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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래도, 회장님의 자식일 수도 있는 거 아닙니까. 회장님과도 결혼생활을 하고 있었으니... 친자확인이라도..."
그러자 박 회장이 손을 내저었다. 여태 웃고 있던 그의 표정이 처음으로 딱딱하게 굳고 있었다.
"그런 이야기는 꺼내지 말게. 난 여태까지 계속 그 유혹에 시달리고 있어. 심지어 태근이와 효진이까지도.... 걔네들도 내 자식일까 아닐까 의심하며 살아왔네. 내게 그렇게 말한 사람을 내 손으로 처단한 후, 나는 한 번 결정했어. 그 아이들은 내 자식들이라고. 그렇지만 유진이는 그렇지 않다고 결정했네. 내 결정을 번복하게 만들지 말게."
그의 눈빛이 이상한 빛으로 번뜩이기에 더는 캐묻지 못했다. 처단이라니... 그의 단호한 표현에서 오싹함마저 느껴졌다. 대신 다른 걸 물어보았다.
"태근이 형도... 유진이도 모두 이 사실을 모르는 건가요?"
"그래."
"그들이... 평생 모르게 할 생각입니까?"
"글쎄. 난 적어도 유진이가 성년이 되면 말해줄까도 싶었어. 그쯤 되면 받아들일 수 있을 테니. 자네는 어쩌고 싶나?"
나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모르겠습니다. 어떤 게 옳은 것인지."
"나 역시 모르겠네. 그렇지만 만약 유진이가 날 보고 자신의 애비가 누구냐고 직접 물어본다면, 난 아마 사실대로 털어놓게 될 거야. 숨길 이유는 없다고 보네."
태근이 형과 유진이라니. 둘이 나란히, 혹은 마주 보고 서 있던 지난 일들을 떠올려본다. 아무리 봐도 전혀 닮지 않은 그들이 부녀지간이라고?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태근이 형은 대체 어떻게 반응할까. 유진이는? 아무리 똑똑한 아이라고는 하지만, 이런 충격적인 사실을 무리 없이 받아들일 수 있을까. 상상만으로도 머리가 복잡해서 터질 것 같다.
혼란에 빠져있는 날 물끄러미 바라보던 박 회장은 더이상 할 말이 없다며 소파에서 일어났다. 나 역시 할 말이 없기에 그에게 인사를 남기고 회장실을 벗어났다. 박 회장은 다음에 보자는 말만 남기고 내게서 등을 돌렸다. 문이 닫히기 직전 잠깐 돌아보았다. 그의 뒷모습이 무척 외로워 보였다. 한숨을 내쉬고 문을 닫았다.
하영은 춘희라는 비서 옆에 앉아있었다. 둘은 굉장히 다정하게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가 내가 나오자 둘 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말씀 다 나누셨나요?"
고개를 끄덕이며 하영을 쳐다보았다. 여기 들어오면서 그녀가 내게 그룹에 대해서 열심히 설명한 것을 떠올렸다. 그녀는 박 회장에게 미리 언질을 받았던 걸까. 박 회장은 그녀가 자기 회사의 최고 인재라고 했고, 태근이 형이나 효진이가 그녀에게 보내는 신뢰의 크기를 떠올려 보면 그녀는 꽤 오랫동안 여기에 근무해 온 것 같았다. 그러니 회장의 심복으로서 그의 의중을 미리 읽었을 수도 있다. 내가 아무 말도 않고 있으니 하영은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날 안내하기 시작했다.
"댁으로 모시겠습니다. 가시죠."
춘희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하곤 전용 엘리베이터에 다시 탔다. 올라올 때와 마찬가지로 하영의 등을 보며 서 있었다. 1층에서 내려 건물을 빠져나오니 차가 준비되어 있었다. 하영과 나란히 차에 올라탔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서일까. 길이 많이 막혔다. 차가 정체되어 있는 동안 그녀에게 물어보았다.
"제가 박 회장님에게 이런 제안을 받으리란 것을 알고 계셨나요?"
