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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42화 (14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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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참을 웃던 그는 다시 날 보며 말했다.

"그럼 자네가 확실히 맞겠군. 그래서 유진이도 자네에게 맡겼고..."

"맡기다뇨?"

"미자는, 아... 자꾸 헷갈리는군. 그래. 유미는 내게 그랬어. 자신이 살아가며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그중에서 가장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을 찾아 유진이를 맡기겠다고 했었지. 내가 보기에 그 사람이 바로 자네인 것 같군."

"미래가 불확실.... 확실한 게 아니고요? 그게 좋은 겁니까?"

사람은 누구나 불확실한 미래를 두려워한다. 직장 하나를 잡아도 안정된 직장에 있고 싶어 하지 다음날 당장 어떻게 될지 모르는 회사에 누가 지원하겠는가. 앞에 불- 이라는 접두어가 붙은 불확실. 이게 과연 좋은 의미일까 걱정되었다. 어감은 영 좋지 않다만 박 회장은 다르게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좋냐고? 그거야 나는 모르지. 난 유미와 같은 능력이 없으니 막연히 짐작해 볼 수밖에. 그렇지만 투자자들이 입버릇처럼 쓰는 말이 있는데 뭔지 아나. 바로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이지."

"하이 리스크... 하이 리턴...."

"그래. 우리말로 하면 고위험 고이득이랄까. 하지만 리스크란 단어를 단순히 위험이라고만 번역하는 건 우스운 일이야. 투자에 있어서 리스크란 일종의 기회나 모험이기도 하거든. 유미는 자신의 미래에 대한 투자로 자네를 선택한 거야. 가장 많은 리스크를 안고 있는 자네야말로 가장 큰 리턴, 즉, 이득을 가져다줄 거라 계산한 거지. 이해되나?"

박 회장의 설명은 거침이 없었고, 내가 알지 못하는 영역의 이야기가 마구 섞여 있었다. 속으로 여러 번 곱씹으며 간신히 이해한 척이라도 할 수 있었다. 그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그녀는 자신이 본 미래를 따라 행동하는 사람이기는 하지만 그런 동시에 자신의 미래가 고정되어 있는 걸 가장 싫어하는 사람이었어. 그것이 바뀌길 바라는 사람이었지. 하지만 미래를 알고 있는 자신이 그런 행동을 했다가는 더 나쁜 일이 벌어진다는 걸 체험한 사람이라네. 그런 그녀는 자네를 선택했고, 자신의 딸을 맡겼어. 안 그런가?"

딸을 맡겼다...라는 이야기에서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소 농장에서 받은 그녀의 편지, 미래를 향해 보낸 그 편지가 머릿속에서 저절로 떠올랐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 미래로 이렇게 편지를 보내는 건, 나도 처음 해보는 일이야. 그렇기에 이게 어떤 영향을 가져다 줄지 모르겠어.

편지를 적어 미래의 일을 약간이나마 알려주는 것도 그녀는 어떤 영향을 줄지 모른다고 했다.

"나와 같은 투자자는 불확실성을 가장 싫어하기는 하지만 그런 동시에 불확실성이 클수록 돈 벌기 쉽다는 걸 몸으로 느끼고 있다네. 내가 하는 일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바로 그거네. 자네는 자신이 대단치 않은 사람이라 말하겠지만, 그래도 자네는 미래를 볼 줄 아는 여자가 자신의 딸을 맡긴 사람이야."

백 번 미루어 생각해서 유미의 선택을 이해했다고 한들 박 회장의 선택을 바로 이해하기는 어려웠다.

"그렇다고 회장님... 생판 모르는 사람인 저에게 이런 큰일을...."

그러자 그가 날 빤히 쳐다보았다. 그 시선은 뭐랄까. 정말 꿰뚫어보는 것 같은 눈이다. 나이는 먹었지만, 그의 눈빛만큼은 여느 젊은이 못지 않았다.

