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54화 (15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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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모독이 될지도 모르겠는데, 난 이 수녀님의 목이라도 졸라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말았다. 이쪽은 미칠 지경인데 어찌 이리도 차분하단 말인가. 가까스로 감정을 억누른 나는 수녀에게 내 연락처를 알려주었다. 만약 유진이가 오면 내게 연락을 해 달라고 말이다. 수녀님은 기도기간이라는 이유로 연락처도 받아둘 수 없다고 했지만 내가 사정을 하다시피 하여 연락처를 맡겼다. 수녀원 문에서 물러난 나는 미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기차역을 향해 차를 몰았다. 수녀원에서 기차역까지는 작은 야산 하나를 둘러가느라 거리가 좀 되었다. 무궁화호가 하루 네 번 정차하는 작은 시골 역의 역장은 드나든 사람을 거의 다 기억하고 있었다.

"키가 작고 예쁘장한 아가씨라...  오늘 오전에 도착한 85호에서 그런 아가씨 한 명이 내렸죠."

아침에 유진이가 입고 나갔던 옷차림을 물어 확인하니 틀림없었다. 유진이는 일단 이 기차역까지 도착했다. 만세라도 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

"혼자였습니까?"

"네. 일행은 없고 혼자더군요. 수녀원까지 가는 택시를 불러달라고 하기에 불러주었습니다만..."

역장은 뒤를 돌아보더니 다른 직원을 쳐다보며 물었다.

"택시가 왔던가?"

직원은 고개를 저었다. 역장은 날 돌아보며 어깨를 으쓱했다.

"여긴 워낙 시골이어서요. 건너 읍내 택시회사에 전화해서 택시를 부르기는 합니다만, 항상 오진 않아요."

간신히 유진이의 흔적을 찾았나 싶었는데 이렇게 또 끊겨버렸다. 기차역에서 얻은 소득은 유진이가 일단 이곳에 도착했다는 사실뿐이다. 역장에게 거듭 물어보아도 나올 이야기는 다 나온 듯싶었다. 난 역시 이곳에도 내 연락처를 맡기며 유진이를 보게 되거들랑 연락을 달라고 부탁했다. 역장은 부탁을 쾌히 들어주었다.

역을 나와서 주변을 돌아보았다. 초조한 마음을 가눌 수 없다. 주변을 돌아다니며 유진이의 행방을 수소문했다. 역 앞 광장 옆에 있는 작은 슈퍼마켓에서 유진이가 선물용 빵을 한 세트 샀다는 정보는 얻었지만 그뿐이었다. 아마도 수녀원에 갈 때 빈손으로 가지 않기 위해 산 게 분명하다. 어디로 가야 할지 몰라 허둥대던 나는 일단 다시 리사에게 연락을 취하기로 했다. 차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켰다. 배터리가 간당간당했다. 차량용 충전기를 꺼내어 연결하고 리사 전화번호를 눌렀다. 신호가 몇 번 가기도 전에 연결되었다.

"여보세요?"

"네. 오빠. 벌써 도착하셨나요?"

내가 조사한 사항을 짤막하게 일러주었다. 기차역에서 마지막으로 목격된 유진이. 그러나 수녀원이나 숙소에는 도착하지 않았다. 중간에 사라져버렸다.

"오빠. 태호 씨는 아마 삼십 분 이내로 도착할 거예요. 그리고 저는 두 시간 이내로 도착할 거구요. 역 앞 광장에서 기다리고 계세요."

리사의 성격상 침착한 어조인 건 십분 이해가 간다. 그러나 불안과 분노로 머릿속이 꽉 차버린 나로서는 리사의 그런 말투가 아니꼬워 견딜 수 없었다. 나도 모르게 이를 악물고 쏘아붙이고 말았다.

"네가 오면... 네가 오면 유진이가 무사하단 말이야? 애초에... 네가 날 감시하는 놈을 붙이지만 않았어도, 저놈들이 나에게... 아니, 유진이에게 그런 해코지를 할 이유가 없잖아!"

"오빠...그건...."

"됐어. 전화로 자꾸 이야기해봐야 해결이 되지 않겠지. 네 말대로 보고 이야기하자. 최대한 빨리 이쪽으로 와줘. 그리고 나 역시.... 방안을 강구해보겠어."