"어느 정도는요."
즉각적인 대답. 예상대로였다. 그래서 물어보았다.
"하영 씨는 찬성합니까?"
"찬성이라니. 무슨 말씀이죠?"
"그러니까... 아직 대학도 졸업 안 하고 군대도 안 간 새파랗게 어린놈이... 아무 경력도 경험도 없는 초짜 녀석에게 이런 큰 회사를 맡겨도 되느냐는 겁니다. 하영 씨처럼 공부를 많이 한 사람도 아니고 이 회사에서 오래 일한 것도 아닌데..."
하영은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핸들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저는 회장님의 결정에 대해서 가부, 혹은 시비를 판단한 적은 없습니다. 적어도 그분의 판단으로 제가 살아난 이후로는요."
좀 뜬금없는 소리였다.
"살아나다뇨?"
"별로 유쾌한 이야기도 아니고, 당신에게 들려줄 필요도 없으니 넘어가죠. 한 가지 분명한 건, 회장님은 이미 결정을 내리셨고 저는 그에 따를 뿐입니다. 회장님이 선택한 사람이 당신이라면 제가 아무리 당신을 싫더라도 수행할 따름입니다."
유능하기 짝이 없는 그녀가 보필해준다는 게 고마울 따름이다. 그러나 뒷말이 입에 썼다.
"....날 싫어합니까?"
"그럼, 당신 주변의 그 수많은 여자들처럼 그저 당신이라면 헬렐레하면서 좋아하리라 생각했어요?"
"아니, 뭐.. 꼭 좋아해 달라고까지는 말하지 않았습니다만... 굳이 싫어할 필요까지야."
그러자 하영이 한숨을 푹 내쉬었다. 정면에 시선을 유지한 채, 그녀가 말했다.
"당신 때문에 내 친구가 쓰러져 사경을 헤매고 있는데, 그럼 제가 당신을 싫어하지 않고 배기나요?"
"친구.....?"
하영이 말하는 친구라니. 내가 아는 하영의 친구는 딱 하나뿐이다. 그녀가 사경을 헤매고 있다고? 순간 유미의 마지막 편지가 생각났다. 유미는 아가씨의 일이 안타깝다고 했다. 내 생각이 맞다면, 그 아가씨가... 이 아가씨를 말하는 건가. 그런 건가.
"송화 말인가요?!"
"이제야 생각이 난 건가요. 당신이라는 사람은 대체..."
"이봐요. 딴소리하지 말고 빨리 말해봐요. 사경을 헤매고 있다니!"
핸들을 붙들었다. 하영은 날 한번 째려보고 길가에 차를 세웠다. 그녀는 한숨을 푹 내쉬고 말했다.
"송화와 마지막으로 헤어진 게 언제죠?"
"여행 가기 전에.... 대전에 내려간다고..."
"그래요. 어디인지는 저도 잘 몰랐지만, 아무튼 거기에 가서 총상을 입고 돌아왔어요."
"총상?"
그녀가 잡으려던 놈들을 떠올린다. 이상한 종교와 약쟁이들을 잡으려던 그녀. 그놈들이 총까지 가지고 있었다니.... 하영은 굳은 얼굴로 말했다.
"게다가 맞은 부위가 안 좋아요. 아직까지 의식이 없습니다. 그 년은 지금까지 줄곧...."
"의식이 없다니.... 어디...죠? 병원이?"
하영은 대답 대신 차를 돌렸다. 서울을 벗어나 조금 더 달리니 커다란 병원이 나타났다. 하영의 안내를 받아 한 병실에 도착했다. 거기에 그녀가 있었다. 내가 알던 모습과는 아주 다른 모습으로....
"송화...."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머리에 붕대를 감고 산소 마스크를 쓰고 있는 그녀의 모습이 너무도 낯설었다. 길고 탐스러운 머리카락은 온데간데없다. 머리에 큰 수술을 받아야 했던 그녀는 흑단 같은 머리카락을 모두 밀어버려야 했단다. 두텁게 감겨있는 붕대 아래에는 흉하게 찢기고 꿰매어진 상처가 있을 터다.
