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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녀와서 유진이랑 같이 계속 해요. 유진이도 당신을 좋아하는 눈치니까."
내 대답에 하영은 귀찮다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이번에는 제대로 주차장까지 내려와 그대로 차에 올랐다. 차를 그대로 출발시켜 서울을 벗어났다. 유진이가 있을 남쪽을 향해 차를 달렸다. 최대한 빨리 가기 위해 고속도로를 택했다. 충남 어디라는 것 말고는 정확한 위치는 잘 모르지만, 예전에 유진이가 묵었던 숙소와 수녀원의 연락처는 가지고 있었다. 근처까지 가서 연락을 하면 되지 싶었다. 도로를 따라 달리면서 아침에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
바로 어젯밤, 자신의 생부에 대한 것을 듣게 된 유진이는 밤새도록 뒤척이며 잠을 이루지 못했다. 생각이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라도 지금 와서 내 아버지가 누군지 알게 되면 아마 며칠은 잠은 못 자지 싶다. 그렇게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이 되자 유진이는 내게 말했다. 다시 선영을 보러 가겠다는 거였다.
"지난번에 가서도 못 보고 왔는데... 괜찮겠어?"
"이번에는 언니를 꼭 보고.... 이것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요. 내가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에 대해서 묻고 싶어요."
"선영이에게?"
"달리 이 일에 대해서 물어볼 사람이 생각나지 않아요."
날 빤히 쳐다보는 유진. 나 역시 녀석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밤새 제대로 잠을 못 잔 녀석의 얼굴은 초췌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렇지만 내가 녀석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더 이상 없었다. 하긴... 아무리 유진이가 날 좋아한다고는 하지만, 현재 남아있는 사람 중에서 녀석을 가장 오래 두고 보아온 사람은 단연 선영이었다. 그녀라면 유진에게 적절한 조언을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 별로 내키지는 않았지만 녀석이 가겠다는 걸 허락했었다. 그렇지만 지금은 하영의 허락도 받았겠다, 녀석을 혼자 보내지 않을 수 있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수녀원에 남자가 가는 게 조금 저어되기는 하지만, 일단 나는 밖에 있으면 될 거라 생각했다.
대시보드에 거치한 휴대전화의 플립을 열고 단축번호 4번을 눌렀다. 핸즈프리로 전환하자 차에 달린 스피커를 통해 리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나야, 한석. 물어볼 게 있어."
"오빠시군요. 뭔데요?"
"혹시 네 주변에 무슨 일 있니?"
"무슨... 일이라뇨?"
리사의 목소리가 살짝 떨리고 있었다. 통화품질이 좋지 않아 그런 건가 싶었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나도 덩달아 조금 긴장되었다.
"하영 씨가 내가 시키지도 않은 일을 했다고 하더라. 다른 게 아니고 너희 쪽을 살피는 사람을 하나 심었던 모양인데... 오늘 아침부터 연락이 안 된다고 하기에, 혹시 네가...."
리사는 길게 한숨 쉬었다.
"저희만 그런 게 아니군요...."
라고 말하며 말이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지만 약간 멍해졌다. 역시... 하영이나 리사나. 결코 쉬운 여자들이 아니었다.
"제가 지난번에 말씀드린 건 기억하고 계시죠?"
"바텐더와 너희의 관계 말이야?"
"네."
바텐더라는 약쟁이가 만드는 약은 굉장히 고급 환각제라서 비싼 값에 거래될 수 있는 물품이라고 했다. 리사가 속해 있는 조직이 작은 조직이 아니다 보니 그 안에는 몇 개의 분파가 있는데, 그중 한 분파가 그 물건을 거래하는 루트를 가지고 있다는 걸 포착했다는 이야기였다. 리사는 그들을 일망타진하는 대신 역으로 추적하여 바텐더의 위치를, 더 나아가 말세교의 잔당들을 찾으려고 했었다. 바텐더를 잡는 건 리사의 숙원 중 하나였고, 말세교 소탕은 내가 의뢰한 일이었다.
"전화로 길게 말씀드리기는 곤란하지만, 오빠 쪽이나 저희 쪽의 역탐지가 되려 저들을 자극한 모양이에요. 방금 이쪽에서 충돌이 좀 있었어요. 있는 인원들을 총동원하여 다행히 큰 사고는 막았지만, 몇몇 녀석들은 놓치고 말았어요. 그런데 잡아들인 녀석들을 다그치다 보니... 그들이 오빠에 대한 정보를 알고 있다는 걸 파악했습니다. 그래서...."
"나에 대한 정보?"
리사는 땅이 꺼질듯한 한숨을 쉬며 말했다. 그녀의 모습이 보이진 않지만, 상심한 표정이 눈에 그려지는 듯했다.
"미안해요. 오빠. 저... 다른 나쁜 뜻이 있었던 건 아니지만... 계속 오빠 주변을 탐지하고 있었어요. 그 꼬리가... 저들에게 잡힌 것 같아요."
"내 주변....?
리사가 나에 대해 파악하고 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다. 하영도 이미 비슷한 일을 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녀들이 나쁜 뜻을 가지고 한 게 아니라는 걸 알기에 굳이 탓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러나 지금 그녀가 전하는 위험은 사소한 게 아니었다. 그녀와 반대편에 서 있는, 그녀가 처단하려는 자들이 야기하는 위험이다. 물론 어느 정도는 그녀와 하영이 초래한 것이긴 하다. 리사도 그 점에 대해 이야기하며 거듭 사과했다. 그녀는 해결책을 제시했다.
"일단 태호 씨를 충남으로 보냈습니다. 아마 지금쯤 올라가고 있을 거예요. 충남 수녀원에 도착하는 대로 오빠에게 연락해서 경호를 맡도록..."
