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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62화 (16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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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그렇지만 전화를 안 받을 수도 없다. 춘희가 건네주는 수화기를 든 정석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바꿨습니다."

"오늘도 출근한 거야?"

귀에 착 감기는 나긋나긋한 목소리. 정석은 눈을 감고 있지만 상대의 표정이 머릿속에 그려지는 듯하다.

"그거 확인하려고 전화하셨습니까?"

"까칠하긴.... 얼굴 좀 보자. 내가 보낸 부조금은 받았지?"

상대가 은근히 언급한 부조금은 적지 않은 액수였다. 정석은 알았다며 전화를 끊었다. 전화를 길게 해봐야 좋을 게 없었다. 전화를 끊자 춘희가 점심 어떻게 하시겠냐고 물어본다. 시계를 보니 벌써 점심때다. 산 사람 입에는 꼬박꼬박 먹을 것을 넣어주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처연하게 느껴졌다. 그는 수첩을 꺼내 확인하고는 대답했다.

"남 사장 얼굴 한 번 보기로 했어. 춘희 혼자 먹어."

"네, 사장님."

춘희가 도시락을 꺼내 드는 동안 정석은 다시 점퍼를 걸치고 사무실을 나왔다.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고 10여 분을 달린다. 커다란 건물들이 늘어선 거리 중심가, 번듯한 2층짜리 건물 앞에 도착하여 그 간판을 슬쩍 본다. "승화물류". 그가 아주 예전에 오랫동안 몸담았던 회사다. 그리고 벗어나려고 애썼던 회사다. 안으로 들어가 사장이 있는 곳을 묻는다. 직원 중 하나가 사장실에 아직 계시다고 전해준다. 정석은 속으로 투덜거리며 2층으로 올라가 복도 끝으로 간다. 무거워 보이는 검은 문 앞에서 서서 심호흡을 한다. 문을 두드린다. 자신의 이름을 짧게 말한다.

"들어와."

조금 건방지다고도 할 수 있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정석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손톱을 소제하고 있던 여자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정석은 그 얼굴을 보면서 고양이의 눈을 사람에게 붙여주면 저런 눈매가 되리라 생각했다.

"며칠 더 쉴 줄 알았는데 오늘 바로 출근하는 거야?"

"내가 쉬면, 당신이 돈이라도 주려고?"

정석이 문을 닫고 투덜거리며 여자 앞에 마주 앉았다. 이제 마흔 정도 되었을까, 나름 이런저런 관리는 많이 받아 매끈한 피부였지만 그래도 세월의 흔적을 완전히 지울 수 없는 얼굴이 거기에 있었다. 눈매는 가늘고 이마는 좁았으며 콧대는 오똑하고 그 아래 입술을 붉디붉었다. 육감적인 몸매를 숨길 생각이 전혀 없는 옷은 가슴 부분이 아주 깊숙이 파여있었고 몸 전체에서 분 냄새도 진하다. 모르는 사람이 보면 물류회사 대표가 아니라 술집 마담이라고 해도 믿을 법한 그런 외모였지만 그녀는 그런 자신의 외모에 전혀 개의치 않았다. 되려 그것을 적극 활용할 줄 아는 여자였다. 그런 여자가 정석을 보며 빙긋 웃었다.

그녀의 이름은 남인애, 이곳 승화물류의 대표로 재직하고 있다. 십여 년 전, 남편이 세상을 뜬 후 기업을 물려받아 오히려 더 키워낸 여장부였다. 외모는 야했지만 사람 다루는 거나 사업역량은 여느 사내 못지 않았다. 그녀는 정석의 불평을 들으며 피식 웃었다.

"내가 돈을 왜 줘. 받아야 할 것도 아직 많이 남았는데."

"기왕 통 크게 빌려 주신 거, 이자 두둑이 쳐서 돌려드릴 때까지 재촉 안 하면 안 되나?"

"내가 언제 재촉했다 그래."

인애는 눈을 가볍게 흘기며 손톱 줄과 바닥에 놓인 종이를 정리했다. 그러면서 지나가는 투로 묻는다.

"그래서, 화장으로 한 거야?"

정석은 어제의 모습을 떠올리며 눈을 한 번 감았다.

"그래. 먹고 죽을 돈도 없는데 묘 쓸 돈이 어디 있어?"

"저런... 그럴 줄 알았다면 부조를 더 하는 건데."

"그걸로도 충분해."

내뱉듯이 말하는 정석을 보며 인애는 살짝 미소 지었다. 여유가 담긴 표정이다.

"안 그래도 조문을 갈까 말까 했는데, 안 가길 잘했네. 자기 태도를 보니."

