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61화 (161/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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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이게 점심 밥이고, 이게 저녁밥이야. 알았지?"

"이게 점심, 이게 저녁."

"점심은 혼자 먹고 저녁은 오빠랑 같이 먹어. 알았지?"

"응. 알았어, 아빠."

효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다시 쭈그리고 앉아 두 밥상을 보며 말하기 시작했다. "이게 점심...이게 저녁..."

다시 시작한 일상은 정석으로 하여금 상념에 빠져있을 시간이 없게 했다. 새벽같이 일어나 출근 준비를 하면서도 두 아이의 점심과 저녁을 위한 밥을 짓는다. 다섯 살 짜리 녀석에게 석유 곤로를 쓰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반찬도 미리 만들어 두어야 한다. 그렇게 두 개의 상을 차리고 신문지로 덮어서 아랫목에 두었다. 태근의 도시락은 녀석이 직접 쌌다. 준비물이 필요하다는 녀석에게 알아서 사라며 백 원짜리 하나 쥐여주고는 서둘러 집을 나섰다. 태근이에게 신신당부한다.

"너 학교 갈 때 문 제대로 닫고 숟가락 꼭 걸고 나가. 알았지?"

그가 일하러 나가고 아들이 학교에 가고 나면 효진을 돌봐줄 사람이 없다. 그렇다고 어린 녀석을 밖으로 나돌아다니게 하기도 뭐해서 그는 현관에 못을 치고 작은 고리를 하나 만들어두었다. 거기에 밥숟가락 하나를 꽂으면 나름의 잠금쇠가 된다. 그렇게 밖에서 걸어 잠근 문 안에서 그의 딸이 하루를 보내게 된다. 밖에서 그렇게 걸어 잠갔다가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나면 어쩔까 덜컥 겁이 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효진이가 집에 안 있고 어디 나가 돌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게 더 무섭다. 제 아빠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잘 알고 있는 태근은 고개를 끄덕이며 씩씩하게 답했다.

"응. 아빠. 다녀오세요."

"그래, 알았다."

정석은 서둘러 집 밖으로 나와 73년식 픽업트럭에 시동을 건다. 뭐가 좋지 않은 건지 늘 시동은 한 번에 걸리지 않았다. 키를 몇 번이나 돌려야 겨우 시동이 걸린다. 사업을 시작하면서 제일 먼저 가지고 있는 돈을 박박 그러모아 간신히 장만한, 그의 재산 목록 1호였다. 그가 하는 일의 특성상 차가 없으면 무척 곤란하기 때문이었다. 4년 동안 좀 험히 굴리는 바람에 이제 대대적 정비를 받거나 아니면 아예 새 차로 갈아야 할 터인데. 당장 자재 구매비도 간당간당한 그로서는 그럴 여력이 나질 않았다. 그는 서둘러 차를 몰아 요근래 물건을 대고 있는 공사 현장으로 달려갔다.

"박 사장님. 어제랑 그제는 왜 안 오셨어요?"

현장에 놓인 간이사무실에 들어서니 다짜고짜 질책성 멘트가 날라온다. 정석은 애써 좋은 표정을 지으며 답했다.

"집에 일이 좀 있어서...."

늦게 귀가하는 남편을 맞이하기 위해 집 앞 도로에 나와 있던 마누라가 뺑소니 차에 치여 죽었다는 걸, 그저 일이 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사정은 전혀 고려되지 않는다.

"어머, 여기 집에 일 없는 사람이 누가 있어요? 저희 자재 납기 늦어지면 책임지실 거예요?"

"아아, 말자 양. 납기는 아직 좀 남았잖아. 그리고 내가 여길 굳이 매일 올 필요는...."

"그 이름으로 부르지 말라고 했잖아요!"

히스테리 가득한 소리가 쨍- 하고 들려온다. 정석은 서둘러 자신의 말을 정정했다.

"미스 박. 미안해요. 내가 깜빡했네."

그러나 이미 심사가 뒤틀린 말자는 그런 정석에게 콧방귀를 뀐다.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녀는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를 "미스 박"이라고 불러달라고 했다.

"아, 몰라요. 알아서 하세요."

책상 옆에 놓인 의자에 비스듬히 앉아 떽떽거리고 있는 여자를 보며 정석은 속으로 이를 갈았다. 이제 갓 상고를 졸업하고 여기 취직한 게 분명한, 새파랗게 어린 년이 그를 향해 되지도 않는 소리를 지껄이는데도 그로서는 그저 웃으면서 넘길 수밖에 없었다. 이유는 다른 데 있지 않다. 바로 저년의 애비가 여기 현장소장이다.

