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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50화 (15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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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혼자 있기 심심하다고 해서요. 저 공부하는 동안 사무실에서 좀 기다리게 하려구요."

안 그래도 깐깐한 하영이 싫다고 하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는데, 그녀는 의외로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세요, 그럼."

심지어 유진이에게 소파 쪽 자리를 권하면서 차까지 한 잔 타고, 어디 숨겨두었던 건지 쿠키와 잡지까지 찾아와 갖다 주었다. 원래 저런 친절을 베푸는 여자가 아닌데 이렇게 나오니 되려 수상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하영을 빤히 쳐다보고 있노라니 그녀도 내 시선을 눈치챈 모양이다.

"왜 그렇게 빤히 보시죠?"

"아뇨. 아무것도."

"아무것도 라니. 그럼 아무것도 하지 말지 마시고 얼른 앉아서 제가 전에 갖다 드린 재무제표부터 확인하세요. 지난 십 년 치 분입니다."

"끄으으으....윽....네에."

물에 빠진 사람 숨소리를 내며 내 책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투덜거리며 서류를 넘겨보다가 무심코 고개를 들었더니 유진이가 날 쳐다보고 있었다. 일부러 인상을 쓰고 얼굴을 확 찡그렸더니 유진이가 살짝 웃는다. 녀석. 뭐가 웃긴 거야. 하영은 자기 자리에서 일을 하고 나 역시 책상에 앉아 한참을 서류와 씨름한다. 정해진 시간이 되자 하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 쪽에 있던 칠판을 끌어왔다. 창문에 암막을 펼친 다음 사무실의 불을 껐다. 충분히 어두워지자 OHP를 걸고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녀의 "강의"가 시작되었다.

"오늘은 우리 그룹의 투자현황 및 장기프로젝트 진행상황을 말씀드립니다. 지난번에 말씀드린 국내 기업 현황은 기억하고 계시죠?"

"........그게, 음..."

"잘 기억하고 계시리라 믿으니, 잘 요약하시어 내일까지 페이퍼 제출바랍니다."

"끄윽...."

"별도로 상장도 되어있지 않은 우리 그룹이 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건 막대한 자금흐름에서 나오는 머니파워 때문입니다. 따라서 국내 기업의 현황에 따라 투자의 완급을 조절하고 일본에서 흘러들어오는 자금을 무리 없이 전달할 수 있도록 마켓쉐어를 형성하는 게 장기프로젝트의 일차 목표입니다. 이를 통해 국내 기업은 물론 일본 유수의 기업과 지극히 밀착되면서도 대등한 관계의 파트너쉽을 설정할 수 있습니다. 회장님의 개인 자산과 그룹의 자산은 표면적으로 분리되어 있지만 집행의 여하에 따라서는 그 경계를 두는 것에 의미가....."

아련하다. 그래, 아주 아련한 기억이다. 그러니까 그게 어떤 기억이냐면 대학에 이제 막 입학했을 때, 전공 수업만 듣다가 교양수업을 들으러 갔을 때의 기억이다. 공대의 시커먼 남자들만 가득한 전공 수업과는 달리 타 학부학과의 여학생들도 함께 자리한 교양수업은 이런 아련하고 좋은 향기가 났다. 미친 듯이 필기하고 수식계산하고 공식에 따른 변인을 통제하느라 정신이 없던 전공과는 다른, 주제에 대해 논의하고 다양한 의견을 개진할 수 있는 교양수업에 대한 기억. 지금 그 기억이 왜 떠으르냐면은...음냐....

".......한석 씨?"

"음....네에?"

눈을 떴다. 눈을 떴다는 말은 조금 전까지 내가 눈을 감고 있었다는 이야기겠지. 눈을 감고 뭐했더라, 내가? 잘은 모르겠지만 내 바로 앞에 버티고 서서 차가운 눈빛을 보내고 있는 하영을 화나게 할 무언가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바로 내가 말이지.

"졸았나요?"

"아뇨! 그럴 리가요."

"졸지 않았다면 잤군요."

".........아마도?"

아, 그래. 내가 잠깐 잠든 모양이다. 책상을 탁 내려치는 하영을 보며 움찔했다. 그녀는 낮은 어조로 말했다.