"생판 모르는 사람? 그래. 자네는 나를 전혀 모르겠지만 난 아냐."

"네? 무슨 말씀이시죠?"

"갈라선 이후에도 유미 주변을 항상 보고 있었네. 그녀도 그걸 알고 있었겠지만 내색은 하지 않았어. 그러다 유미가 자네를 유진이 과외선생으로 붙였을 때부터... 난 자네를 주목하고 있었네. 그리고 자네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련의 사건들을 흥미롭게 지켜보고 있었지. 아.. 특별히 나쁜 생각이 있어서 그런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지금이나마 양해를 구함세."

그는 나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나이도 나보다 많고 명색이 회장이라는 사람이 먼저 이렇게 나오니 딱히 뭐라 하기도 힘들었다. 다만 중얼거리듯이 항의할 따름이다.

"그런 식의.. 사찰은... 불법입니다."

"알고 있어. 하지만 내가 하는 일은 거의 다 불법과 합법의 촘촘한 경계에 놓여있는 일이 대부분이네. 자네가 내 뒤를 잇는다면, 그런 것도 익숙해져야해."

그는 이제 완전히 내가 자신의 후계자인 양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 아직 하겠다고 승낙도 하지 않았는데...

"그래서 효진이가 자네와 어울리는 것도, 태근이가 자네와 교생 동기가 된 것도 이미 알고 있었네. 게다가 자네가 한때 어울리던 여자는 부산에서 알아주는 큰손의 따님이자 지하 최대 조직의 숨은 실권자더군. 알고 있었나?"

"네엣? 부산....이요?"

뜻밖의 이야기였다. 내가 아는 부산 아가씨는 딱 둘. 그중에서 방금 박 회장이 말한 사람에 들어맞는 사람은 단 하나뿐이다. 다른 누구라고 생각하기도 어려웠다. 검은 옷의 사내들을 이끌고 나타나 나에게 명함을 건넸던 리사. 그녀의 정체가 그런 것이었다니... 어느 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이렇게 전해 듣고 나니 새삼 또 굉장하다. 놀라고 있는 사이 박 회장의 이야기는 계속 이어졌다.

"게다가 우리 회사 최고 인재인 하영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검찰청의 주목받는 젊은 인재인 채 검사까지 자네와 엮이더군. 이쯤 되니 난 자네가 내 인생에 있어서 어떤 열쇠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네. 그래서 자네가 태근이를 데리고 ROSE로 가는 것도 막지 않았네. 그 시기에 태근이가 유미와 만나게 되는 거. 그게, 그렇게 흘러가는 흐름이라고 생각했어. 그 흐름의 중심에는 자네가 있고."

내 인간관계와 행동반경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박 회장 앞에서, 어떤 허튼소리도 할 수 없었다. 내 생활을 감시하고 있었다는 점에 있어서 기분은 상당히 나빴지만 그 정도로 그가 나에 대해 고려하고 있다는 점도 되니까 말이다. 그가 나에게 회사를 맡기겠다는 이야기가 한층 더 부담스럽다. 뭐라고 해야 할지 잘 몰랐다. 그저 이렇게 말할 뿐이었다.

"아무리 그렇게 말씀하셔도 전... 그렇게 대단한 사람이 아닙니다."

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알고 있어. 그렇게까지 대단한 사람은 아니라는 거. 그렇지만 그렇게 치면 모든 인간이 다 그러네. 딱히 대단한 사람은 없는 거야. 모든 인간이 어울려서 만들어내는 흐름. 그게 사람 사는 세상이고 그 안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인생이네. 그런데 자네란 사람은 변곡점일세. 이런 말, 알고 있나? 변곡점?"

이 아저씨가 날 너무 무시하네... 알고 있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면서 계속 유미가 바에서 내게 했던 말을 떠올리고 있었다. 그녀는 내게 말했다. 내게는 무수한 길이 놓여 있다고. 그게 내 매력이라고 했다.

