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60화 (16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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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정석은 기가 막혔다. 엄마 어디 갔느냐고 빽빽 울어대는 딸내미의 울음소리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황망한 표정으로 빈소를 지키고 앉아 있으면서 간신히 생각한다. 신이라는 게 정말 있다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나. 사람 앞날은 모르는 거라고는 하나 아무리 그래도 말이다. 이럴 수는 없다. 정석은 그렇게 생각하며 신을 저주했다. 어떻게 한 사람에게서 배우자를 두 번이나 앗아갈 수 있단 말인가. 그게 가능키나 한 소리인가.

끝도 없이 신을 저주해 보지만 신은 그에게 아무런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평소엔 있다고 믿지도 않은 사람에게 들려줄 목소리 따위는 없는 것이다. 정석은 갈증을 느꼈다. 그러나 물을 마시진 않고 대신 술만 연신 들이킨다.

"에헤이, 이 사람아. 그만 좀 마셔. 그러다 산 사람 잡겠네."

누군가 정석의 손에 들린 소주병을 빼앗았다. 글라스를 미처 다 못 채운 소주의 맑은 찰랑거림을 바라보던 정석은 그걸 훌쩍 또 마셔버린다. 방금 마신 게 술인지 물인지 이제 모를 지경이다. 소주병을 뺏은 사람은 장탄식을 하며 정석을 나무란다.

"애들을 생각해서 자네라도 몸을 추슬려야지. 응? 아니 그런가."

정석을 고개를 들어 앞에 앉은 사람을 쳐다보았다. 집주인 윤 씨였다. 몇 년 전부터 알고 지내온 참 고마운 분이다.

"와주셨군요.... 감사합니다. 제가 인사를...."

인사를 하려고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정석은 순간 휘청거리고 말았다. 윤 씨가 황급히 손을 뻗어 그런 그를 부축했다. 그리고 다시 앉게 했다. 그는 정석의 어깨를 두어 번 두드리며 말한다.

"됐네. 효진 엄마에게는 내 이미 인사했으니 그걸로 되었네. 나도 술이나 한잔 주게."

이제 아홉 살이 되어 눈치가 제법 있는 태근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얼른 소주잔을 가져왔다. 윤 씨는 그런 태근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정석은 윤 씨의 잔에 소주를 채웠다. 그걸 가만히 바라보고 있는 윤 씨의 주름이 그 깊이를 더한다. 그는 소주잔을 들고 말했다.

"어째.... 황량하구먼."

"그렇죠. 뭐....."

가버린 부인이나 지금 있는 정석이나 둘 다 가족이 없기는 매한가지였다. 부인과 달리 정석은 날 때부터 고아는 아니었으나 자라는 와중에 조실부모한 한데다가 형제가 전혀 없었다. 먹고 사는 게 바빠 그리 가깝지도 않은 먼 친척들과 연락 챙기기도 쉽지 않았다. 일가친척과 마지막으로 연락한 것은 태근의 엄마였던 첫째 부인과의 결혼식 때가 마지막이었으니 거의 십 년이 흘렀다. 그렇다고 남들처럼 번듯한 직장에 다니는 정석도 아니다 보니 찾아올 동료도 없었다. 거래처라고도 할 수 있는 승화물류에서 조의금이 인편으로 왔을 뿐이다. 정석의 사무실에서 경리로 있는 춘희는 이미 다녀갔다.

그러니 이제 찾아올 사람은 지금 온 집주인인 윤 씨가 끝이다. 동네 사람들은 이미 낮에 다녀가고 더는 없었다. 지금 영정에 사진으로 자리하고 있는 효진 엄마를 정석에게 소개해 준 사람도 윤 씨였다. 동네 유지로서 이곳저곳에 아는 척을 많이 하러 다니는 윤 씨의 성격상 자기 집에 세 들어 사는 홀아비를 그냥 두고 볼 수 없었다.