수녀원? 그게 무슨 소리지? 그녀가 아무리 내 주변을 정찰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실시간으로 감시하고 있었나? 문득 불안한 생각이 마음속에 피어난다.
"리사야! 자...잠깐만. 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충남에 간다는 건, 대체 언제 들었지?"
"오늘 아침이요."
"오늘 아침이라니! 난 아직 수녀원에 도착하지 않았어. 거기로 가는 중이긴 하지만 방금 차를 타고 출발했다고!"
"네에? 오빠가 오늘 이른 아침에 기차를 타고 수녀원에 가셨다는 연락을 받았는데요?"
리사의 황당하다는 반응을 전해 들으며 기가 막혔다.
"무슨 소리야! 나 조금 전에 서울을 빠져나와서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있는데! 기차를 타고 수녀원에 간 사람은 내가 아냐! 유진이라고!"
바로 다음 순간, 리사는 비명에 가까운 외침을 질렀다. 날 향한 건 아니었다. 아마도 수화기 너머에서 다른 누군가를 부르는 것 같았다. 나 역시 비명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악셀레이터에 얹은 발에 힘이 들어간다. 엔진의 RPM이 급격히 상승하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내 심장박동도 덩달아 빨라지기 시작했다. 가슴이 터질 것만 같았다.
"오빠, 진정하세요. 지금 운전 중이시죠?"
"너라면 이 상황에 진정하게 생겼니!!"
리사에게 소리를 버럭 지르고 말았다. 앞차가 빨리 가지도 않는 주제에 1차선을 막고 있다. 클락션을 크게 울리면서 악셀을 꾹 밟아 차를 바짝 댄다. 위협 운전에 놀란 앞차가 옆 차선으로 밀려나는 걸 확인하자마자 발에 힘을 준다. 3천을 넘어 4천에 가까이 가는 RPM이 괴로운 듯, 엔진은 굉음을 질러댄다. 스피커폰을 통해 들리는 리사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이런 상황일수록, 진정하셔야 돼요. 그래야..."
"알았어. 젠장! 네 말대로 진정이고 나발이고를 할 테니까, 빨리 대책이나 내놓으라고!!"
악셀에서 발을 조금 뗐다. 앞에 나란히 달리는 차 두 대가 있다. 차선이 모두 막혀 있어서 제치기 좀 어려운 상태였다. 갓길로 빠졌다가 그대로 속도를 상승시켜 두 차를 제끼고 달린다.
"태호 씨를 이미 보냈지만, 저도 지금 올라가도록 하겠어요. 만약 제 짐작이 맞다면... 그들은 분명 오빠를 잡으려고 간 사람들이에요. 그렇지만 최종 목표가 반드시 오빠일 리는 없어요. 그런 그들이 유진이를 발견한다면... 그 애를 통해 흥정하려고 할 겁니다."
"흥정이라니!"
"소리 지르지 마세요. 아직 무엇 하나 확인된 건 아니니까요. 자세한 건 뵙고 말씀드릴게요."
"놈들이 유진이를 대체 어떻게 하겠다는 건데!"
"그건... 역시 뵙고 말씀드리겠습니다."
리사는 차분한 어조로 수녀원이 있는 마을의 이름과 위치를 일러주었다. 고속도로에서 내려서 한참을 들어가야 하는 곳이었다. 국도도 아니라 지방도로를 한참이나 달려야만 도달할 수 있었다. 속도제한이고 뭐고 차가 낼 수 있는 최대의 속도를 내어 달려갔다. 가는 중에 연락처를 찾아내어 수녀원에 전화를 했지만 아무도 받지 않았다. 점점 더 불안해졌다.
엔진이 터질 정도로 밟아댄 덕분에, 정오가 채 되기도 전에 성 바오로 수녀원에 도착할 수 있었다. 작은 야산의 끄트머리에 자리한 그곳은 커다랗고 육중한 문이 입구에 놓여있었다. 차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여 문으로 달려가 두드렸다. 아무리 두드려도 반응이 없었다. 고함을 지르고 문을 부술 것처럼 두드리는 데도 아무 반응이 없다. 담장을 넘어볼까고 싶었지만, 그렇게까지 하면 안 될 것 같았다.
수녀원을 벗어나 예전에 유진이가 묵었다던 숙소를 찾았다. 작은 여관이었는데, 거기에도 유진은 없었다. 다시 수녀원으로 달려간다. 이번에는 문을 열어주지 않으면 불을 지르겠다고 고래고래 소리 질렀다. 그제야 안쪽에서 소리가 나더니 누군가 밖으로 나왔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한참 만에 나온 수녀님은 나이가 몹시 지긋한 분이었다. 그녀는 몹시 차분한 어조로 날 대했지만, 나는 예의를 갖출 정신이 없었다.
"혹시 오늘 낮에 아가씨 한 명이 찾아오지 않았습니까? 이름은 유진이라고... 키는 요만하고 귀엽게 생긴 녀석입니다!"
그러자 수녀님은 눈을 껌뻑이며 말했다.
"유진 자매님이라면, 예전에 스텔라 자매님을 찾아왔던 분 말씀인가요?"
스텔라? 그게 누구지? 그러나 지금 그 사람이 누군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수녀님의 말에 따르면 유진인 오늘 여기에 오지 않았다는 거다. 난 고함을 질렀다.
"유진이가 오늘 여기 안 왔단 말입니까? 분명... 오늘 아침에 서울에서 출발했습니다! 여기에 오겠다고요!"
수녀는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어제부터 침묵기도기간이라 아무도 방문을 받지 않습니다. 전화도 받지 않습니다. 안타깝지만... 찾으시는 분은 여기에 안 계신 모양이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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