"저주라고도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는 탓에..... 모든 선택이 정해져 있던 유미야. 갇혀 있고 답답한 흐름 속에서 살고 있던 그녀는, 그렇게 자유로운 흐름 속에 사는 자네를 부러워했겠지. 그리고 자네를 선택했겠지. 난 그렇게 생각하네."

다시 유미 이야기로 돌아온다. 박 회장과 나. 나와 박 회장의 접점은 결국 유미다. 그녀로 시작했고, 그녀 때문에 여기까지 왔다.

"바로 결정하라고 하진 않겠어. 아직 난 정정하고 회사 일도 재미있으니. 자네도 선택할 시간이라든가, 따로 하고 싶은 일은 많을 테니 언제든 자네의 선택을 들려주게나. 그렇지만 자네의 앞길에서 딱히 할 일이 없다면... 혹은 내 자리에 앉아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내 제안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주길 바라네. 이건 생각보다 재미있는 일이 많거든."

박 회장은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나잇살은 좀 있지만 잘 관리된 깨끗한 손이었다. 그 손을 맞잡아 가볍게 악수했다. 그러다 문득 떠오른 생각이 있어 물어보았다.

"왜.. 태근이 형에게, 아니면 효진이에게 일을 물려주지 않으시는 거죠?"

"태근이? 효진이? 푸하하하."

그는 껄껄 웃곤 내게 반문했다.

"어디 보자... 우선 딸부터. 일단 효진이에게 이 사업을 맡기면 일 년 안에 거덜낸다에 걸겠네. 자네는 몇 년에 걸 텐가?"

"그...그야...."

매사에 대충대충이고 쓸데없는 쪽으로 호쾌한 녀석의 성격을 떠올리니 박 회장이 말한 일 년도 길게 느껴졌다.

"게다가 태근이? 그 녀석은 자신은 곧 죽어도 선생질 하겠다고 천명을 해놓은 상태야. 쓸데없이 고집이 쎈 건 꼭 제 엄마를 닮아서 나로서도 어쩔 도리가 없네."

학교에서 학생들과 어울리며 쾌활하게 웃던 형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굳이 자네인 이유는 이렇네. 결국 내가 이만한 것들을 가질 수 있고, 이만한 자리에 올 수 있었던 건 오직 유미 때문이었어. 이제 그녀가 보낸 사람이 왔으니 난 물려줄 생각을 하는 것일 뿐이네. 다른 생각은 없어. 설령 자네가 이 사업을 완전히 말아먹는다고 해도, 난 그게 순리라고 생각할걸세. 꼭 자네를 기용한다고 해서 엄청난 성과를 보여주리라 생각하지 않아. 그저 자네가 하고 싶은 대로, 그렇게 있으면 되는 거야."

"그런가요..."

고개를 주억거리며 듣고 있던 나는 유미의 딸을 떠올렸다. 이걸 물어봐도 되나 어쩌나 한참을 고민했다.

"저... 회장님. 실례가 되지 않는다면 한 가지 여쭈고 싶은데요..."

"뭔가? 말해보게."

사람 좋은 표정을 짓고 있는 그의 얼굴에 대고, 차마 유진이 이름을 꺼내기가 힘들었다. 한참을 망설였지만, 그래도 말해야 할 필요는 있었다.

"전 유진이와 한 가지 약속을 했습니다."

"무슨 약속?"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아이의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함께 있어주겠다고요."

풀 냄새와 염소 냄새가 가득한 그 좁은 방에서 맺어지며, 달빛 아래 만난 유진과 나의 속살은 그 약속의 증거물이다. 그 이야기까지 할 필요는 없으리라. 이미 그는 다 짐작하고 있을 테니.

"그래. 아까도 말했지만 자네는 유미가 고른 사람이니... 유진이를 책임져 주게나. 나 역시 자네들의 관계를 허락함세."

