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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in Route
"그러죠."
리사는 순순히 날 따라 나섰다. 여태껏 내 왼손에 들고 있던 목걸이를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리사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기차역을 지나 뒤쪽으로 향했다. 예린은 차에 기대 서 있었다. 우리를 따라오지 않고 가만히 있었다. 그녀의 선글라스가 햇빛을 받아 번뜩이고 있었다. 기차역을 지나자 그녀의 시선에서 벗어났다.
아까 날 찾아왔던 놈이 이야기한 대로 기차역 뒤에는 너른 공터가 있었다. 무슨 공사를 하는 중인 듯, 공터의 둘레에는 토목공사용 자재가 쌓여 있었다. 공터의 가운데에 도착하자 리사가 날 보며 말했다.
"이 정도면 좋겠네요. 하실 말씀이 뭐죠?"
"우선... 묻고 싶어. 어떻게 유진이가 저놈들에게 넘어간건지."
리사는 짧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제게는 형제들이 있어요.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그래도 형제라고 칭할 정도의 분들이죠. 그중에는 예린이 언니와 태호 씨도 있죠. 그중 막내라고 할 수 있는 분에게 오빠의 감시를 맡겼거든요. 믿을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그렇지만 그분이 저쪽에 넘어갔는지는 모르고 있었네요. 부산에서 병구 아저씨 세력이 무너지자 불안했던 모양이에요. 유진이가 오빠에게서 떨어지는 걸 확인하곤 저한테 거짓 보고를 보냈죠. 그렇게 시간을 벌고 그 사이에 유진이를 중간에 가로챈 모양입니다. 여기까지가, 제가 파악한 전부예요."
형제? 병구 아저씨? 내가 모르는 이야기투성이라 그녀의 긴 이야기를 듣고도 갈피가 잡히지 않는 건 여전했다. 대신 다른 걸 묻기로 한다.
"날 왜 감시한 거야? 내가.. 너한테 해코지라도 할 사람으로 보였단 말야?"
"해코지라뇨... 그런 건 절대 아니에요."
리사는 쓸쓸한 표정으로 날 올려다보았다. 그녀의 그런 표정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가슴이 옥죄여 드는 기분이다. 그녀는 날 마음에 두고 있었다. 그걸 알고도 모른 척 해왔다. 그리고 그녀는 날 믿고 있겠지. 나란 놈을, 절대적으로 믿고 있겠지. 그러니 그 먼 길을 한달음에 달려와 날 따라 이렇게 왔을 것이다. 이제 그런 믿음을 저버려야 한다니. 난 지옥에 떨어져도 할 말이 없다. 그렇지만 이미 마음을 단단히 먹은 후다. 내가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동안 그녀는 자신의 이야기를 이어갔다.
"미련이 남아서 그랬어요. 미안해요, 오빠. 전에도 이야기했지만.... 저는 그저 자연스러운 방법으로 오빠를 대할 수가 없나 봐요. 어깨에 힘을 빼자고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아요."
언젠가... 내 방에서 날 향해 묘한 소리를 늘어놓던 리사의 얼굴이 떠오른다. 그때의 표정도 지금과 다를 바 없었다. 그녀는 변하지 않았다. 변한 건, 나였다.
"그 결과.... 일이 이렇게 어렵게 되었으니, 제 나름의 책임을 지겠어요. 오빠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있어주길 바라요."
"무슨 소리야, 그게?"
"말 그대로예요. 가만히. 계셔주셨으면 해요."
말을 마친 리사는 몸을 돌렸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이 바람에 나부끼며 내 앞에서 흩어졌다. 그녀는 목재가 쌓여있는 쪽을 쳐다보며 외쳤다.
"병구 아저씨는 아직인가요? 이 정도면, 알아서 나와주실 거라 생각했는데요."
몹시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그 작고 여린 체구에서 어찌 그런 소리가 나오는가 싶었다. 그녀가 외치는 소리가 무슨 소리인가 싶었는데... 저쪽에서 대답이 들려왔다.
"역시, 눈치챘나?"
세상에나.
목재 더미 뒤에서 누군가 나타났다. 한 명이 아니었다. 예린이나 태호와 마찬가지로 검은 옷을 입은 사내들이었다. 다들 평균 이상으로 건장한 체격이다. 그리고 그중에는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얼굴도 있었다.
"아저씨!!!"
너, 인마... 내가 오빠라고 부르라고 했잖아.... 몇 번을 말하니.
유진이가 팔을 등 뒤로 하고 붙들린 채, 그들 사이에 서 있었다. 유진이를 붙들고 있는 남자는 아까 봤던 그 사람이었다. 유진이의 얼굴이나 옷은 말끔했다. 팔을 붙들린 거 말고는 다친 곳도 눈에 띄지 않는다. 저들이 말한 게 맞는 모양이다. 다만 눈가가 부어있는 걸로 보아 한참 울었던 모양이다. 지금 날 보더니 더 울기 시작한다. 울음 섞인 목소리로 날 몇 번이고 부른다.
"아저씨! 아저씨!!"
유진이의 외침이 들려왔지만 난 목이 메어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리사는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로 외쳤다.
"여전히 사람 붙잡는 걸로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시네요. 그런 방식은 구식이라고 몇 번이나 말씀드린 거 같은데요. 병구 아저씨."
남자들 가운데 머리가 희끗희끗한 한 사내가 코웃음을 치며 리사를 쏘아보았다.
"구식이라도 효과적이지. 지금만 해도 철옹성 안에만 처박혀 있던 네년이 여기까지 기어 나오게 만들었잖아?"
"그럼요. 남자 여럿이서 여자아이 하나를, 그것도 이쪽 애도 아니고 일반인 아이를 겁박하여 붙들어뒀으니 이 얼마나 효과적인가요? 전 전혀 상상도 못 할 효과적인 방법이네요."
