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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딸을 대하는 태도라고 보기에는 사뭇 이상했다. 그러는 동안 숨을 제대로 들이켠 유진이가 이를 악물고 외친다.
"당신은... 당신은.... 날 거부...했잖아! 그런데 무슨 낯으로 여길..."
흥분한 유진과 달리 박 회장의 말투는 평온하기 이를 데 없었다.
"거부했다니. 언제 그랬지?"
"엄마가... 엄마가 당신에게 날 안아보라고 했지만, 당신은 안지 않겠다고 했어. 그렇지?"
그러자 박 회장의 얼굴에 놀라운 빛이 스쳤다. 그는 혀를 차며 말했다.
"미자의 말이 사실이었군. 설마 그때의 일을, 넌 다 기억하고 있단 말이니?"
"그래! 엄마가 당신을 위해 차렸던 밥상도! 당신이 입고 온 옷도! 그리고 당신이 엄마에게 한 말도! 그리고 엄마가 당신에게 뭘 부탁했는지도 말이야!"
유진의 목소리는 조금 갈라져 있긴 하지만 결국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모두 쏟아내었다. 악에 받친 유진의 태도와는 달리 박 회장의 얼굴은 오히려 더 흥미롭다는 표정이었다.
"그래. 미자는 나에게 너가 이제 갓 두 돌이 되었다면서 한번 안아봐 달라고 했었지. 하지만 난 안지 않았어. 내가 왜 안지 않았는지, 넌 그것도 기억하고 있는 거니?"
"내가 당신 딸이 아니라면서. 그래서 안지 않겠다고 했잖아."
박 회장의 눈썹 한쪽이 치켜 올라갔다.
"굉장하군. 설마 미자가 네게 나중에 따로 이야기해 준 건가?"
유진이가 악을 쓴다.
"엄마가 그럴 리가 없잖아!"
그러자 박 회장은 허탈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래, 그녀 성격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한 사람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저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난 입을 딱 벌렸다. 유진이의 천부적인 기억력에 대해서는 이미 들어알고 있었지만 이런 식으로 재차 확인받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 회장의 태도로 보아 지금 유진이가 하는 말은 모두 정말 있었던 일인 모양이었고 게다가 그 일은 녀석이 만 두 살때의 일인 모양이었다. 그걸 정말 기억하는 거냐!!
더군다나 박 회장은 엄청나게 터무니없는 이야기를 아주 아무렇지 않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직접 관련이 있다고 할 수 있는 태근이 형이나 효진이는 물론 하영을 비롯한 제삼자들까지 얼굴이 흙빛으로 물드는 걸 보아 이 대화는 지금 결코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차분하게 말하는 사람은 오직 박 회장뿐이었다.
"넌 내 딸이 아니지만, 그래도 미자가 한때 내 부인이었단 사실은 변하지 않아. 그래서 난 조문을 하려고 왔다. 그걸 네가 막을 이유는 없을 것 같은데?"
어찌 들으면 그의 말투는 유진이와 조금 비슷했다. 자기 할 말은 아주 얄밉게 따박따박 하면서도 상대의 반박은 허용하지 않는다. 말문이 막힌 유진이가 토해내듯 간신히 말했다.
"나...난, 당신이 싫어."
그렇지만 박 회장은 그런 유진이의 반응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보였다.
"그렇구나. 네게 이름을 지어준 사람이 나인데도, 그래도 싫단 말이냐?"
"당신 딸도 아니라면서!"
"내 딸은 아니지만, 내 여자의 딸이었지.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싫어! 싫다구!"
악을 쓰는 유진의 어깨를 당겨 내 품 안에 넣는다. 내 배에 얼굴을 파묻은 유진은 그제야 밸브가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펑펑 울기 시작했다. 내 셔츠를 적시며 우는 유진의 등을 토닥인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회장은 내게 눈인사를 보내고 몸을 돌려 빈소를 나갔다. 태근이 형과 효진, 하영과 선미가 그를 따라 나갔다. ROSE 아가씨들 몇 명이 이쪽으로 다가와 우리를 감싸고 유진을 위로했다.
