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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46화 (14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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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어~ 한석 군. 정말 오랜만인데 그래."

"그러네요, 형.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나야 널럴하지 뭐. 현아가 바빠서 별로 못 보는 거 빼고는 다 괜찮아."

K대학교 앞에서 태근이 형을 만났다. 가게 일을 다시 인수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여태 가게를 맡겼던 것에 대한 보답도 할 겸 식사를 대접하기로 했다. 학교 앞, 학생들이 잘 가는 작은 밥집에서 테이블을 나란히 했다. 졸업학기에 돌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넘치는 형이었다.

"졸업논문 준비로 바쁘실 텐데.. ROSE까지 맡기고, 미안해요."

"ROSE는 아가씨들에게 맡겨놓으니 다들 잘 하더만. 네가 시스템을 딱 갖춰놓고 가서 그대로 집행만 했어. 그리고 논문이야 그까이거 대충 여러 사람꺼 짜깁기한 다음, 인용문만 제대로 달아서 내면 그만이야. 어차피 체육학과 졸업생들은 다 그래."

"......너무 대충 아닙니까?"

"뭐, 나중에 국회의원이나 대통령 따위를 하겠다고 까불지만 않으면 그만이지. 나야 선생질할 건데 내 졸업논문에 누가 관심이나 갖겠어?"

너무나도 호쾌한 대답에 할 말이 없어졌다. 지금 그의 곁에는 현아가 없었다. 헤어진 게 아니라 야매논문작문으로 시간이 널널한 형과 달리 수학과의 현아는 논문 때문에 연일 밤을 새우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나도 휴학을 하지 않았다면 논문은 물론이고 졸업작품을 만든다고 낑낑거리고 있었을 것이다.

"참, 하영이가 너에 대해 굉장히 꼬치꼬치 묻던데... 너, 뭐 또 사고쳤냐?"

"제가 무슨 맨날 사고 치고 다니는 녀석이랍니까..."

"이미 폭력전과가 있잖아. 넌. 게다가 네가 서울에 오는 걸 기다리고 있던데. 만나봤지?"

"으음... 그게... 박 회장님이 절 보자고 하시더군요. 그쪽 일을 하지 않겠냐고."

"너한테? 자기 일을?"

형은 살짝 놀란 눈치였다.

"네. 아마도 유미가 저에 대해 좋게 말했나 봅니다. 몇 번이나 고사했지만, 박 회장님은 이미 결심을 굳히신 듯해요."

"그래서. 할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형은 껄껄 웃었다.

"그래. 여자 좋아하고 결정에 머뭇거림이 없다는 점에서 넌 우리 아버지랑 비슷하겠구나. 잘 해봐라. 난 어차피 우리 아버지 일에 관심도 없었거든. 효진이에게 좋은 남자를 붙여서 그쪽으로 물려줄까 하시더니 그새 생각을 바꾸신 모양이네."

자기가 마음만 먹으면 어마어마한 규모의 회사를 차지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무척이나 쿨하게 놓아버리는 형을 보고 있노라니, 새삼 더 감탄하게 된다. 그런 모습에서 유미가 생각난다. 사람과의 관계는 중요시하지만 물질에는 초월한 그 모습이... 어쩌면 유미의 흔적이 아닐까 싶었다.

"제가... 잘할 수 있을까요?"

"못할 건 또 뭐겠냐. 정 어려우면 하영이에게 넘겨버리고 다시 ROSE나 운영하면 되지, 뭐. 안 그래?"

안 그래도 그룹을 운영한다는 거에 지레 겁먹고 있던 나다. 그런데 형의 이런 무책임하기까지 한 발언을 듣고 보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졌다. 그래, 원래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회사다. 그러니 내 것이 되었다고 - 물론 아직은 아니지만 언젠가는 그렇게 될 거라고 - 미리 걱정부터 집어먹고 있을 필요가 없다.

"역시 형을 만나길 잘한 거 같네요."

"그래? 이제 앞으로 돈 잘 벌겠네. 그러니까 여기 밥은 니가 사라."