어느 날 그는 정석을 불러 자기 집에 식모로 있다가 다른 곳에 일하러 간 아가씨가 있단 말로 서두를 떼었다. 정석이 특별히 싫은 내색을 하지 않자 윤 씨는 둘을 만나게 해주었다. 그녀는 말 그대로 집도 절도 없는 고아였지만 정석은 개의치 않았다. 차분하고 말 없는 그녀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도 그리 내세울 게 많은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여자는 몇 번의 만남 후에 정석에게 시집왔다. 일 년도 채 되지 않아 그녀는 효진을 낳았고, 그렇게 네 가족이 되었다. 나름대로 단란하게 살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그 단란함이 산산이 깨져 버렸다.

"발인은 언제 하나?"

"곧 할 겁니다. 길게 두어보았자... 올 사람도 없어요."

윤 씨가 혀를 차며 말했다. 오늘 새벽, 변을 당했으니 내일 나가면 이일장이 된다.

"경찰은 뭐라고 하던가?"

"조사를 해봐야 안다고 합니다만... 그냥 형식적으로 둘러보고 가더군요. 개새끼들."

"뺑소니라며?"

"....네."

나지막이 욕을 중얼거리는 정석을 보고 윤 씨는 다소 움찔하더니 화제를 돌렸다.

"그래도 이 사람아, 삼일장은 해야..."

"저, 내일부터 다시 일 나갑니다."

윤 씨의 말을 끊으며 정석이 내뱉듯이 말했다. 공장에서 물건을 받아 자재상 등지에 넘기거나 또한 그 자재를 필요로 하는 곳을 다니며 영업 뛰는 게 정석의 일이었다. 발품을 파는 대로 돈이 나온다. 한 달 내내 쉬지 않고 그렇게 돌아다녀야 네 식구 입에 그나마 풀칠을 할 수 있었다. 이제 입 하나는 줄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일을 쉴만한 처지는 못 된다. 윤 씨가 딱하다는 표정으로 자기 세입자를 쳐다보았다.

"이 사람아. 그래도 정신 좀 추스르고 나야 일이 되지 무작정 나간다고 그게 다 되는 겐가? 게다가 애들은 어쩌고?"

".....다 컸습니다. 밥이나 차리고 나가면 알아서 찾아 먹을 나이입니다."

윤 씨는 고개를 돌려 두 아이를 쳐다보았다. 엄마를 찾으며 울다 지친 효진은 한쪽 구석에 쓰러지듯 누워 잠을 자고 있었고 태근이는 그래도 오빠라고 그런 동생의 곁을 지키며 토닥여주고 있었다.

"아홉 살, 다섯 살인가?"

"네."

윤 씨는 뭔가 말을 꺼내려다가 한참을 주저했다. 정석은 다른 사람의 이런 기척을 굉장히 빨리 알아차리는 편이다. 그런 쪽으로 타고났기도 했거니와 오랜 영업활동으로 사람의 기척을 파악하거나 의중을 꿰뚫어 보는데 이골이 난 그였다. 정석은 앞에 놓인 편육 한점을 집어삼키고 물었다.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습니까, 어르신?"

"어허.. 그게 말여.... 일단 나쁘게 듣지는 말게."

"하십시요, 말씀."

윤 씨는 꽤 주저하다가 이내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자기 먼 친척 중에서 아이가 들어서지 않아 결혼하고도 둘이만 지내고 있는 부부가 있는데 제법 잘 산다고 한다. 거기는 딸을 가지고 싶어한다고, 그러면서 정석에게 남자 혼자서 둘이나 키우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이야기를 자꾸 반복한다. 정석은 이게 효진이를 어디 보내지 않겠냐는 뜻이라 생각했다.

"지금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정석이 짙은 눈썹을 치켜뜨며 사납게 쏘아붙였다. 윤 씨는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나쁜 뜻으로 한 소리는 아닐세. 그저 자네 혼자서 애 둘 거두는 게 힘겹지 않을까 해서 말야. 효진이처럼 귀여운 녀석이면 어디 가서 미움받지도 않을 테고..."

그러자 정석이 들고 있던 나무젓가락을 탁자에 세게 내려놓았다. 턱- 하는 거친 소리에 저쪽에 있던 태근이가 움찔해서 이쪽을 쳐다볼 정도였다.