그가 병구라는 사람인 모양이었다. 리사는 그를 아저씨라 부르며 존칭을 붙였지만 그녀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전부 그의 무능을 쏘아붙이는 내용이었다. 듣고 있던 병구의 얼굴이 벌겋게 물들어갔다. 리사가 이렇게 독설을 잘 퍼붓는 애인 줄 몰랐다. 역시 난 리사에 대해 절반도 모르고 있었다. 결국 병구는 폭발하고 말았다.
"닥쳐! 이년아! 여기까지 와서 네년 잔소리를 듣고 싶은 게 아냐!"
"안 듣고 싶으면 절 부르지 말았어야죠!"
"이익!!!!"
한마디도 지지 않는 리사. 그녀를 향해 더이상 말을 섞어봐야 자기만 손해라는 걸 깨달은 모양이다. 병구는 유진이를 붙들고 있는 사내를 향해 눈짓을 보냈다. 그는 유진이의 팔을 붙들은 손에 힘을 주었고, 유진이는 얼굴을 찡그리며 신음을 흘렸다. 참다못한 나 역시 버럭 소리를 질러버렸다.
"야이, 개새끼들아! 니들이 그러고도 사내새끼야? 그런 작은 아이를 괴롭힐 거면 불알이나 떼어 주둥이에 처박은 다음에 해!!"
사내들의 험악한 시선이 날 향해 쏟아졌지만, 나 역시 지지 않고 쏘아보았다. 그러자 리사가 내 팔을 두드리며 말했다.
"오빠. 가만히 있어달라고 했잖아요."
"....알았어."
리사는 내 팔을 잡아당겼다. 그녀를 돌아보자 그녀는 두 팔을 뻗어 내 얼굴을 잡았다.
"가만있기로 했죠? 그러니... 끝까지 가만있어줘요."
그녀의 입술이 내게 다가왔다. 뒤꿈치를 들은 걸까. 그냥은 키가 닿지 않을 테니... 그녀의 입술이 내 입술에 와 닿았고, 이내 떨어졌다. 그녀는 내게서 뒷걸음치며 말했다.
"그럼, 안녕."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그대로 몸을 돌린 리사는 병구를 향해 외쳤다.
"동시에 교환하죠! 제가 그쪽으로 갈 테니, 그 아이도... 이쪽으로 보내세요. 둘 다 동행 없이. 그대로 바꾸는 거예요."
병구는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를 붙들고 있던 사내가 손을 놓았다. 당황한 표정의 유진이가 어찌할 바를 모르자 리사가 소리쳤다.
"이쪽으로 와. 거긴 네가 있을 곳이 아냐. 네가 있을 곳은... 여기 오빠 곁이야."
리사가 걷는다. 리사가 앞으로 걷는다. 그녀가 걷는 만큼, 내게서 멀어져간다. 멍하니 있던 유진이도 걷기 시작했다. 유진이와 리사가 걷는 방향은 서로 반대. 리사가 내게서 멀어지는 만큼 유진이가 내게 가까워진다.
이 순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 순간, 난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내게 다가오는 유진이를 본다. 내가 아무리 아무 능력이 없다지만 유진이를 이런 식으로 되찾게 될 줄은 몰랐다. 부끄러움이 마른 들판에 붙은 불처럼 일어난다. 녀석을 똑바로 바라볼 수 없다.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유진의 시선은 내가 아니라 줄곧 리사를 향하고 있었다. 마리를 처음 보자마자 각을 세우던 녀석이었지만, 이상하리만치 리사를 처음 보았을 때는 조용했던 걸로 기억한다. 내가 농담 삼아 유진이를 암표범 내지는 암호랑이로 속으로 칭하곤 하는데, 정말 저 녀석에게는 동물적 육감이 있는 걸지도 모르겠다. 둔하고 멍청한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는 동안에도 리사가 얼마나 무서운 아이인지 감으로 느낀 걸지도 모른다.
가을 햇빛이 이리도 따가운 줄 미처 몰랐다. 목 뒤가 뜨뜻하다. 그런 동시에 등줄기가 서늘하다. 리사는 내가 이렇게 나올 줄 알고 있었던 걸까. 그래서 내가 이쪽으로 유인했을 때 순순히 따라온 걸까. 자신의 걸음 하나하나가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는 걸까. 그녀는 많은 사람을 책임지는 자리에 있다. 예린이 절대 그녀 곁에서 떨어지지 않았던 이유는 그런 그녀를 경호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중요한 자리에 있는 리사가 홀연히 자기 자신을 던지게 되다니. 이게 모두 내 탓이다. 내 잘못이다.
공터에 있는 모두 꼼짝도 않고 두 여자를 지켜보고 있다. 리사가 저쪽에, 유진이가 이쪽에 도착하면 난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고민한다. 그대로 유진이만을 챙겨 서둘러 이 자리를 떠나야 하는 걸까. 리사에게 인사를 해야 하나. 아니, 인사라고 하는 것도 웃기다. 그녀가 저쪽으로 넘어간 이상, 무사하기란 쉽지 않다. 그런 그녀에게 안녕이라고 말하고 그대로 떠나는 건 사지로 밀어 넣는 거나 마찬가지. 그렇다고 여기서 어떻게 할 수도 없다. 가능한 빨리 기차역 앞으로 뛰어가 예린이를 불러와야 할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 속이 복잡했다.
병구 일행과 나의 거리는 대략 50여미터. 리사와 유진이의 걸음 속도는 비슷했다. 그리하여 20여미터쯤 되었을 때, 리사와 유진이는 스쳐지나....아니, 지나야 했는데, 지금 저 상황은 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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