리사의 대답을 채 듣기도 전에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녀 혼자만의 잘못이 아닌데도, 자꾸 탓하게 된다.아무 일도 없으리라는 실낱같은 희망과 무슨 일이 있으면 어떡하지 ...하는 불안이 머릿속에서 끊임없이 오고 간다. 방 안 가득 엉킨 실로 가득하여 발 디딜 틈조차 보이지 않는 기분이다. 심호흡을 하던 나는 전화기를 다시 잡았다. 여기까지 이 사실을 알리긴 싫었지만... 그래도 해야만 할 것 같았다.

"여보세요?"

"한석 씨. 도착하셨나요?"

리사 못지 않게 침착함의 대명사인 하영의 목소리. 리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은근히 화가 치밀던 것과 달리 하영의 목소리는 날 진정시켰다. 또박또박 발음하는 그녀의 말투는 신뢰감마저 들었다.

"도착은 했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문제라뇨?"

"전에... 제가 한 가지 일을 의뢰했던 거 생각나죠?"

"부산 조폭들에게 시킨 일 말씀인가요? 말세교 추적?"

리사. 리사의 일. 그녀가 속한 조직. 그래, 그건 불법적이며 음성적인 조직이다. 조직폭력배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는 사람들이지. 리사에 대해 한때 호감을 가지고 있던 나는 의식적으로도 그 단어를 사용하지 않고 있었는데, 하영은 역시 가차 없다. 나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쪽의 일에 뭔가 문제가 생긴 모양입니다. 리사에게 대립각을 세우는 쪽에서 말세교를 지원하고 있었는데, 리사는 그걸 통해 녀석들을 추적하려고 했거든요. 그런데 되려... 역탐지를 당해버린 모양이에요. 오늘 아침 유진이가 서울을 떠나 이곳 수녀원으로 향했는데... 지금 중간에 사라지고 말았어요. 아무래도 그놈들의 짓인 것 같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가로이 저와 전화나 하고 계신 겁니까?"

하영의 말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애써 변명했다.

"한가롭게가 아니라구요! 지금 나름대로 조사를 다 해보고 리사가 보낼 추가 인원을 기다리고 있어요. 그들이 도착하는 대로 곧장 여길 수색해서..."

"저도 가보죠."

"네?"

"상관의 동거인에게 문제가 생겼으니, 이건 제 일이로군요. 회장님께 보고하고 곧장 그리로 가겠습니다."

하영은 내게 수녀원의 위치를 묻고는 전화를 끊었다. 거듭된 통화에서 정신적인 에너지가 모두 소모된 느낌이다. 차에서 내려 역사 앞에 있는 수도대로 갔다. 거기에 있는 음수대에 입을 대고 물을 마시고 있는데, 등 뒤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최한석."

굉장히 낮고 묵직한 목소리다.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거기에는 검은 옷을 입은 한 사내가 서서 날 바라고 있었다. 언제 내 등 뒤에 나타났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와 나의 거리는 불과 2미터도 채 되지 않았다. 발걸음 소리나 인기척이 전혀 나질 않았는데도, 그는 바로 내 지척에 서 있었다. 순간, 이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 짐작이 갔다. 뺨에 길게 그어진 어떤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의 몸놀림, 몸 전체에서 풍기는 느낌에서 이 사람이 예린과 같은 과에 속한 사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최한석 아닌가?"

"맞...다."

나는 상대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는데, 그는 이미 내 이름을 알고 있다. 단지 이름만 알고 있을까?

"보아하니 찾는 분이 있는 것 같군. 어때, 좀 도와줘도 될까?"

처음 보는 사이에 툭툭 내뱉는 반말은 그저 무례한 수준이 아니었다. 그는 마치 내가 자신의 아랫사람인 것처럼 하대를 하고 있었다. 이 느낌은 마치 혀를 낼름거리는 독사 앞에 놓인 쥐의 기분 같았다.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렇지만 물러날 수 없었다.

"당신이.... 유진이를 데리고 있나?"

"흐음. 당신이라. 기왕이면 당신들, 이라고 해주면 고맙겠군. 난 혼자가 아니니까."

"혼자가... 아냐?"

순간 리사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녀가 일망타진하려고 하였으나 빠져나간 조직의 분파가 있다고 했다... 분파라는 게 대체 몇 명일까. 적어도 이놈 혼자는 아니라는 거다. 그들은 리사를 노리고 있으면서 동시에 리사가 감시하고 있던 나의 존재를 알고 있었다.