'젠장. 자재 계약 따낼라고 소장한테 들인 돈이 얼마인데 너까지 지랄이냐.'

정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소장에게 들인 돈이야 나중에 납품하면서 남겨 먹을 이문으로 벌충한다고 하지만 그로서는 이 경리 하나가 이렇게 걸리적거리게 될 줄 꿈에도 몰랐다. 처음부터 다짜고짜 고압적인 자세로 나오는 경리가 하도 이상해서 살짝 주위에 물어보니 소장 새끼의 딸년이란다. 지 애비한테 정석이 저자세로 나가는 걸 어떻게 알아차린 건지 은근히 자기도 그런 식으로 대접받길 원하는 모양이었다. 툭하면 세금계산서의 금액이나 견적서 문구를 가지고 지적질을 해댔고 그 덕분에 정석은 이 현장 사무실로 거의 출퇴근을 하다시피 하고 있었다. 원래는 계약 따고 물건 입고 할 때까지는 올 필요도 없는데 말이다.

"왜 그래요. 미스 박. 무슨 급한 자재라도 있었어요?"

속으로 꾹꾹 눌러 참으며 정석은 애써 박 소장 딸에게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그러나 돌아오는 말투는 싸가지가 참 부족했다.

"나야 모르죠. 가서 반장한테 물어봐요."

마치 아랫사람 부리듯 말하는 말본새를 보며 정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얼굴 반반한 년이 표독한 건 다 얼굴값 하느라 그런다고 하던데. 정말이군. 저거 확 자빠뜨려서 올라타고 나면 잠잠해질 텐데. 아니다. 꼭 그런 것만도 아냐. 저런 년들은 기어이 남정네 위로 올라탈 년이다.'

정석은 말자를 살짝 훑어보았다. 아직 어려서 세련된 맛은 좀 덜하지만 조금 마른 듯하면서도 은근히 볼륨이 있는 몸매도 그렇고, 구루무도 신경 써서 바른 게 분명한 반들반들한 피부, 그리고 무엇보다 오똑한 코와 가느다란 눈썹 등에서 나름 도회적인 분위기가 나는 인상이었다. 아직 성격이 어떤지 모를 첫 대면에서는 정석도 아주 잠깐이지만 괜찮은 외모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 생각이 좀 길었던 모양이다. 말자가 정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며 쏘아붙인다.

"안 나가고 뭐 하세요?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아, 아니. 아무것도요."

말자는 정석이 자신을 훑어보았음을 알고 있었다. 그래도 보는 눈이 있어 나 같은 외모에 혹한다고 여기며 정석을 더 얕잡아 보았다. 듣자하니 부인도 있고 애도 둘이나 딸린 양반이 그저 여자만 보면 저런 음흉한 눈빛을 던지는 게 퍽 불쾌하다고 생각했다. 괜히 몇 차례 더 잔소리하고는 정석을 돌려보낸다.

정석은 황급히 사무실을 나섰다. 문을 나서며 그녀에게 수고하라는 인사를 던졌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애초에 기대도 하지 않았던 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현장으로 내려갔다. 지나가는 인부 하나를 붙잡고 작업반장 어디 있느냐고 물어보았다. 루프에 있다며 가리키는 방향을 보니 다리에 힘이 저절로 턱 풀린다. 엘리베이터는 고사하고 제대로 된 계단 하나 없이 합판과 비계로 가설된, 그것도 난간 같은 건 전혀 없는 경사로가 삐쭉빼쭉 뻗어서 8층 높이의 건물 꼭대기까지 이어져 있었다. 아침나절부터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그걸 다 올라간다. 그런데 정석을 만난 작업반장은 이런 소리를 했다.

"박 사장이 어쩐 일이야? 누가 불렀어?"

"네? 반장...님이 부르신 거 아니었습니까?"

황당해하는 정석을 보며 반장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안 불렀는데? 어디, 누가 자재 요청했어?"

하나같이 고개를 젓는 인부들을 보며 정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이 썩을 년을 확 잡아다 조져버릴까.'

아침부터 말자한테 놀아나고 말았다. 정석은 애꿎은 바닥만 몇 번 차고 도로 지상으로 내려왔다. 여전히 털털거리는 픽업트럭을 몰고 정석은 사무실로 돌아왔다. 임대창고를 개조하여 칸막이을 친 한 쪽에 책상을 두고 칠판 하나를 걸어놓은 네 평짜리 사무실이다. 입구에 걸려있는 상호는 "정석물류". 거기에서 하루 종일 대기하면서 자재입출고, 정수관리 및 회계담당, 전화업무 등 모든 업무를 총괄하고 있는 경리, 우춘희가 자리에서 일어나 정석을 맞이했다.

