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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사....내줄까?"
"아뇨. 저희는 상경하면서 다 같이 먹고 왔어요."
서 있기도 뭐하고 해서 리사와 마리, 그리고 내가 한 상을 두고 자리에 앉았다. 예린은 검은 정장의 남자들을 데리고 밖으로 나갔다. 꽉 차있던 빈소가 조금 헐거워진다.
"많이 걱정했어요. 게다가 처음 속보에는 오빠가 사망자 명단에..."
"아, 그거... 그래... 사실은.... 내가 갔어야 하는 건데..."
"오빠!"
한숨 쉬는 날 책망하듯 말하는 리사의 말투에서, 그녀가 여전히 날 걱정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걸 느꼈다. 착잡한 표정의 마리 역시 말은 없었지만 표정만으로도 리사와 똑같은 마음을 내게 보내고 있었다. 리사는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가신 분은 안되었지만, 그래도 오빠가... 아무 일 없다는 게 저희는 정말...."
"그래. 고마워. 이렇게 멀리까지 와주고..."
선미가 내어온 맥주를 따서 리사와 마리에게 따라주었다. 잔을 손에 쥔 마리가 뜨문뜨문 말했다.
"처음에는 언니가 그 보고 한번 까무러쳤다가..... 괌에 확인하러 가겠다꼬 방방 뜨는 걸 뜯어말리느라 고생했심더...... 나중에 지가 알아봐가 서울에 효진 언니야랑 연락이 닿아가꼬....."
리사는 부끄럽다는 듯이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가슴이 짠했다. 마리가 전하는 리사의 반응도 그렇고 효진에게 연락했다는 마리의 행동도.... 참 미안하고 미안했다. 난 그녀들에게 실망만 주고 그렇게 놓아버렸는데도 그녀들은 여전히 날 붙잡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 마음에는 더 이상 보답할 수 없다.
"오빠는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에요? 지금 하시는 일이.... 그거라고 들었는데요."
ROSE 아가씨들은 날 사장님이라 불렀다. 빈소 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말투를 들어보아 리사는 내가 하고 있는 일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녀에게 내가 하는 일이 무언지 단 한 번도 이야기한 적이 없는데도, 어쩐지 그녀가 내 일을 알고 있는 게 이상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무척 자연스러웠다. 여태까지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을 털어놓는다.
"계속... 할 생각이야."
"오빠, 오빠는 학생이잖아요. 그리고 그 일은... 결코 깨끗한 일만은 아니라는 거, 아시잖아요."
리사의 말투에서 어떤 경험 같은 게 묻어났다. 예전에 그녀가 했던 말이나 행동들을 조심스럽게 떠올려 본다. 지금의 말에 담긴 의미를 생각한다. 그러고 나니 그녀 역시 결코 양지에서 일하는 사람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대답을 하지 않자 그녀의 원망어린 목소리는 이어졌다.
"그런데도, 계속... 하시겠다구요? 정말로요?"
대답 대신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유진이가 기대앉아 있는 곳을 쳐다보았다. 내 시선이 머무르는 곳을 눈치챈 리사는 침묵했다. 그녀의 침묵은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난 다시 고개를 돌려 리사와 마리를 보며 말했다.
"미안....정말....미안하다. 난 저 아이를 저대로 둘 수 없어."
"....."
"어떤 흑심이 있다거나... 그 가게를 어떻게 하겠다는 생각이 있는 건 아냐. 값싼 동정이나 연민도 아냐. 그저 내가 지금 있는 곳에서, 내 손에 닿는 곳에 한 아이가 있는데.... 그 아이의 손을 놓을 수가 없어. 당분간은 학교도 쉴 생각이야. 자리가 잡힐 때까지는...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할 생각이다."
이것이 내 대답이다.
"결국 오빠는....마음을 그렇게 정하신 건가요?"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묻는 마음이 뭘 뜻하는지 모르지 않았다. 마음은 아팠지만 애써 힘주어 답한다.
"그래."
내 대답에, 마리는 울었다. 리사 역시 눈가가 빨개졌지만 이내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손가방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명함이었다. 그녀는 다소 딱딱한 목소리로 말했다.
"뭔가 어려운 일이 있거나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주세요. 조만간, 서울 사무소도 개설할 계획이니까요."