"모르는 사이도 아니니 조문와도 이상할 건 없지만 그런 호칭은 쓰지 말라고 했잖아. 이미 십 년도 더 된 이야기를...."

인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난 몰라도, 자기한테는 첫 여자인데... 이렇게 모질게 대해도 돼?"

"내 첫 여자는 태근이 엄마야. 그리고 지금 부인은 효진이 엄마고."

정석은 확답하듯 말했다. 그러자 인애는 손가락으로 정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똑바로 말해야지. 지금은 부인이 없으니 다시 홀몸 아니겠어? 아니, 전보다 더 안 좋네. 애가 둘이나 딸린 홀아비."

정석은 낮은 신음을 흘렸다. 지금도 후회한다. 치기 어린 스무 살의 그는 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 여자와 관계를 맺어버린 걸까. 그 후로도 이렇게 얽혀 종종 놀림을 받게 되리란 것을 알았다면 절대로 그러지 않았을 텐데.... 하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는 돌이킬 수 없다. 정석이 인애를 거부한다고 해도 그녀는 어떤 수를 써서라도 정석을 손에 넣었을 것이다. 그런 여자다, 인애는. 정석은 손을 내저어 주위를 환기했다.

"일 이야기나 해. 나도 바쁜 사람이야."

정석의 마음 같아서야 아예 안 보고 싶은 사람이었지만 사업적으로나 사회적으로, 알게 모르게 그녀의 도움을 많이 받아오고 있었기에 아주 내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인애는 테이블에 놓인 나무 상자에서 담배를 하나 꺼내어 정석에게 내밀었다. 고급 수입 담배였다. 정석이 담배를 물자 그녀는 라이터로 불을 붙여 주며 말했다.

"오늘 밤, 술자리가 하나 있어."

"술?"

"우경에서 60년도 입사자들 동기회. 게네 중에는 부장급이 즐비하지. 이런 곳에는 얼굴 한 번 비춰야 하지 않겠어?"

"백날 얼굴 비치면 뭐해. 뭐 하나 얻어걸리는 게 있어야지."

인애는 정석의 불평을 들으며 깔깔 웃었다. 담배를 깊게 한 모금 마시어 내뱉은 다음, 그녀는 천천히 설명했다.

"조만간 우경건설에서 발주를 하나 낼 텐데, 알고 있어?"

"발주? 얼마나?"

"모르지. 한 9천쯤? 단일로 낸다고 하더라."

정석은 입을 딱 벌렸다.

"그걸 단일로 낸다고?"

"응.

정석의 머릿속이 복잡하게 돌아간다. 군침 도는 이야기다. 9천이면 이윤과 수수료 등으로 10%만 잡아도 구백이다. 운송비나 세금 잡다한 비용을 빼도 충분하다. 어지간한 월급쟁이가 한 달 내내 뼈 빠지게 일해서 노란 월급봉투에 넣어 받는 돈이 십만 원 남짓이라는 걸 생각할 때, 구백이면 어마어마한 금액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좋은 이야기는 결코 혼자 오지는 않는다. 인애가 굳이 이런 이야기를 정석에게 꺼내는 건 그만한 속셈이 있다는 거고, 정석은 결코 그걸 모르는 남자가 아니었다.

"나 혼자 먹으라고 해 준 이야기는 아닐 테고 남 사장 몫은 얼마나 하게?"

"나야 뭐, 절반만 먹으면 되지, 박 사장 힘든데 그걸 털어먹을 생각은 없어."

"절반?"

"응."

정석은 인애를 쏘아보았다. 인애와 여태껏 이런저런 거래를 해왔지만, 이렇게 파격적인 조건은 처음이다. 그는 대번에 알아차렸다. 인애는 지금 거래를 제안하고 있다. 단순한 돈 거래가 아닌, 다른 것을 원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우리 남 사장님이 언제부터 그렇게 너그러우셨나? 지난번에는 3할 떼주는 것도 아까워 죽을 것처럼 굴더니?"

정석의 쏘아붙임에도 불구하고 인애는 빙긋 웃었다.

"그러게. 그러니까 오늘 술이나 같이 한 잔 하자니까."

"건설 쪽 인간들은 마시는 게 더러워서 웬만하면 안 가고 싶은데..."

"더러워야 돈을 만지지. 깨끗하게 살아서 얼마나 잘 사시려고?"

정석은 한참 고민하다가 전화를 빌려 춘희에게 퇴근하거든 자기 아이들을 봐달라고 부탁했다. 춘희는 쾌히 그러겠노라고 대답했고, 전화를 끊은 정석은 인애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택시를 부르는 인애를 보며 정석이 물었다.