한참을, 정말이지 아주 한참을 서럽게 울던 유진은 결국 몹시 지쳐 그대로 잠이 들었다. 지난 며칠 동안 흘렸어야 할 눈물을 지금에서야 비로소 다 흘린 것 같다. 빈소 옆에 자리한 작은 방에 녀석을 눕혀 재웠다. 누워있는 녀석의 곁에 앉아 어깨를 토닥이면서 생각했다. 아주 예전에 그런 일이 있었다. 과외를 가던 길에 로드킬 당한 강아지 한 마리를 발견하고 그걸 들고 아파트로 들어가 화단에 묻어주었다. 그 바람에 피와 흙범벅이 된 채로 과외를 하러 갔더니 유진은 내게 샤워를 시키고 옷을 내주었다. 그러면서 그런 말을 했었다.
- 내가 죽으면 그 사람이 날 안아줄까요?
그때는 그게 뭔 뜬금없는 소리인가 싶었는데 이제서야 유진이가 말한 그 사람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유진은 그 말도 안 되는 탁월한 기억력을 통해 자신의 아버지, 아, 아니구나. 엄밀히 말하자면 자기 엄마의 남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에 대해 원망을 가지고 있었다. 자기 딸이 아니라고 자신을 안아주지 않았던 그에 대한 미움을 간직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건 순전히 내 생각인데, 아마도 유진이는.... 그런 아픔과 상처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을 안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남들은 다 가지고 있는 아버지가 없는 자신에 대해서 많은 고민을 하고 생각을 거듭했겠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난 그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 나 역시 그러했으니까.... 그런데 이렇게 황망하게 자신의 엄마가 떠나고 없는 지금, 그를 보게 되자 그런 복잡한 마음이 폭발한 모양이다. 눈물 자국이 선명한 녀석의 얼굴이 못내 안쓰러웠다. 아무리 똑똑해도 결국 아이는 아이였고, 누구보다 아픈 상처를 깊이 감추고 있던 아이였다.
그나저나 유진의 생부가 박 회장이 아니라니, 그러면 또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여차하면 유진이에게 태근이 형이나 효진의 존재를 알려, 네가 결코 세상에 혼자 있지 않고.. 네 오빠와 언니가, 그리고 아버지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으아아아아. 유미는 대체 뭘 어떻게 한 거야. 결혼은 박 회장과 하고 아이는 다른 사람과 가졌다? 대체 어떤 놈이랑? 게다가 결혼 중에? 그러면 간통이고 불륜이잖아!! 그녀의 사고방식은 정말이지 내가 천 년을 살아도 이해 불능이다. 하아. 머리가 터질 것 같다. 물론, 내가 천 년을 살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잠들었어?"
쪽방의 입구에 태근이 형이 나타났다. 회장을 배웅하고 돌아오는 모양이었다. 그는 내 옆에 와 앉아 유진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표정도 몹시 복잡해 보였다. 그는 한참이나 망설이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아버지가 하신 말씀은... 나도 처음 듣는다. 미자 누나를 그렇게 다시 만나고 나서 당연히 이 아이가 내 동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왜요? 귀여운 동생 생겼다가 없어져서 서운해요? 하긴... 효진이가 귀여운 것과는 거리가 제법 있는 여동생이긴 하죠."
자못 농을 섞어 말하자 그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우리 아버지 딸이 아니라고 해도, 난 얘가 내 동생이라고 생각하련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미자 누나의 딸인데, 내가 모른 척할 수 있나. 앞으로 이 아이가 살아가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줄 생각이야."
그의 마음 씀씀이가 퍽 고마웠다. 그 발단이 자신의 첫사랑에 대한 것이라고는 해도... 이제 아무도 없는 유진에게는 큰 도움이 되어줄 것 같다.
"고마운 말씀이에요. 근데 형만큼은 아니지만... 얘도 먹고살 정도는 가지고 있어요. 유미가 준비를 많이 했거든요."
"그래? 네가 사장이 되었다는 그 가게 말이야?"
"그것도 그거고... 뭐, 다른 거 이것저것이요."
"그거야 네가 알아서 할 문제고... 하아. 이래저래 머릿속이 복잡하구나."
"나도 그래요."