"한 가지 궁금한 게 있습니다. 전 유미에게 회장님 이야기를 듣고... 당연히 회장님이 유진이의 아버지일거라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마른 침을 삼킨다. 그는 무슨 질문이 나올지 알아차렸다는 듯이 빙그레 웃었다.

"아니라, 이 말이지?"

장례식장에서, 그리고 나는 본 적이 없지만 유진이가 기억한다는 십몇 년 전의 상황에서, 그는 유진이가 자기 딸이 아니라고 말했다. 몹시 분명한 어조로. 그렇지만 그런 동시에 그는 유미의 남편이었다. 대체 이게 어떻게 된 일일까.

"알고 싶나?"

"외람된다고 생각은 하지만.... "

"그래. 다른 사람은 몰라도, 자네에게는 말할 수 있겠군. 아니. 말해야겠지."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파를 벗어나 창가로 다가간 그는 바깥의 전경을 내다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바깥에 시선을 던지던 그는 무심한 어조로 말했다.

"태근이 딸일세."

".........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그는 내 의심을 허락지 않았다. 아주 분명한 어조로 재차 말한다.

"유진이 말야. 태근이 딸이라고. 그러니 내 딸이 아냐."

이번에는 좀 비명이 컸다. 밖에 있던 하영과 춘희가 회장실로 뛰어들어올 만큼. 박 회장이 손을 내저어 하영과 춘희를 도로 내보냈다.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있던 나는 도로 앉았다. 이번에는 걸터앉을 생각 같은 것도 못한 채 그냥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푹신하기 그지없는 소파는 내 몸을 푹 감쌌다. 그러나 내 정신을 감싸줄 무언가는 없는 것 같다. 정신적인 충격에 그대로 노출되고 말았다.

"마...말도.....안...."

박 회장은 내 쪽으로 다가오며 말했다.

"그래. 나도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해서 유미를 더 이상 곁에 둘 수 없었어. 그래서 내쳤네. 그녀도 거기에 동의했기에 순순히 떠났고."

"나이 차이가....?"

"태근이는 남자로서 사정이 가능한 나이였고, 유미는 여자로서 임신이 가능한 나이였어. 그녀 곁에 있던 남자는 나와 태근이뿐이었고, 나는 여자를 회임케 하는 게 불가능하네."

태근과 효진, 두 사람의 아버지 아니었나, 이 사람? 근데 왜 아이를 갖는 게 불가능하다는 거지...? 묻고 싶은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차마 묻지 못했다.

"나중에 유미에게 물어보니 태근이도 잘 모를 거라고 하더군. 아마 꿈결에 하듯 태근이를 유혹한 모양이야. 태근이는 그 행위가 꿈에서 한 일이라 믿고 있겠지. 아무튼 그녀는 유진이를 가졌어. 그러니 유진이는 내 딸이 아냐. 태근이 딸이지."

거듭되는 충격적인 소리에 할 말을 잃는다. 유미는 정말이지.... 상식 밖.... 아니, 상식이라는 건 아예 모르는 사람 같다. 그러나 박 회장은 그런 그녀를 이해한다고 했다. 가슴으로는 이해할 수 없지만, 머리로는 가능하다고 했다. 잘 웃는 얼굴과는 달리 그는 무섭도록 이성적인 사람이었다. 괜히 이만한 규모의 사업을 굴릴 인물은 아닌 모양이었다.

"우리가 아는 도덕이니 문화니 하는 걸 그녀에게 적용할 수 있을까. 그녀는 자신이 본 것을 그대로 행하는 사람이야. 태근이와 그렇게 되는 거.... 그녀는 그걸 미리 보았겠지. 그리고 그대로 행동한 거야. 그러니 어떻게 그녀를 탓할 수 있나. 난 그렇게 생각하네. 그녀의 모든 행동은, 그런 식으로밖에 설명이 안 되는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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