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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55화 (155/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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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한석 님?"

"......."

"최한석 님?"

"네?!"

깊은 생각에 빠져 있던 터라 날 부르는 소리에 재깍 반응하지 못했다. 고개를 들어 앞을 보니 일전에 카페에서 보았던 큰 덩치의 사내가 서 있었다. 언제 곁에 온 걸까. 그의 차림은 역시 한결같은 검은 옷에 선글라스. 예린도 그렇지만 이들의 복장은 일종의 교복 같은 건가 싶었다. 앞서 리사의 전화에서 들었던 이름을 기억해낸다.

"태호 씨...?"

남자는 내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네. 아가씨가 보내서 왔습니다. 사정은 전화로 모두 들었습니다."

"리사도 곧 온다고 했으니 기다리죠."

그러자 그는 주변을 둘러보고 말했다.

"아직 시간이 있으니 저 먼저 주변을 탐색하고 있겠습니다. 무슨 일이 있거나 시키실 일이 있으면 이리로 연락 주십시요."

남자가 내민 명함은 예전에 예린과 리사에게서 받은 것과 같은 종류였다. 경남산업개발이라는 사명 아래 박태호 부장이라고 써있었다. 이 남자... 기껏해야 서른이 좀 넘었을까? 아니다. 낮고 걸걸한 목소리 때문에 잠깐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다시 자세히 보니 선글라스 때문에 가늠은 쉽지 않지만 말투나 머리 스타일을 볼 때 그렇게 나이 들어 보이는 인상은 아니었다. 어쩌면 20대 초중반쯤 되었을려나? 그러고 보니 나보다 한 살 어린 예린도 무슨 부장인가 그랬다. 리사는 실장이라고 했고. 역시 일반적인 회사는 아니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박 부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나요?"

"격식 차려 부르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냥 태호 라고 부르십시요."

"아, 그래도 저기...."

"편하게 대해 주십시요."

그는 내게 몹시 깍듯했다. 아마도 날 리사와 같은 레벨로 놓고 보는 것 같았다. 내 짐작이 맞다면 그에게 있어 리사는 하늘 같은 존재일터. 그러니 내게 이렇게 대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명색이 윗사람인 내 말이라고는 당최 콧구멍으로도 들어먹지 않는 하영이라는 까칠한 부하만 두고 있다가 이런 사람이 나타나니 신기한 기분마저 들었다.

"그럼 태호 씨. 일단은... 좋을 대로 하세요. 전, 여기서 리사를 기다리겠습니다."

"네."

태호는 내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몸을 돌려 역 광장 맞은편으로 걸어갔다. 덩치와 어울리지 않게 발걸음이 몹시 가볍고 날렵했다. 내게 가까이 오는 동안 기척을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었다.

광장 입구에 차를 세워두고 본넷에 걸터앉아있던 나는 그의 등을 보며 생각했다. 리사는 분명 예린을 데리고 올 것이다. 예린 말고도 추가 인원을 얼마나 더 데리고 올지는 모르겠다. 어느 정도의 인원, 어느 정도의 힘을 가진 이들이 올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 수가 얼마가 되던가에 여전히 과제는 남는다. 과연 이들을 가지고 그들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인가. 유진이는 이미 저들에게 잡혀있다. 그런 유진이에게 아무런 탈 없이... 그들에게서 돌려 받을 수 있을 것인가.

머릿속에 든 나쁜 생각을 털어내기 위해 고개를 좌우로 흔든다.

그래야만 한다. 그래야만 한다. 한 톨의 의심도 나 스스로에게 허용하지 않겠다. 난 반드시 유진이를 작은 상처 하나 없이 되찾아와야만 한다. 유미가 자신의 생명을 걸고 지켜낸 유진이다. 이 세상에서 믿을 사람이라고는 단 한 사람, 나밖에 남지 않은 아이다. 그 아이에게 나쁜 일이 생기는 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막아야 한다. 그게 불가능하다고 생각되면, 그런 가능성이 아주 조금이라도 보이게 되면...

난 리사를 배신해야 한다.

이 생각에 도달하자 원인과 출처를 알 수 없는 격렬한 혐오감이 나를 감싸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고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가을 하늘은 지나치게 높고 푸르다. 너무 맑고 깨끗하여 그런 하늘 아래에서 내가 이런 더러운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이 부끄러운 지경이었다. 애써 이성적으로 생각하며 억누르려고 해도 생체적인 혐오감이 내 정신을 어지럽힌다. 왜일까. 리사가 내게 대체 어떤 존재이길래 그럴까. 대체 그녀와 내가 어떤 사이길래 나 자신을 향해 이런 생리적인 혐오감마저 드는 걸까.

그래. 난 리사와 함께 밤을 보낸 적이 있다. 그녀의 안에 나를 밀어 넣고 쾌락을 구한 적이 있다. 그녀가 날 원했고, 나 역시 그녀를 원했기에 이루어진 행위였다. 한때 서로를 향해 애틋한 마음을 품기도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였다. 그후에 서로가 생각하는 바가 달라 길이 엇갈리고 말았다.

리사에 대해 생각한다. 쌍둥이 동생과 공유되는 이상한 감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자신이 가진 특별한 '감'에 따라 행동한다는 그녀는 분명 놀라운 사람이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인 동시에 이런저런 사건으로 인하여 나와 단단히 얽히고 만 사람이다. 그녀는 그랬다. 날 보면 남 같지 않다고. 해맑은 표정으로 웃으며 날 향해 오빠라고 부르는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때면, 나 역시 이런 동생 하나쯤 있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여러 번 했었다.