"아가씨 이름이 유진이었던가? 귀엽게 생긴 아가씨더군."

"이 자식들이...."

"아아, 흥분하지는 마.  우리도 나름대로 원칙과 소신이 있는 녀석들이라 교환조건으로 사용할 사람에 대해서는 손을 대지 않아. 그래야 상호 신뢰가 싹트지."

"교환....조건?"

그의 말은 선뜻 이해가 가지 않았다. 빙그레 웃고 있는 그의 면상을 후려치고 싶은 기분은 불끈불끈 치솟았지만 간신히 억눌렀다. 일이 어려워지리라. 게다가 그가 가만히 맞고 있으리란 보장도 없다.

"돈이라면 얼마든지 주겠어. 그러니 유진이 그 아이를..."

"돈? 고작?"

그는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아까 이자의 얼굴을 보고 독사같다고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완전히 육식동물이 따로 없다.

"돈은 교환이 아니라 구매를 할 때 쓰는 거고, 난 분명히 교환이라고 했잖아. 눈에는 눈, 이에는 이. 그리고 여자에는 여자. 안 그런가? 다이다이로 해야지."

함무라비 법전을 그런데 쓰라고 있는 게 아닌데... 그나저나 여자라니....

"여자? 누구를..."

"누구긴 누구야, 리사 말이지."

"리사를....?"

교환조건.... 다이다이... 마치 사람을 하나의 재료처럼 다루는 이의 말은 퍽 듣기 불편했다. 그가 다루는 사람 한 명은 내게 있어서 세상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사람'인데 말이다. 남자의 말은 이어졌다.

"리사가 서울에 있는 동안 줄곧 네놈과 밀접한 관계였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부산에 내려온 다음에도 네놈에게 미련을 떼지 못하고 있다는 것도 말이지. 그러니 네놈이라면, 리사를 불러낼 수 있다. 안 그런가? 내 말이 틀리면 틀렸다고 해봐."

틀렸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러나 날 향한 리사의 마음을 모르지 않은 나는 그만 주저하고 말았다. 간신히 이를 악물고 소리쳤다.

"리사를 불러내라고? 내가 부른다고 걔가 꿈쩍이나 할 것 같아?"

"듣자하니 이미 부산을 출발했다고 하더군. 안 그래?"

이 자는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걸까. 깊은 절망감을 느꼈다.

"그러면 유진이를 내어주는 조건이...."

"그래. 지금 아주 예쁘게 포장해놓은 그 아가씨를 곱게 내어주지. 리본까지 매달아서 말야."

"포장...리본? 그게 사람을 상대로 할 소리냐?"

발끈하여 외쳐보지만 되려 비웃음만 사고 만다. 그는 껄껄 웃으며 말했다.

"할 소리냐고? 푸하하. 역시 네놈은 리사가 무슨 일을 하는 사람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군그래. 리사가 사고파는 것 중에서 가장 이문이 많이 남고 대량으로 처리하고 있는 건 바로 사람이야. 백당은 그런 곳이라고. 난 그저 한 명을 거래하자고 이야기하고 있을 뿐인데, 뭐가 어쩌고 저째?"

그는 안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굳어버렸다. 그건 내가 얼마 전에 유진이에게 사준 목걸이였다. 마음에 들었다며 한사코 몸에서 떼지 않던 것이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널 지켜보고 있다. 리사가 도착하거든 주변을 모두 물리고 그년과 단둘이 기차역 뒤쪽에 있는 공터로 나와. 명심해. 단둘이야. 만약 쓸데없는 짓을 해서 다른 사람이 한 명이라도 붙는다면 유진이란 아가씨를 다시는 볼 수 없을 거야."

그는 내게 대답을 요구하지도 않았다. 미처 받아들지 못한 사이에 유진이의 목걸이는 땅에 떨어졌다. 내가 허리를 굽혀 그것을 줍는 동안, 남자는 내게서 멀어졌다. 다가올 때와 마찬가지로 순식간에 사라졌다. 고개를 들고 주변을 보았을 때, 남자는 이미 보이지 않았다. 마치 귀신에 홀린 듯했다. 그러나 내 손에는 얇디얇은 금색 줄의 목걸이가 분명히 남아있었고, 난 이 목걸이의 주인을 다시 되돌려 받아야만 한다. 선택의 순간까지 남은 시간이 빠르게 줄어들어 간다. 아직 채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나를 재촉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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