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40 / 0471 ----------------------------------------------
Main Route
우리는 서울로 돌아왔다. 아파트에 도착하니 의외의 인물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우릴 보자마자 잡아먹을 듯이 소리 질렀다.
"어딜 그렇게 연락도 없이 돌아다니는 거죠?"
아따.. 귀 떨어지는 줄 알았네. 그녀의 얼굴에 얹어진 금속 재질의 안경테가 주는 차가운 느낌처럼, 말투도 차갑기 그지없는 강철의 여인. 손하영이었다. 설마 우리를 기다린 건가 싶었다. 대체 언제 올 줄 알고 기다린 걸까. 그녀는 차에서 내려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전방 5미터에 멈춰선 그녀는 나와 유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우리 둘이 맞잡고 있는 손을 한참이나 쳐다본다. 그 눈빛이 마치 나와 유진이 사이를 꿰뚫어보는 것 같아 조금 찔렸다. 유진을 살짝 당겨 내 뒤로 오게 하고는 그녀에게 따져 물었다.
"제가 하영 씨에게 행선지를 보고 하면서 다녀야 되는 사람인 줄은 몰랐는데요."
갑자기 큰 소리를 들어 당황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그녀에게 꿀린 건 없었다. 이렇게 강하게 이야기한 탓일까. 하영은 다소 주춤하며 말했다.
"그건 그렇지만.... 회장님이 당신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계속 기다렸어요. 이제나저제나 하고..."
회장? 박 회장을 말하는 건가. 회장이라는 말에 내 손 안에 있는 유진이의 손이 살짝 경직되는 게 느껴졌다. 이 아이에게 그의 이름은 어떤 느낌일까. 자신의 아버지는 아니지만, 엄마의 남편이었던 사람이다. 계속 만나고 싶어 하면서도 만나지 못했고, 보고 싶으면서도 미워하던 사람이다. 그런 사람의 이야기를 이제 이 아이는 피하지 못할 것이다. 유진이가 날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 사람.... 보러 갈 건가요?"
아마도 박 회장을 말하는 것이겠지.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유진은 손을 놓았다. 순순히 먼저 집으로 돌아가 있겠다고 했다. 나한테서 떨어지지 않겠다고 고집을 피울 줄 알았는데 의외였다. 아무래도 박 회장을 보러 가는 일은 녀석에게 아직 무리인 모양이다. 유진을 집에 들여보내고 짐을 내려놓았다. 유진이에게 금방 다녀오겠노라고 말한 뒤, 집을 나섰다. 문을 닫기 전 한번 돌아보았다. 퀭한 거실에 녀석을 혼자 두고 가는 게 못내 마음에 안 들었지만, 유진은 그래도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밖으로 나와 하영의 차에 올라탄 다음 휴대폰을 빌렸다. 태근이 형에게 연락하여 서울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ROSE를 맡기고 떠난 태근이 형에게는 보고해야지 싶었다. 형은 내 목소리를 듣고 꽤 반가워하며 ROSE와 그 식구들 모두 잘 있다고 했다. 그는 내게 유진의 안부를 물었다. 그럭저럭 잘 다녀왔다고 하자 그는 다행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한마디 덧붙였다.
"안 그래도 우리 아버지가 너 찾는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들었습니다. 여기 하영 씨가 와 있네요."
"하영이가 직접? 아버지가 널 굉장히 찾는 모양이구나."
"그런가요?"
하영에게 도움을 몇 번 받기는 했지만 그녀에 대해서는 잘 몰랐다. 그러나 형이 살짝 놀라는 걸로 보아 그녀가 직접 날 찾으러 왔다는 건 좀 다른 의미인 것 같았다. 그는 더 이상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하영은 날 보며 말했다.
"더 전화할 곳은 없나요?"
"더요?"
"네. 서울에 당신이 도착했다고... 알려야 할 사람은 더 없냐고요."
전화 오래 썼다고 나무라는 걸까. 난 고개를 저으며 그녀에게 휴대폰을 돌려주었다.