그런 그녀를 팔아넘겨서라도 - 이런 표현을 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놈들에게 리사를 넘긴다는 게, 팔아넘긴다는 말 말고는 다른 말로 떠오르지 않는다. - 유진이를 구해야 한다고 생각하니 그 크기를 알 수 없을 정도의 죄악감이 내 목을 조여온다.

"젠장!!!"

애꿎은 본넷을 내려치며 소리 질러 본다. 가슴 속 담겨 있는 무언가를 뱉어내고 싶다. 그러나 그건 쉽지 않았다. 알 수 없는 끈적함이 자꾸만 내 안에 있고, 목에 걸려 나를 괴롭게 한다. 울고 싶지만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그때 차 소리가 났다. 광장 앞 도로에 검은 색 차 한 대가 마악 도착했다. 눈에 익은 차다. 아니나 다를까. 문이 열리고 차에서 내린 두 여자는 내가 아는 사람들이었다.

"리사야..."

아직 마음의 준비도 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너무도 빨리 도착해버렸다. 그만큼 서둘러 이쪽을 향해 달려와준 거라 생각은 하지만... 여전히 가슴 한편이 무겁고 착잡했다. 그녀를 보는 일이 이리도 괴로운 일이 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짧은 플레어 스커트에 블라우스를 차려 입은 리사는 내게 다가오며 말했다.

"오빠. 많이 기다렸죠?"

주변을 둘러본다. 놈들.... 이걸 지켜보고 있겠지? 입술이 바짝바짝 마른다. 허튼 소리가 나오지 않도록 최대한 말을 아꼈다.

"조금은...."

"미안해요. 최대한 빨리 온다고 왔는데.... 태호 씨는 도착했지요?"

"응. 먼저 도착해서 주변을 돌아보고 온다더니 아직 오지 않았어."

그런데 뭔가 좀 의아했다. 방금 도착한 리사와 예린 말고는 다른 사람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단둘이 온 거야?"

리사는 예린 쪽을 향해 시선을 한 번 던졌다가 날 다시 보았다.

"태호 씨도 있잖아요."

"아니, 그러니까.... 너희 단 둘... 그리고 태호라는 사람까지 셋이서 놈들을 상대할 생각이냐고."

기가 막혔다. 상대방이 몇 명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버스 한 대 분량의 인원 정도는 동원할 줄 알았다. 예전에 유미의 장례식장에 왔던 인원을 떠올려본다. 그 정도만 왔어도 해 볼 만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자못 든든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고작 세 명이라니.... 내 표정에 서린 불만을 읽은 건지 리사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충분해요. 그 두 사람이라면요."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저놈들이 몇 명인 줄 알고?"

"제 생각에 열 명 정도라고 봐요. 부산에서 빠져나간 인원이 그 정도 되니까요. 그래보았자 어중이 떠중이들이에요. 문제없어요."

태연하게 대답하는 리사를 보며 여태까지 고민하던 나 자신이 바보같이 느껴졌다. 예린과 태호가 대체 어떤 능력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열 명을 고작 두 명이서 상대하겠단 말인가. 게다가 저쪽에는 인질도 있는데?

"리사... 난 아직 너에게 화가 풀린 게 아냐. 알고 있어?"

"네."

"그래서 이 일을 수습하는 데에 네가 어느 정도 성의를 보여주길 바랐어. 그런데 넌 지금 고작 두 명을 데리고 와서 이 일을 처리하겠다는 거니?"

"고작 두 명이라뇨. 저도 왔는걸요."

이런 생각을 하면 안 되는데... 따박따박 자기 할 말을 하며 대꾸하는 리사의 말투가 갑자기 얄밉게 느껴졌다. 주먹을 꽉 쥐었다. 손에 힘을 주지 않으면 그녀의 뺨이라도 치게 될 것 같은 기분이었다. 대신 심호흡을 했다. 그리고 결정을 내렸다. 리사의 계획은 알 수 없다. 내 계획대로 간다. 다른 방법은 생각나지 않았다.

"잠깐, 얘기 좀 할 수 있을까? 단둘이서 말야."

그녀가 대체 어떤 신묘한 수가 있어 저들을 상대하겠다는지 알 수 없지만 모르긴 몰라도 실패의 확률은 지극히 높아 보였다. 여기서 말하는 실패란 거창한 게 아니다. 내가 사랑하는 유진이에게 털끝 만큼의 상처라도 생기면, 그게 곧바로 실패인 거다.

"그러지요. 근데 여긴, 커피숍도 없네요? 정말 시골이군요."

마치 놀러온 사람처럼 한가롭게 주변을 둘러보는 리사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를 넘긴다는 죄책감으로 괴로워하던 나 자신의 멍청함을 탓해본다. 그래. 아무리 리사가 대단하다고 한들 고작해야 올해로 스무 살인 여자애다. 그녀에게 너무 많은 기대를 한 걸지도 모르겠다. 마음을 가다듬었다. 의식적으로 호흡을 몇 번 더 들이쉬고 마신 다음, 준비한 말을 꺼냈다.

"장소를 좀 옮겼으면 해. 사람들 눈이 없는 곳으로. 기왕이면 예린이도.... 없게 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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