"저녁에 술집 관리하시고... 새벽에는 말세교 쪽 조사하는 부산과 연락하고 계시느라 쉴 시간이 없다는 거, 저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것도 그 일 못지 않게... 아니, 규모로만 치면 이쪽이 훨씬 더 중요한 일인데 말이죠. 제 딴에는 밤을 새워 OHP를 준비하고 자료를 정리해드려도, 그쪽에서 받아주지 않는다면 진행이 안 됩니다. 아시겠습니까?"

".....알겠습니다. 미안해요, 하영 씨."

잠도 깰 겸 하영에게 커피브레이크를 요청했다. 하영은 한숨을 내쉬며 허락했다. 커피를 한 잔 타온 하영에게서 잔을 받고 유진이 맞은 편에 앉았다.

"심심하지 않아?"

"별로요."

"별로라니. 심심하단 소리야, 아님 안 심심하다는 거야?"

"반반이네요. 잡지나 다른 건 재미없는데 아저씨의 멍청한 표정은 정말 재미있거든요. 후후."

"윽... 너 정말..."

"설마 학교 다닐때도 그런 멍청한 표정으로 수업을 들었던 건 아니죠?"

"왜 이래. 나 이래 봬도 장학금 받고 다녔던 학생이라고."

"장학금? 정말요?"

"그렇게 과도하게 놀란 표정 짓지 마라. 불쾌하다."

별것도 아닌 일이 깔깔거리는 유진이를 놔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화장실에 갔다. 볼일을 보고 세수도 한번 했다. 거울을 보면서 이번에는 하영에게 혼나지 않기로, 또한 유진이에게 멍청한 표정을 보이지 않기로 다짐했다. 복도를 따라 사무실로 돌아왔다. 문을 열고 안에 들어서자 유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런가요. 알았어요."

아까 내가 앉았던 자리, 유진이의 맞은 편에 하영이 앉아 있었다. 둘은 뭔가 이야기를 나누는 중이었는데 내가 들어서니 입을 딱 다문다. 두 사람을 번갈아 쳐다보아도 방금 무슨 이야기를 나누던 중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둘이 무슨 이야기했어?"

"무슨 이야기요?"

"내 욕이라거나."

"아저씨 욕한 건 아니니 걱정 마세요."

유진이는 씨익 웃으면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럼 이번에는 졸지 말고 제대로 공부하세요. 하영이 언니가 준비 많이 하는 것 같은데 실망시키지 마시구요."

"가려고?"

"네. 잠깐 가볼 곳이 있어요."

어디 가냐고 물어도 유진이는 그저 고개를 저을 뿐, 대답하지 않았다. 할 일이 없다고 날 따라온 거 아니었나? 유진이는 나와 하영에게 인사하고 사무실을 나섰다. 내가 집까지 데려다 주겠다고 해도 사양한다. 앉아서 공부나 착실히 하란다. 유진이가 사무실을 나간 후 중얼거렸다.

"거참.. 이상한 녀석."

그러자 옆에 있던 하영이 딴지를 건다.

"이상하다뇨. 똑똑하고 영리해 보이던데요."

"아니, 애초에 여길 오겠다고 고집부릴 때는 언제고...."

"마음이 바뀌었나 보죠."

하영은 내게 쉴 틈도 주지 않고 다시 OHP를 걸었다.

"자, 그럼 시작하겠습니다."

"윽... 그래요. 그럼."

그렇게 저녁까지 혹사당하는 시간이 흘렀다. 저녁은 유진이와 함께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가게에는 못 간다고 전화를 걸었다. 이제 거의 지배인급으로 대하고 있는 지나가 전화를 받았다. 그녀는 알아서 하겠노라고 대답했다. 조만간 그녀에게 가게에 관한 걸 일임해야 하려나 생각했다. 차를 몰아 집으로 돌아왔다. 유진이는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어디에 간 걸까. 연락을 해볼까 해도 녀석에게는 휴대전화가 없다는 게 생각났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니 다음에 데리고 나가서 하나 사줘야겠다. 일곱 시를 지나 여덟 시가 다 되어가서야 유진이가 들어왔다. 녀석을 맞이하며 물었다.