"아뇨. 없어요."
하영은 휴대폰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이고 품 안에 갈무리했다.
"출발하겠습니다."
하영이 모는 차는 시내로 향했다. 고층빌딩이 주욱 늘어선 시내 중심가. 그중에서도 아주 높고 커다란 빌딩의 앞에 도착했다. 빌딩 입구에 서 있던 남자들 서넛이 달려와 문을 열고 하영에게 키를 받아간다. 하영에게 깍듯이 대하는 걸 보고 있노라니 이 여자의 위치가 여간한 게 아니라는 게 짐작이 갔다.
"이쪽으로 오시죠."
그녀의 안내를 받아 빌딩 안으로 들어섰다. 사람들이 가득한 로비를 지나는데, 어지간한 사람은 전부 하영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고 있었다. 내게 보내는 인사는 아니었지만 그녀의 뒤를 따라가다 보니 엉겁결에 인사를 받는 셈이 되어서 좀 쑥스러웠다. 로비 제일 안쪽에 있는 문을 지나니 커다란 엘리베이터가 나타났다. 문을 열고 들어와야 나타나는 엘리베이터라니... 전용 엘리베이터쯤 되는 건가 생각하며 커다란 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때 하영이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었다.
"전용 엘리베이터입니다. 앞으로 회장님을 접견하실 때는 이쪽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아무래도 난 무슨 병에 걸린 모양이다. 마음속 생각이 밖으로 드러나는 병 같은 거. 어째 내 주변의 사람들은 하나같이 내가 말을 꺼내기도 전에 할 말을 다 눈치채버리는 걸까. 진짜 이마에 모니터라도 있어서 속마음이 디스플레이 되는 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 동안 하영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저희 JS 그룹은 회장님이 직접 일구어낸 정석물류를 전신으로 하여, 각종 부동산과 동산을 취급하고, 기업 간의 인수합병이나 매각, 매입 등을 주된 업무로 삼고 있는 투자자문회사입니다. 법률지원을 위한 법무법인과 교육 사업을 위한 재단, 사회복지사업을 위한 종교법인 등도 별도 법인으로 세워 후원의 형태로 100% 출자하고 있습니다."
하영은 이 밖에도 연간 매출액의 규모나 종업원의 수, 작년과 올해의 주된 프로젝트 등을 줄줄이 읊었다. 태근이 형이나 효진이가 하고 다니는 꼴을 보면 전혀 상상이 안 되는 대규모의 회사임에 틀림없다. 그녀의 이야기를 듣다 보니 자연스럽게 드는 의문은 단 하나였다.
"근데 그 이야기를 저한테 왜 하시는 거죠?"
내가 이런 질문을 하자 그녀는 내 얼굴을 쳐다보았다. 남이 묻는 거에 대답은 안 하고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걸까.
그 순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엘리베이터에 탔다. 하영은 문 쪽에 섰고, 나는 그녀의 뒤, 엘리베이터 좀 더 안쪽에 섰다. 거울은 아니지만 그만큼 잘 닦인 금속재질의 면은 그녀의 앞모습을 비추어 주고 있었다. 여전히 딱딱하고, 재미없는 표정의 여자다. 그녀에게서 시선을 거두어 엘리베이터 안쪽을 둘러보기 시작했다. 고급 엘리베이터란 이런 걸까. 대개의 엘리베이터는 스테인레스 재질의 은빛이 대부분인데 여긴 금빛으로 되어있다. 설마 진짜 금은 아니겠지? 문이 닫히고, 올라가기 시작하자 그녀가 말했다.
"이제야 인사를 합니다. 오랜만이군요. 최한석 씨."
보자마자 인사는 고사하고 땍땍거리며 따지기만 하시던 분이, 참 빠른 인사를 하신다.
"그러게요. 유미 장례식 이후론 처음인가요?"
그때 나에게 여기서 왜 상주 노릇을 하고 있냐고 따져 묻던 그녀의 말이 생각났다.