"효진이는 제 딸입니다! 누가 뭐래도요! 어디 안 보냅니다."

"아, 알았다. 역정은 내지 말게."

"제가 아무리 입을 거 못 입고 먹을 거 못 먹더라도 아이들은...."

정석의 목소리에 물기가 묻어나온다. 그러면서도 눈매가 사납다. 상처 입은 짐승을 건드린 꼴이다. 윤 씨는 자신이 때를 잘못 선택했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는 혀를 차며 정석을 만류했다.

"내가 실언했네. 용서하게나. 아니면 내가 낮에는 효진이를 좀 봐줄까?"

"어르신 일도 바쁘신데.. 마음만 받겠습니다."

정석은 다시 손을 뻗어 소주병을 들고 앞에 있는 글라스를 채운다. 그의 거친 기세에 이번에는 윤 씨도 말리지 못하고 그저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다. 정석은 그대로 잔을 들이켜고 긴 트림을 내뿜었다.

"차린 건 없지만.... 드시다 가시죠. 전 잠시 실례하겠습니다."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윤 씨는 인상을 찌푸렸다. 술을 어찌나 마셨는지 정석의 발걸음은 퍽 위태위태했다. 휘청거리긴 했지만 그래도 용케 쓰러지지 않고 자세를 잡아 밖으로 나갔다. 가을로 접어들며 부쩍 차가워진 바람이 그의 뺨을 때린다. 장례식장의 옆에 딸린 화장실로 들어간다. 바지춤을 풀고 물건을 꺼내어 오줌을 쏴제낀다. 새벽부터 뱃속에 퍼부었던 깡소주가 고스란히 오줌이 되어 도로 나오고 있는 것 같다. 오줌 냄새나 화장실에 놓인 나프탈렌 냄새보다도 더 역하고 강렬한 소주 냄새가 훅하고 올라온다. 머리가 어질어질하다. 토할 것 같다. 남들은 마누라가 죽으면 화장실에 가서 실실 웃는다던데... 나는 왜 울음이 나오는가. 정석은 그게 궁금했다. 행여 남이 볼까 재빨리 눈물을 훔치고 옷을 바로 한다.

"아빠, 괜찮아?"

화장실 입구에 작은 그림자 하나가 어린다. 눈을 깜빡여 시야를 바로 하고 쳐다보니 아들 태근이였다. 태근을 낳고 떠나버린 첫째 부인 생각에 다시 또 울컥해진다. 그녀를 그렇게 허망하게 보내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내가 이런 아픔을 두 번 겪지는 않았을 텐데. 그런 생각에 마음이 더 아팠다.

"괘...괜찮다, 이눔아."

중얼거리듯 말하곤 비척거리는 발걸음으로 화장실을 나선다. 뒤따라오는 태근이가 조용히 말했다.

"이제 효진이 안 울어, 아빠."

"그...그래. 잘했다. 수고했다."

효진이가 울지 않는다라... 마치 그 이야기가 자신 보고 더는 울지 말라고 질책하는 것 같아 못내 가슴이 아팠다. 태근의 옆에 서서 머리를 헤짚는다.

"내일....부터, 니가 효진이 돌봐야 돼. 잘 할 수 있지?"

"응."

씩씩하기 그지 없는 아들의 대답이 어쩐지 더욱 그를 아프게 했다. 그렇지만 정석은 끝내 내색하지 않고 빈소로 돌아갔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쓸쓸한 곳이기에 그가 더 지켜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다음 날 새벽, 그의 두 번째 부인은 첫 번째 부인과 마찬가지로 화장터의 한줌 재로 사라졌다. 아내를 두 번 잃은 정석은 가슴에 맺힌 슬픔을 추스리기도 전에 곧바로 일상으로 복귀했다. 죽은 사람 보내는 일보다 산 사람 입에 풀칠하기가 더 고되고 끔찍한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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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상의 배경은 70년대 후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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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회에서 분기점에 대한 댓글 받고 있으니 많이 달아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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