"어디 갔다 왔어?"

"안아줘요."

다짜고짜 안겨오는 유진. 녀석을 품에 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안아줘요."

"이미 안고 있잖아."

"더... 더 안아줘요."

의미를 파악했다. 녀석을 안고 그대로 안방으로 들어갔다. 안방에 들어온 이후 두 번 정도 했나? 글쎄. 잘 모르겠다. 처음에 한 번은 분명히 했고, 두 번째는 하려다가 잠들었는데 얼풋 잠에서 깨어 한 번 더 어울렸다. 그렇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내가 나갈 준비를 하고 있노라니 유진이도 외출 준비한다. 어디 가냐고 묻자 되려 날 이상하다는 듯이 쳐다본다.

"아저씨 회사 가는 거요. 같이 가야죠. 아니, 그럼 절 집에 두고 가려고 했어요?"

"음... 그건 아니지만, 학교는...."

"그만뒀잖아요. 벌써 까먹었어요?"

"그렇지."

"그럼 가죠."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얼떨결에 유진이를 데리고 사무실로 가게 되었다. 하영은 우리 둘을 보고도 별로 놀라지 않았다. 대신 어제 자신이 가르쳐 주었던 걸 모두 기억하냐고 되물을 뿐이었다.

"반쯤...?"

"반이면 곤란합니다."

그때부터 하영의 빠르고 무지막지한 질책이 들어왔다. 그리고 다시 또 시작된 "강의" 그리고 "공부". 점심시간이 되었다고 밥 먹고 하자는 유진이의 제안이 들어오기 전까지는 정신을 차릴 수 없었다.

"밥은 어디서 먹어요?"

유진이의 질문에 여태까지의 식사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여태껏 배달 도시락을 주문해서 먹거나 빵을..."

그러나 웬걸. 하영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말했다.

"제가 모시겠습니다. 식사하러 나가시죠."

"엑?"

여태까지 나한테 들이는 시간이 아깝다고 나가서 먹기는커녕, 안에서 빵 먹으면서도 하나라도 더 말하고 전달하려고 애쓰던 그녀다. 어째 나랑 단둘이 있을 때랑 대접의 레벨이 달라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일식 좋아하시나요?"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가며 하영이 말했다. 난 나에게 질문하는 줄 알고 대답하려고 했다.

"나 일식은 그다...."

"네."

......고개를 돌려 옆에 있는 유진을 쳐다본다. 유진은 어깨를 으쓱했다. 그러고 보니 과외 끝나면 초밥을 주문해서 먹던 녀석이었지. 이 녀석은. 그러자 하영이 휴대전화를 꺼내어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주차장에 세워진 하영의 차에 올라탔다. 사무실을 벗어나 10분 정도 달리자 시내 중심가에 도달했다.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입구를 가진 일식집 앞에 차를 세웠다. 하영이 우릴 안내했다.

"들어가시죠."

안으로 들어가니 낮임에도 불구하고 살짝 어둑어둑한 조명 아래 무척이나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랑하는 식당이었다. 지배인이 나와 우리를 영접했다. 그의 안내를 따라 안쪽으로 가니 다다미가 깔린 작은 방이 있었고 이미 상이 차려져 있었다. 우리가 자리에 앉자 지배인이 말했다.

"전화하신 대로 일품코스 지금부터 들여보내겠습니다. 술은 어떻게 할까요?"

하영은 유진에게 물어보더니 약한 청주 한 병을 주문했다. 내가 유진을 돌아보며 무슨 술까지 마시냐고 쳐다보았지만 하영은 딱 잘라 말했다.

"저와 유진 양이 마실 겁니다. 이따 들어가서 공부해야 하는 한석 씨는 안 드시면 되잖아요."

"......그럼 운전은....?"

"면허 없으세요?"

"있습니다만..."

"그럼 문제없겠네요."

할 말이 없다. 하영이 문제없다고 하니 문제가 없는 건 확실한데, 무엇 하나 제대로 반박하지 못하고 그녀에게 끌려다녀야 하는 나 자신이 가장 문제 많은 것 같아서 슬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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