"사장님, 나오셨어요?"

"그래. 나한테 전화 온 거 있어?"

"아뇨."

"그래. 나 커피나 한 잔 타줘."

춘희가 휴대용 버너에 주전자를 올리고 물을 끓이는 동안, 정석은 사무실에 있던 신문을 가져다 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그윽한 커피 향이 퍼지는 잔을 쟁반에 받쳐 든 춘희가 다가왔다.

"사장님, 커피요."

"어, 고마워."

정석은 커피를 받아들고 다시 신문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나 춘희는 바로 자기 자리로 돌아가지 않고 쟁반을 끌어안은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정석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왜? 나한테 무슨 할 말이라도 있어?"

춘희의 얼굴은 반쯤 울상이었다. 안 그래도 못생긴 얼굴이 더 못나 보인다.

"사장님... 정말 괜찮으세요?"

"뭐가."

"사모님이 그렇게 되셨는데.....이렇게 바로 회사에 또 나오시고...."

울먹거리며 말하는 그녀의 얼굴을 보면서 정석은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내가 안 나오면 회사가 안 돌아가는데 어쩔래. 춘희가 차 몰고 현장 돌 거야?"

"전 면허가 없는 걸요."

"그래. 그러니까 내가 나왔지. 어쩌겠어."

"사장님...."

춘희는 올해 초 시골에서 상고를 졸업하고 남동생과 단둘이 서울에 올라왔다. 동생의 학업 뒷바라지를 하고 있다는 그녀는 푸근하게 생긴 생김새만큼이나 잔정도 많고 걱정도 많았다. 그제만 해도 정석의 비보를 받고 바로 달려와 아이들을 안고 불쌍하다며 펑펑 울고 있었다. 하도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아 통금 전에 돌아가라는 정석의 만류에 겨우 돌아가기도 했다. 정석은 한숨을 푹 내쉬며 말했다.

"걱정해줘서 고마워. 괜찮아, 나는."

"애들은... 어떻게 하고 오셨어요?"

"태근이는 학교 갔고 효진이는 집에서 혼자 놀고 있어. 밥은 다 차려놓고 왔으니 굶어 죽지는 않겠지."

춘희가 손등으로 눈가를 훔치며 말했다.

"무슨 말씀을 그리 야박하게 하세요. 애 혼자서 괜찮을까요? 제가 중간에 한 번 가볼까요?"

정석 역시 혼자 있을 딸을 생각하면 자신도 마음이 무거워지지만, 그에 지지 않게 더 독하게 말하려고 애썼다.

"그만하면 다 컸어. 춘희는 우리 집 걱정 말고 회사 일이나 신경 써줘. 지난번 준 영수증은 다 처리했어?"

"아뇨, 아직...."

"그거부터 빨리 계산해줘. 돈 나갈 거 정리하고 통장 정리도 좀 하고 와."

그제야 춘희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정석은 그녀 몰래 한숨을 쉬었다. 사실 그도 마음속으로는 집안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돈을 좀 들이더라도 집에다 전화를 하나 놓을까도 생각했다. 나이치고는 제법 영특한 아이이니 효진에게 전화 걸고 받는 법을 가르치는 건 그리 어렵지 않을 테다. 집에 무슨 변고가 있으면 곧장 사무실로 전화를 할 수 있도록..... 그러다 정석은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변고라니, 이젠 어떤 나쁜 소식도 더 듣고 싶지 않았다.

그는 전화기를 끌어다가 윤 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 씨는 나가고 없고 식모가 전화를 받았다. 그는 조심스럽게 효진이가 잘 있나 보아만 달라고 부탁했다. 잘 있으면 그냥 두고 무슨 일 있으면 전화를 달라고 했다. 전화를 끊고 신문을 이리저리 뒤적이지만 머릿속이 복잡하여 딱히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정석은 담배를 찾아 입에 물었다. 춘희가 가져다준 재떨이를 책상에 올려놓고 하염없이 담배만 피워댄다.

전화벨이 울렸다. 춘희가 받더니 정석에게 바꿔주었다.

"누군데?"

"남 사장님이요."

춘희의 말에 정석은 표정을 확 일그러뜨렸다. 지금 가장 받고 싶지 않은 전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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