아주 예전에 예린에게서 받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명함이었다. "경남산업개발"이라고 찍힌 상호명 아래 "실장 김리사"이라고 적혀있었다. 이전까지 그녀는 자신이 무얼 하는지 내게 감추고 싶어 했지만 이제는 그러지 않는다. 이런 명함을 건넨다는 게 그녀와 나 사이에 놓인 어떤 관계를 단절하겠다는 의지인 동시에 또 다른 관계를 만들겠다는 신호로 보였다.
"그럼, 저희는 길이 멀어 먼저 일어나겠어요. 다음에... 다시 뵐게요."
"그래. 정말... 고마워."
"뭘요."
리사와 악수를 나누었다. 작고 가느다란 손 자체에 담긴 악력이 그리 크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 손 아래 움직일 사람들을 떠올린다. 마리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녀석은 유진이에게 전해 달라며 작은 뭉치 하나를 남겼다.
"나오진 마세요. 자리 지키셔야죠."
리사의 만류에 문가에서 그들을 배웅했다. 그들이 나가고 문이 닫히기 직전, 날카로운 눈빛을 한 남정네들이 이쪽을 쏘아보고 있는 걸 보며 잠시 서늘한 기분이 들었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았다. 자리로 돌아가던 난, 손에 들린 뭉치를 바라보았다. 살짝 펴본다. 종이에 감춰진 그것은 아주 작은 허브 화분이었다. 계란만한 크기의 화분에 이제 갓 싹을 틔운 푸른 식물이 심어져 있다. 화분 겉면에 이런 이름표가 붙어있었다. "Rosemary"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잘 감싸 유진의 곁으로 갔다. 녀석의 옆에 내려다놓고 다시 일어나려는데 어쩐지 이 녀석... 자고 있지 않은 것 같다. 살짝 볼을 찔러본다. 그리고 살짝 엄포를 놓듯 말했다.
"......안 자는 거 보인다."
그러자 녀석이 긴 속눈썹을 파르르 떨며 가만히 눈을 떴다. 다소 부끄러워하는 기색이 엿보인다. 아까 내가 앉아서 리사와 대화를 나누던 곳까지는 불과 3미터도 되지 않았다. 표정을 보아하니 아까의 대화를 다 듣고 있었던 모양이다.
"들었어?"
고개가 끄덕끄덕.
"그래. 니가 들은 대로 ROSE나 유진이 너, 둘 다 내가 제대로 관리해야지 어쩌겠니. 하나는 물가에 내놓은 애고, 또 다른 하나는 물에 떠내려 가게 될 지경인데...."
유진이가 여전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날 빤히 쳐다보았다. 여태 인형처럼 무표정하던 녀석의 얼굴에 모처럼 화색이 돈다. 조금 골려주고 싶은 마음에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직 장가도 못 갔는데 이런 혹이 들러붙다니... 어쩌면 좋냐. 히유우...."
과장되게 한숨을 지으며 말하자 유진이가 손을 들어 자기 자신을 가리킨다. 그게 무슨 뜻인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한다.
"그래도 젊은 사장님이니까 아가씨들은 좋아하더라. 은근히 나한테 몸으로 어택도 하고..."
이런 말까지 하자 이번에는 유진이가 내 손을 들어 자기 입으로 가져갈 자세를 취한다. 얼른 손을 빼내고 대신 마리의 선물을 녀석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 녀석 딴에 널 생각해서 가져온 건가 봐. 집에서 두고 잘 키워."
유진이 그걸 받아들었다. 열어보더니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다. 녀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고 있자니 선미가 내게 다가와 말했다.
"효진 아가씨가 오셨는데요."
"아, 그래요?"
일본에 있다던 녀석까지 돌아오다니... 하긴 녀석도 유미를 새엄마로 맞이했던 녀석이니 아예 관계가 없는 건 아니었다. 유진을 두고 일어나 문가로 갔다. 검은 정장 차림의 효진이 들어와 내게 고개를 꾸벅했다. 녀석은 이미 형에게 전해 들었는지 호칭을 꺼낼 때 퍽 조심스럽게 말하는 눈치였다.
"유....진이 어머님, 나이도 젊으신데 안타깝게 되었구나."