안 그래도 살 생각이었는데... 마침 밥이 나와서 식사에 돌입하느라 대화가 소강상태가 되었다. 남자끼리 먹는 식사는 순식간에 끝났다. 식당을 나와 학교 내에 있는 벤치로 가서 이야기를 더 나누었다. 형은 내가 없는 동안 ROSE에서 있었던 일에 대해서 소상히 알려주었다. 전에도 느꼈지만, 형은 결코 덜렁이가 아니었다. 가게 전반의 일과 단골들에 대한 이야기는 물론, 우리 가게 아가씨들에 대해 나도 몰랐던 버릇이나 습관 등을 지적할 때는 받아적기까지 했다.

"매출내역은 지나가 다 정리했으니 걔한테 물어보면 될 거야."

"알았어요. 정말 고마워요. 형."

"고맙다는 걸 백반 하나에 캔 커피 하나로 끝내려는 건 아니겠지?"

"그러면요?"

그는 껄껄거리더니 예의 그 느끼한 말투로 말했다.

"어디 좋은 데 가서 아가씨 끼고 술 한 잔 빨아야지."

"........여태 제가 형에게 맡긴 가게가 그런 가게였습니다만... 그럼 충분히 즐기신 거 아니었어요?"

그러자 그는 정색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에이. 일하라고 맡긴 가게에서 그러고 있을 수 있나. 다음에 손님 자격으로 갈 테니 그때 디씨나 많이 해줘."

"형은 정말 그렇게 안 보이는데, 의외로 착실한 분이군요."

"그럼 내가 착실하지.. 그렇게 안 보이는.... 응? 이 자식이!"

미리 대비하고 있었기에 형의 헤드락 시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형은 날 놓치고도 껄껄 웃었다. 다음 수업이 있어 가봐야 한다는 형을 따라 자리에서 일어나려는데, 형이 뭔가 생각난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 그 아이. 유진이는 이제 괜찮은 거야?"

"유진....이요?"

"응. 너랑 같이 있다는 그 아이 말야. 미자누나의 딸. 이름이 유진이 맞지?"

순간 말문이 막혔다. 그는 유진이를 자기의 첫사랑이자 한때 새엄마였던 유미의 자식으로 알고 있다. 그렇지만 박 회장의 말에 따르면 유진이는 형의 자식이다. 이 사실은 온 세상에서 박 회장과 나만 알고 있다...

"마..맞아요. 그리고, 잘 있습니다."

"배는 다르지만 그래도 내 동생이야. 힘든 일도 많이 겪었지만 너한테 많이 의지하는 것 같더라. 너 같은 놈에게 맡기기는 많이 아깝기는 하지만 걔가 그렇게 나오니 나도 어쩔 수 없지. 잘 해줘라. 회사 일 바쁘다고 소홀하고 그러면 안 돼."

"네.."

별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그도 유진이와 내가 선을 넘은 것을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다. 생긴 거와 다르게 눈치가 보통이 아니니 알고도 남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 유미와 내가 잤다는 사실을 알고는 불같이 화를 내며 주먹을 휘둘렀던 그다. 나중에 자기 딸이 아직 성인도 되기 전에 나와 동거를 시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으으....

"왜 그래? 너 또 똥 마렵냐?"

종합강의동으로 나란히 걷던 그가 날 보며 물었다. 이 사람은 무슨.... 내가 똥 못 싸 죽은 귀신이 붙은 줄 아나. 그러나 다른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싶지 않았기에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럼 어서 가서 일 봐라. 난 수업 갈 테니까."

태근이 형은 가방에서 여행용 티슈팩을 꺼내어 내 손에 쥐여주었다. 그리고 손을 흔들며 가버렸다. 손에 휴지를 든 채로, 난 그저 멍하니 있었다. 왜 저렇게 쓸데없이 친절한 거야.... 정신이 돌아온 건 품 안의 휴대전화가 울리기 시작한 후였다.

"여보세요?"

감이 좀 멀었다. 약간의 딜레이가 있은 후에, 내가 아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 정말 한석 군이네? 나야, 효진이."

"아.. 효진아... 안 그래도 니네 오빠랑 방금 헤어진 참인데."

"오빠랑?"

"응. 전에 부탁한 일이 있었거든. 내 전화번호는 어떻게 알았어?"

"하영이 언니가 알려주더라고. 내가 너에게 연락하고 싶다고 했더니..."

"아, 하영 씨가..."

박 씨 일가 및 나의 전속 비서가 된 하영의 첫 업무는 내 연락처 뿌리기인 모양이다. 앞으로는 그러지 말라고 미리 단속시켜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영이 언니 말로는 앞으로 우리 아빠 회사에서 일할 거라면서?"

