집계되지 않고 있다. 원래 승객과 승무원을 합하여 전체 이백오십 명가량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생존자는 우리를 포함하여 마흔 명이 채 되지 않는다. 그나마 살아남은 사람 중 몇 명은 유독가스를 많이 마셔 아직도 생사를 헤매고 있다.

새벽부터 일어나 준비를 하느라 피곤했기에 유진의 옆자리에서 조금 잤다. 저녁 무렵에 김포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보게 된 한국의 모습이 감격스러웠다. 감격에 취해있을 틈도 없이 서둘러 출국장을 빠져나왔다. 괌 참사의 생존자를 취재하겠다는 기자들이 출국장에 진을 치고 있다고 했다. 간신히 따돌리고 태근이 형이 보내준 미니버스을 통해 공항을 떠날 수 있었다. 캐딜락 영구차 한 대가 우리 뒤를 따랐다. 차는 우리와 유미를 싣고 그녀의 집 근처에 있는 한 장례식장으로 향했다. 빈소에 도착하자 형이 나와서 나와 유진을 맞이했다.

"어서 와. 여기까지 오느라 수고 많았다."

"아니에요. 형. 형이 더 수고하셨어요."

"유진이는... 괜찮니?"

유진이는 형을 빤히 올려다보더니 대답 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형은 유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눈물을 삼켰다. 검은 정장을 입은 형은 오른팔에 흰색으로 된 천띠를 매고 있었다. 모상(母喪)의 표식이다. 작은 부분이지만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단, 유진이에게 출생의 비밀에 대한 것을 유미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점을 형에게 미리 일러주었다. 그는 알았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고. 유진아... 유진아....흑흑흑흑..."

작은 빈소는 ROSE에서 온 아가씨들로 꽉 차 있었다. 그녀들은 번갈아 돌아가며 다 같이 유진을 끌어안고 눈물을 펑펑 흘렸다. 누구보다 정이 많은 아가씨들인지라 마담의 변고를 몹시 안타까워했다.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유진의 모습을 보며 더욱 슬퍼하며 자기 가슴을 치곤 했다. 모르는 아가씨들도 꽤 있었다. 하나같이 풍성한 검은색 옷을 입고 음식을 차리고 손님을 맞이하는 등의 일을 하는 그녀들이 누구인지 형에게 묻자 자기 집에서 일하는 고용인들이라고 했다. 그러고 보니 그중 한 명은 예전에 효진과 함께 소란이의 빈소를 찾았던 사람이었다. 날 알아보고 고개를 숙였다. 나 역시 마주 인사했다.

싣고 온 관을 병풍 뒤에 두고 다시 제사상이 차려졌다. 오늘로부터 삼일상을 치르게 된다. 유미의 영정 사진은 그녀가 유진이와 함께 놀러 갔을 때 찍었던 사진에서 얼굴만 따온 것이었다. 환하게 웃는 그녀의 얼굴이 흑백으로 자리하고 있어 더 서글펐다. 향에 불을 붙이고 잔을 올리는 사람들을 보면서 유진의 곁을 지켰다. 녀석은 예전에 소란의 빈소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아무 말 없이 쭈그리고 앉아 영정만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이고....아이고....."

ROSE 아가씨들이 곡하며 퍽 많은 눈물을 흘렸다. 태근이 형도 가끔 아주 벌게진 자기 눈을 비비며 애써 바쁜 척했다. 어떻게 연락이 닿았는지 모르겠지만 제법 많은 사람이 오고 갔다. 개중에는 유진의 담임인 지애나 유진이와 같은 반 친구인 녀석들, ROSE의 거래처 사람들처럼 내가 아는 사람도 제법 있었지만 전혀 모르는 사람도 꽤 있었다. 빈소 입구를 채우고 있는 조화에 달린 단체나 조직의 이름을 보아도 모르는 것 투성이다. 대체 유미는 어떤 인간관계를 얼마나 맺고 있었는지 모를 여자다.

선영은 오지 않았다. 지나에게 물었더니 그쪽으로 편지는 보내놓았다고 했다. 전화 연락처는 알지 못한다. 나는 지나에게 편지보다는 사람을 보내 직접 전달하라고 일러두었다. 내가 알기로 그녀가 지내는 곳은 산속에 있어서 우체부도 일주일에 한 번 들어갈까 말까한 곳이었다. 발인 전에는 선영이 여기에 왔으면 싶었다. 유진에게는 위로가 필요했다. 원래 상주는 유진이었지만 실질적인 상주 노릇은 나와 태근이 형이 나눠 맡아 하고 있었다. 그와 내가 나란히 서서 영정 앞에서 찾아오는 손님들을 맞이했다. ROSE 아가씨들이 나는 몰라도 저 사람은 왜 저러고 있냐고 형을 가리키며 내게 묻기에 그냥 그런 게 있다고 둘러대었다. 하긴 이상하기도 할 테다. 속으로 생각했다. 언제고 유진이에게도 제대로 말해두어야겠다고....

하루가 지나고 또다시 찾아온 밤이 깊어간다. 이틀째의 자정이 넘어가자 손님이 뜸해졌다. 내일이면 발인이다. 선영에게 보낸 사람은 아직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유진에게 내 옷을 덮어준다. 음식이나 술이 모자라지는 않은지 선미를 불러 점검하고 있는데 입구에서 잠시 소란이 일었다. 무슨 일인가 싶어 내다보니 검은 옷을 입은 일단의 무리가 들어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덩치도 커다랗고 험상궂게 생긴 것이 꼭 조폭 같았다. 무슨 일인가 싶어 바짝 긴장하고 있는데 그 무리 안에서 아는 얼굴이 나와 내 앞에 섰다. 하나도 아니고 둘이다.

"리사야.... 그리고..  마리야...."

몇 달 전, 결코 좋게 끝났다고 말할 수 없는 사이의 여자가 한꺼번에 둘이나 나타나니 난 당황하고 말았다. 그녀들의 뒤에 버티고 서 있는 예린의 선글라스가 유난히 번뜩인다. 쌍둥이 자매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영정 앞으로 가서 향을 올리고 절을 했다. 서둘러 상주 자리로 가서 맞절을 하고 일어나 그들의 인사를 받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똑같은 목소리, 똑같은 톤이 동시에 들리니 조금 이상했다.

"먼 길... 찾아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써 감정을 억누르고 대답한다. 날 바라보는 리사의 표정이 기묘했다. 걱정과 안도, 한숨과 감탄이 반반씩 섞인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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