그날 밤, 그녀는 나에게 말했다. 놈들을 잡아오면 이제 날 체포하러 오겠다고. 그렇게 말했던 그녀가 여기 이렇게 말없이 누워있었다. 날 체포하러 오지 않은 건, 그녀의 상태가 이렇기 때문이었다. 방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건 무의미하게 반복되는 심장박동 표시기의 기계적이고 단속적인 비프음뿐이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녀의 손을 잡아본다. 링겔이 꽂혀있는 팔에는 온통 주사바늘 투성이다. 살이 많이 빠졌다. 앙상하게 되어버린 팔을 보고 있으니 울컥해진다. 계속 보고 있기가 괴로워, 문가에 기대어 팔짱을 끼고 있는 하영을 돌아본다.
"놈들은... 송화를 이렇게 만든 놈들은 잡았습니까?"
더없이 서글픈 눈을 하고 있는 그녀는 힘없이 고개를 저었다. 이제서야 깨닫는다. 유미의 장례식에서 그녀가 나에게 뭘 말하고 싶었는지. 서울에 돌아오길 왜 그렇게 기다렸는지. 그녀는 자신의 친구에게 날 보여주고 싶었던 거다. 아니면 나에게 그녀를 보여주고 싶었거나.
"의사는 뭐라던가요."
"뇌손상에 따른 코마... 우리 말로는 식물인간 상태라고 해요. 언제 깨어날지... 모른다고 하는군요."
"회복은..."
"기약할 수 없어요. 기적을 바라는 것뿐."
남에게 일방적인 지시를 내리는 게 싫어 자신이 앞장선다고 말하던 그녀였다. 누구보다 정의롭고 열심이던 그녀다. 여기 이렇게 누워있으면 안 되는 사람이었다.
"송화...."
뜨거운 눈물이 흐른다. 뚝뚝 떨어진 눈물이 송화의 앙상한 손 등위로 번져간다. 난 그저 몸으로만 대한 그녀였는데, 날 좋아한다고 말하는 게 부담스러웠던 그녀였는데... 그런 그녀가 여기에 이러고 있다는 것이 못 견디게 괴로웠다.
"송화...내가 왔어... 눈 떠봐....응?"
손을 뻗어 그녀의 얼굴을 만져본다. 투명한 산소마스크 너머 그녀의 표정은 더없이 평온해 보였다. 나와 모텔을 뻔질나게 드나들던 시절, 일련의 관계 후에 잠깐 잠들었을 때의 그 표정 그대로다. 깨어나지 못한 게 아니라 그저 잠들어 있는 것 같다. 흔들어 깨우고, 같이 목욕하자고 깨우면 될 것 같은, 그런 얼굴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그녀는 아무리 흔들어 깨워도 일어나지 않을, 깊고 깊은 잠 속에 빠져있다.
"이만 나가죠. 외부인이 오래 있으면 좋지 않다고 하는군요. 게다가 좀 있으면 송화 어머님이 오실 시간이에요. 난 그분 얼굴을 뵐 면목이 없어요."
날 이끄는 하영을 따라 밖으로 나간다. 병실에는 송화 혼자 남겨졌다. 차에 올라타자마자 하영에게 따지듯 물었다.
"왜... 나에게 더 빨리 이야기하지 않았습니까?"
"뭘요. 송화에 대해서요?"
"네."
우울해있던 하영의 표정이 점점 살아나고 있었다. 날카로운 눈매로 날 째려보며 그녀는 거침없이 말했다.
"송화가 저렇게 되었다는 걸 알면, 당신이 뭐라도 해줄 수 있나요? 해결할 수 있어요? 깨어나게 할 수 있냐고요."
"꼭 그런 게 아니더라도.... 아까 하영 씨도 그랬잖아요. 저 때문에 저렇게 되었다고."