"차는 어쩌고?"

인애는 바로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택시가 한 번에 오지 않았다. 그녀는 잠시 뜸 들이다가 대답했다.

"고장나서 수리 맡겼어."

"고장?"

"응. 시동이 안 걸리더라."

"하긴... 나도 요새 빌빌거리긴 한다."

"게다가 술 마실 건데, 뭐."

"그런가."

곧 택시가 도착했고 두 사람은 시내 모처의 횟집으로 갔다. 횟집에 들어가기 직전, 인애는 정석의 옷을 어루만졌다. 옷깃을 펴고 흘러나온 옷가지는 바르게 넣어준다. 마치 출근하는 남편을 대하는 아낙네의 태도다. 정석은 그녀의 나긋나긋한 손길에 독이 묻어있다는 걸 직감적으로 알면서도 어쩔 수 없었다. 인애는 정석의 머리를 당겨 입술을 귀에 바짝 대고 속삭였다.

"정신 똑바로 차리고 괜히 허튼짓 하지 마. 알았어? 내가 여기까지 오려고 들인 돈이 얼만데."

"알았어. 장사 하루 이틀 하나."

"좋아."

인애는 정석을 데리고 안으로 들어갔다. 문 몇 개를 지나 큰 방에 도착하자 거기에는 삼십여 명의 중년 남성들이 왁자지껄 떠들며 술을 마시고 있었다. 정석은 널려있는 빈 병을 보며 생각했다.

'점심때부터 퍼마셨구만. 이 인간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었지만 표정은 애써 웃는 얼굴을 유지한다. 속없는 사람처럼 허허 웃으면서 명함을 돌리고 허리를 깊이 숙여 인사한다. 글라스에 따라주는 소주를 적당히 마시거나 버린다. 현장에서 잔뼈가 굵어 얼굴이 시커멓게 그을린 사람들은 자신이 해외 건설에서 얼마나 대활약을 했었는지 무용담처럼 떠들어 댄다. 정석은 그에 적당히 맞장구쳐가며 주변을 살폈다.

"호호호. 김 부장님이 마시는 만큼 따라 마시면 저 완전히 가요."

"하하. 남 사장. 가긴 어딜 가. 가려면 나도 데려가야지."

인애는 가장 상석에 앉은 김 부장이라는 사람 바로 옆에 앉아 있었다. 김 부장의 손은 숫제 애인 허리 감듯이 인애의 허리를 두르고 있었고, 인애는 그런 손을 마다하기는커녕 되려 김 부장의 몸에 찰싹 붙어서 안기듯 붙어 있었다. 그 모습을 보며 정석은 가슴골이 깊이 드러나도록 파인 옷은 이걸 위한 전투복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 남 사장은 이름 때문에 참 힘들겠어. 이렇게 숫제 여자인데도 부를 때는 남 사장이잖아."

"호호호. 그러면 김 부장님은 저보고 여사장이라고 부르세요."

"어? 그럴까? 어이~ 여사장."

"네에~"

시답잖은 농담에 낄낄거리는 남자들 사이에서도 인애의 몸놀림은 요염하기 그지없었다. 김 부장이 "숫제 여자"라고 말할 때는 손 하나가 그녀의 허벅지 사이로 파고들었지만 인애는 움찔하거나 놀라는 기색 없이 무릎을 모아 그 손을 허벅지 사이로 묻게 해주었다. 육덕진 허벅지 안쪽에서 저 손이 어떤 유영을 즐기고 있을지는 밖에서 보아 알 수 없는 일이다. 정석은 속으로 혀를 찼다. 자신의 회사가 자본금이 열 배가 되는 한이 있더라도 인애의 영업력을 따라갈 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횟집에서 시작한 술자리에는 맥줏집과 방석집까지 가고 나서야 끝이 났다. 옆구리에 어린 여자 하나씩 끼고 사라지는 남자들이 전부 가버리고 나서야 정석과 인애는 풀려날 수 있었다. 방석집을 나서자마자 인애는 길옆 모퉁이로 가더니 손가락을 목구멍에 넣었다. 그리고 속 안에 있던 것을 전부 게워냈다. 억지로 마신 술과 안주가 한 덩어리 되어 잔뜩 쏟아졌다. 정석은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그녀 곁에 다가가 등을 두드려주었다. 한참을 그렇게 쏟아낸 인애는 손수건을 꺼내 입 주변을 닦더니 중얼거렸다.

"하여간 개새끼들... 주무르기는 떡 주무르듯이 해놓고 끼고 자는 건 어린 년이라 이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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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잘 보내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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