형과 나는 발인 절차에 대해 이것저것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일어나려고 하자 그는 유진이가 깨지 않도록 곁을 지켜주라고 당부하고는 자신이 나갔다. 선미를 불러 이것저것 지시하는 걸 듣자하니 빈소에서의 마무리와 발인 과정에서의 일에 대해 빈틈없이 준비하는 모양이었다. 그의 목소리를 듣다가 나도 꾸벅꾸벅거리며 까무룩 잠이 들었다. 꿈을 꿨다. 무슨 꿈인지 내용은 기억이 나질 않지만, 아무튼 어떤 꿈을 꾸었다. 어떤 느낌에 눈을 떴다. 그러자 나와 나란히 누워 얼굴을 마주하고 있던 유진이가 화들짝 놀라며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녀석의 긴 속눈썹이 내 코앞에 있었다.
"깼어요?"
낮은 목소리. 녀석은 지금 내 품에 거의 안긴 채로 있었다. 자면서 무심결에 녀석을 끌어안은 모양이다. 하반신이 너무 그쪽으로 붙지 않도록 엉덩이를 조금 뒤로 당겼다.
"응. 일어나야지. 발인을 새벽에 하니까."
"발인?"
"응."
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전에 소란이 때도 궁금했는데.... 발인....그게 무슨 뜻이에요?"
"발인?"
막상 질문을 받으니 생각이 바로 나질 않았다. 한참 망설이던 나는 예전에, 삼촌들에게 혹은 아는 어른들에게 들었던 기억을 더듬어 본다. 그것들을 조합하여 들려준다.
"사람이 살아있을 때는 집에 살잖아. 그리고 죽으면 땅에 묻히고. 그런데 우리네 풍습에서는 죽었다고 바로 땅에 묻지 않아. 죽은 사람이긴 하지만 그래도 그가 살던 집에서 며칠 더 머물게 해줘. 그 사이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찾아오라고 말이야. 그게 삼일장이니 오일장이니 하는 거야."
"여긴 우리 집이 아닌 걸요?"
물론 여긴 유진의 집이 아니라 장례식장이긴 하지.
"그야... 사회가 복잡해지고 이런 일을 맡아서 하는 곳이 생겨서 그런 거고, 이전에는 다 집에서 치렀어. 내가 살던 시골도 그렇고... 아무튼 그렇게 죽은 사람이라도 원래 살던 집에서 며칠 더 머물게 해주다가, 이제는 정말 땅에 묻히러 가야 하거든. 죽은 사람과 산 사람은 원래 같이 살 수 없으니까. 그러니 그 죽은 사람이... 자기가 원래 살던 집을 떠나는 절차가, 그게 발인이야. 정확한 한자 뜻이나 단어 유래는 나도 잘 모르겠는데, 어렸을 때 어른들한테 그렇게 들었어."
제대로 설명을 했나 모르겠다. 어쩐지 횡설수설한 느낌이다. 고개를 푹 숙인 채 내게 정수리를 보이고 있는 녀석은 내 이야기를 듣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다음 순간, 녀석이 중얼거리는 말을 들으며 내 이야기를 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죽은 사람과... 산 사람...."
자신의 엄마를 생각하고 있는 걸까.
"둘은 같이 살 수 없다는 거죠?"
"그래."
녀석이 고개를 들었다. 어젯밤 하도 울어서 퉁퉁 부은 눈가에 다시 이슬이 맺혀 있었다. 녀석이 몹시 주저하며 말했다.
"그럼, 산 사람 들끼리는요?"
"같이 살 수 있냐고?"
"........네."
무얼 말하고 있는지, 모르지 않는다. 어쩐지 마음이 안타까워 녀석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주었다.
"살아있으니까, 살아있는 동안은 함께 할 수 있어."
"아저씨는 빨리 안 죽을 거죠?"
내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그래. 약속할게."
유진이 팔을 꼼지락거리더니 손을 들어 새끼손가락을 내보인다.
"약속해줘요."
그 작고 가녀린 손가락을 쳐다보다가 고개를 저었다. 유진의 얼굴에 실망의 빛이 스쳐 지나갔다.
"약속한다면서요..."
"그것보다 더 확실한 약속이 있어."
이미 유진은 내 품 안에 있었기에 녀석의 머리를 당겨 입을 맞추는 게 어렵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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