"그건, 내가 그냥 당신을 탓하고 싶은 마음에 한 소리일 뿐이에요. 신경 쓰지 마세요. 그리고... 당신도 별로 편한 상태는 아니었으니 좋지도 않은 이야기를 굳이 보탤 필요는 없다고 생각했어요. 송화 저러고 있는 게 하루이틀사이에 나을 것도 아니고."
가슴이 답답했다. 내가 송화에게 해줄 수 있는 일이 무엇일까 생각해본다. 한참을 고민하던 끝에 하영에게 물어보았다.
"한 가지 물어보죠. 제가 박 회장님의 자리에 가면, 어떤 일을 할 수 있는 거죠?"
"글쎄요. 사실 당신이 그 자리에 앉든 말든, 회사는 이미 잘 돌아가고 있습니다. 수많은 투자전문가와 금융전문가들이 일하고 있으니까요. 그저 당신은 거기서 어떤 사안에 대한 지시를 내릴 수 있을 따름이죠. 다만, 속된 표현을 조금 사용하자면 돈 쓰는 건 원 없이 할 수 있을 거예요. 일 년에 천 억씩 써도 백 년을 쓸 수 있는 현금자산이 있으니까요. 합법적으로 드러난 것만 그 정도입니다. 그 밖의 것들은 당신이 그 자리에 가면 말씀드리죠."
일 년에 천 억씩 써도 백 년이라니.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돈 단위다. 게다가 그게 "합법적"인 범위라면 대체 합법적이지 않은 것까지 하면 얼마나 된단 말인가.
"박 회장님은 합법과 불법의 촘촘한 경계에 놓인 일이라고 하던데, 불법적인 건 어느 정도의 일입니까?"
".......효진이도 가끔 그런 착각을 하는데, 이봐요. 난 법을 통해 먹고 사는 변호사입니다. 그런 나한테 불법적인 걸 물어보면 어쩌자는 거죠?"
"변호사님이니 더 잘 알겠죠. 어느 게 불법이고 어떤 게 합법인지."
"그렇기는 하죠..."
하영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꼭 돈이 아니라도, 회사 차원에서는 아니지만... 회장님이 구축해놓은 인맥에는 사회 지도층 인사는 물론, 각계의 높으신 분들이 많아요. 그분들을 통하면, 가끔은 합법적이지 못한 일도 하곤 해요."
"힘 있는 분들?"
하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의 대답을 들으며 나 역시 뭔가 떠올렸다. 그때, 괌에서 나와 유진이가 돌아올 때, 태근이 형이 보내준 비행기는 아무리 봐도 군용기였다. 승무원들도 어딘가 소속된 사람들 같았고.... 일개 개인인 그가 군용기를 동원하여 사람과 화물을 나를 수 있게 할 수 있을 리는 만무하고 분명 이 회사의 수완, 아니 더 나아가 회장의 수완임에 틀림없다.
"그것들까지... 제가 다 승계하게 되나요? 제가 그분들의 힘을 빌어다 쓸 수 있을까요?"
"바로는 힘들죠. 당신이 회장님의 뒤를 이어 자리를 잡고, 그분들과의 친목을 쌓을 정도의 시간은 필요할 테니까요."
"그건 그렇겠죠."
결국 내가 박 회장의 제안을 받아들인다고 해도 바로 쓸 수 있는 건 돈뿐이라는 이야기다. 돈뿐이라니....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생활비가 모자라 쩔쩔매며 과외 알바 자리를 찾던 내가 이런 건방진 생각마저 하게 되다니. 한숨을 내쉬며 창밖을 내다보았다. 점점 어두워지는 거리를 보며 끊임없이 궁리한다. 내가 쓸 수 있는 카드가 무엇이 있을까. 하영 역시 그저 잠자코 있었다. 한참 만에 결심이 섰다.
"전화 좀 빌려주세요."
하영에게 휴대전화를 넘겨받고 안주머니에서 명함 하나를 찾았다. 거기에 적힌 번호로 전화를 건다. 신호음이 들리고 잠시 후 달칵거리는 소리와 함께 낭랑한 목소리 하나가 들려온다.
"네, 김리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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