"응. 그렇게 되었어."

"하영이 언니가 엄청 까탈스럽기는 하지만 세심한 성격이거든. 그러니 언니 밑에서 일하면 많이 배울 수 있을 거야. 잘 해봐."

"그러냐?"

아무래도 효진은 내가 하영이 밑에 들어가서 일하는 걸로 착각한 모양이다. 무리도 아니다. 아직 졸업도 안 했고 군대도 안 간 애송이가 덜컥 그 큰 회사의 꼭대기에 올라갔을 거라 상상도 못 하겠지. 게다가 자기 아버지가 나한테 회사를 맡기겠다고 한 이야기를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굳이 오해를 해소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나조차 내가 그 자리에 간 이유를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다.

"저기, 한석 군."

"응?"

효진이의 목소리는 평소와 달랐다. 뭔가 마음에 걸리는지 무척 주저하고 있었다.

"너답지 않게 왜 그러냐? 너야말로 똥 마려운 거야?"

"똥? 갑자기 더럽게 뭔 소리야?"

손에 들린 휴지를 내려다보며 혼자서 킥킥거렸다.

"그런 게 있어. 뭔데 그래. 암튼 빨리 말해봐."

여러 번 재촉하는데도 불구하고 효진은 꽤 미적거렸다. 한참 동안 뜸들이던 그녀가 꺼낸 말은 좀 뜻밖이었다.

"미안해. 정말로."

"미안... 하다니?"

"나 때문에, 나 때문에 여행 간 거잖아. 괌 말이야."

"아? 아..... 그거... 말이구나."

이제서야 효진의 머뭇거림이 이해되었다. 그녀가 내게 준 개평 200만 원. 그게 여행의 시발점이긴 했다. 여행을 가라고 권한 것도 그녀였다. 예전이라면 나 역시 그 불행한 일에 있어서 효진에게 일말의 불평을 했을지도 모른다. 문득, 소란이를 떠나보내고 유미에게 전화로 항의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유미가 보기에 그때의 난 얼마나 어리석게 보였을까.

"효진아..."

"응?"

깊은숨을 들이마셨다. 하늘을 올려다보고, 이렇게 말했다.

"너무 자책하거나 슬퍼할 필요 없어. 사람의 운명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변하는 것이 아니래. 누군가의 노력이나 행위 하나로 바뀌는 경우도 아주 드물고.... 그러니 네가 그렇게 했다고 해서 자책할 필요는 없는 거야. 모든 것은 운명이야."

"그런 게 운명이라니. 그런 건 너무 슬프잖아."

"네 잘못이 아니란 소리야."

".......한석 군...."

내가 한 말이 아니다. 유미가 내게 했던 말을 살짝 응용했을 뿐이다. 전화기 너머 효진은 울고 있었다. 그녀에게도 유미는 좋은 기억으로 남아있는 모양이다. 한참을 그렇게 우는 효진을 전화로 달래느라 애를 먹었다. 간신히 울음이 잦아든 효진이는 거듭 미안하다고 했지만, 난 몇 번이나 괜찮다고 했다. 그러자 효진이가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나중에 내가 한국 가거든 맛있는 거 사줄게. 유진이도.... 데리고 나와."

"한국? 너 지금 한국이 아닌 거야?"

그러고 보니 전에 연락했을 때도 일본에 있던 녀석이다. 지금도 일본에 있다고 했다.

"장례식 끝나고, 계속 한국에 있어봤자 아빠 등쌀에 시달리기만 해서 말야. 여기로 도망왔어. 지혜는 결혼하고 나니 집안일에 바빠서 나랑 놀아주지도 않거든."

"JS 그룹 일본지사. 거기에 있는 거야?"

"응. 얹혀 지내고 있어."

"하아...  될 수 있으면 사고 치지 말고 얌전히 있어주길 바란다."

"흐음. 뭐야. 회사 들어갔다고 벌써부터 회사를 먼저 생각하는 거야? 내가 아니라?"

"그냥. 뭐 그렇다는 거야."

농담을 하는 걸로 보아 이젠 회복된 모양이다. 조만간 한국에 들어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효진이는 전화를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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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9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열심히 쓰겠습니다.

감상문 접수도 여전히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 쓰셨으면 쓰셨다고 알려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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