"그렇지, 뭐. 먼데서 와줘서 고마워."
"아냐, 내가 뭘. 당연히... 왔어야지."
효진은 혼자 오지 않았다. 그녀의 등 뒤에는 하영도 있었다. 어쩐지 그녀의 표정이 퍽 복잡해 보였다. 그녀는 내게 물었다.
"당신이... 어째서 상주 역할을 하고 있죠?"
"유미 씨와 같이 일하고 있기도 했구요, 유진이와 아예 모르는 사이도 아니라서..."
"그렇다고 그렇게까지...?"
"유진이가 지금 많이 안 좋습니다. 충격으로 실어증 증세를 보이고 있어요. 그래서 제가 맡았습니다. 그런데 그건 왜요?"
전후 설명을 들은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고 있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습니다."
무언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표정이었지만 입을 다물었다. 왜 그러냐고 물어보려는데, 효진이 내게 다가와 물었다.
"저기, 말이야. 한석 군."
"응? 왜?"
"우리... 아버지도 같이 오셨거든. 조문하고 싶으시다고."
"아....."
효진의 아버지라. 그렇다면 태근이 형의 아버지인 동시에 유미의 전 남편이 된다. 묘한 기분이 들었다. 나도 모르게 유진을 돌아본다. 유진이는 손에 들린 미니 화분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느라 이쪽은 신경을 안 쓰고 있었다. 효진에게 말했다.
"그래.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인사할 수 있도록 해드려."
"알았어."
효진은 내 허락을 받고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잠시 후, 40대 후반 정도로 되어 보이는 한 아저씨가 효진과 함께 들어왔다. 효진과 태근이 형의 아버지라면 적어도 50대에서 60대 정도 일 거라고 생각했는데 관리를 잘 받아서 그런지 최소 얼굴만 놓고 본다면 40대 초중반이라 해도 믿을 수 있을 정도였다. 게다가 꽤 미남이었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살짝 주름진 눈매나 뚜렷한 이목구비에서 뿜어지는 중후한 매력이 있었다. 젊었을 때, 그러니까 유미와 함께 있던 시절에는 더 잘 생겼을 것 같다. 빈소에 들어선 그에게 인사했다.
"어서 오십시오. 박 회장님."
그의 이름은 알지 못하지만 그를 부르는 호칭은 이미 한번 들었기에 알고 있다. 그는 날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부담스러울 정도였다.
"자네, 인가?"
"네?"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날 매우 잘 안다는 듯이 쳐다보았다. 왜 그러냐고 싶어 물어보려고 하는데 무언가 퍽- 하는 소리와 함께 그의 발밑이 무언가로 더럽혀진다. 뭔가 싶어 돌아보니 아까 마리가 유진이에게 주었던 미니 화분이 깨어져 바닥에 파편으로 굴러다니고 있었다. 담겨 있던 흙은 사방으로 퍼져있었다. 유진이가 집어 던진 건가? 깜짝 놀란 내가 돌아보자 거기에는 새하얗게 질린 표정의 유진이가 서 있었다. 녀석은 손을 들어 더듬거리는 말로 외쳤다.
"다...당신이....여길....대체...왜....."
녀석의 손가락이 가리키는 사람은 명백했다. 유진이 가리킨 사람은 다름 아닌 박 회장이었다. 주변 사람들 모두가 난데없는 소동에 깜짝 놀라 이쪽을 주목한다. 유진이가 박 회장을 지목한 것도 지목한 것이지만 지난 며칠 동안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찾았다는 사실에 난 더욱 놀랐다. 유진이에게 다가가 묻는다.
"왜 그래? 유진아, 이 분은 말이야....."
"나...난...기억....."
감정이 격해지는 듯, 유진은 울먹이며 말을 채 잇지 못했다. 그런 유진을 빤히 쳐다보던 박 회장은 이내 몸을 돌려 영정 앞으로 갔다. 향은 올리지만 절은 하지 않았다. 그저 앞에 무릎 꿇고 앉아 한참을 유미의 얼굴만 바라볼뿐이었다. 그리고 그는 금방 몸을 일으켜 이쪽으로 돌아와 유진이와 마주했다.
"네가 유진이구나."
그의 말투는 비교적 온화했지만 그렇다고 막 애틋하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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