"아마도요. 어디를 그렇게 다닌 건가요."
"완전히는 아니지만... 얼추 백두대간 종주 비슷하게 하고 왔습니다."
"그 아이와, 단둘이서요?"
그 아이라.. 유진을 말하는 거겠지? 이미 그녀가 보았으니 감출 것도 없었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렇습니다."
"둘이 무슨 사...."
그녀가 더 묻기 전에,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띵- 하는 소리에 그녀의 말이 묻혔다.
"뭐라고 하셨죠?"
"아니오. 아무것도 아닙니다."
문이 열리고, 하영은 날 한 번 돌아본 다음 다시 앞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자 작은 로비가 있었다. 작은 데스크가 하나 놓여 있었다. 그 너머에는 마흔은 족히 넘어 보이는 여자가 한 명 앉아있었다.
"언니, 이분이 최한석 씨입니다."
하영은 그녀에게 날 소개시켰다. 엉겁결에 고개를 숙였다. 중년의 여인은 몹시 인자한 표정으로 나와 하영을 번갈아 보았다.
"어서 들어가 봐요. 회장님이 많이 기다리셨어."
하영은 가볍게 고개를 숙이고 그녀를 지나쳐 안쪽에 있는 문을 향해 갔다. 내가 봤던 하영은 거의 모든 사람에게 차갑게 구는데, 조금 전 여자에게만은 예외인 모양이었다. 방금 언니라고 부른 호칭은 꽤 살가운 말투였다. 안쪽 문에 다가가면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중년의 여인을 바라보았는데 그녀는 책상에 앉아 몇 가지 서류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옆에 있는 안경을 주워다 쓰고 고개를 삐딱하게 하는 걸로 보아 노안이 좀 있는 모양이다. 앉아있는 위치나 분위기를 보아 비서임에는 틀림없었는데.. 뭔가 이상했다. 뭐랄까. 대개 비서 같은 건 젊은 여자나 좀 빠릿빠릿한 사람을 쓰지 않나?
"하영입니다. 최한석 씨를 모셔왔습니다."
"들어와."
전에도 들은 적 있는 박 회장의 목소리. 하영이 문을 열어 따라 들어간다. 안쪽은 무척 넓었다. 테니스장 두 개 정도는 되어 보이는 넓이에 좌우와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있어 훨씬 더 넓어 보였다. 창을 통해 서울 시내의 모습이 한 눈에 들어온다. 흡사 높은 산에 올라 서울을 굽어 내려다보는 것 같은 기분이다. 저 멀리 커다랗고 육중한 책상이 있었고 그 너머에 박 회장이 앉아있었다. 하영은 부동자세로 서서 보고했다.
"방금 서울에 도착하는 대로 모셔왔습니다."
"그래, 수고했어. 자네는 물러가게."
하영은 박 회장에게 인사를 하고 방에서 나갔다. 내 등 뒤로 육중한 문이 닫히고, 이 넓은 공간에 박 회장과 나, 단둘이 남았다.
"안녕...하세요?"
무어라 말을 꺼내면 좋을지 몰라 한참을 망설이다가 일단 인사부터 해본다. 지난번 장례식장에서처럼 날 빤히 쳐다보던 박 회장은, 이내 빙그레 웃기 시작했다. 웃....어?
"그래. 안녕하다네. 그렇게 뻣뻣이 서 있으면 피곤하겠구만. 일단 앉지 그래."
"아? 네에..."
책상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커다랗고 푹신한 소파와 티테이블이 있었다. 박 회장은 상석에 털썩 앉았고, 난 그의 우편에 살짝 앉았다. 궁둥이를 대기가 무섭게 빨려 들어가듯 푹 들어가는 소파인지라 나도 모르게 다리에 힘을 주어 버텼다. 내 자세를 본 박 회장은 너털웃음을 흘렸다.
"그러지 말고, 편히 앉게. 이야기가 길어질 테니. 어때, 차 한 잔 하겠나?"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