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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블데이트-164화 (164/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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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정석은 빠르게 지쳐갔다. 새벽같이 나가서 현장을 둘러보고 자재를 수배하고 제작사에 오더를 넣는 것은 물론 저녁이 되면 앞으로 구매처가 될 곳을 뚫기 위해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띠며 술상무를 자처했다. 건설 쪽 인간들은 술 마시고 노는 문화가 굉장히 험한 편이었고 거기에 맞게 놀다 보니 자정을 넘겨 집에 들어가기 일쑤였다. 집에 들어가도 바로 쉴 수 있을 리 만무했다. 쌓여있는 그릇을 설거지하고 아이들이 벗어둔 옷을 거두어 빨았다. 그렇게 하다가 겨우 잠자리에 들어가면 뒤통수를 붙이자마자 다시 또 출근을 위해 금방 일어나야 했다.

그런 생활이 지속되자 그는 누가 봐도 지쳐 보이는 인상이 되었다. 심지어 그 싸가지 없는 현장사무실 미스 박이 어디 안 좋으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그는 항상 괜찮다고 대답하곤 들어가는 길에 바카스 하나씩을 사 먹긴 했지만 그게 진정한 피로 회복이 되고 있는지는 미지수였다.

그런 와중에도 인애의 추근거림은 날이 갈수록 노골적이 되어갔다. 정석은 안팎으로 시달리며 점점 지쳐갔다. 당장 막아야 하는 급한 자금이 밀려오는 그를 도와줄 곳은 어디에도 없었다. 인애가 물어다 준 큰 건수를 결국 큰돈이 필요한 일이었다. 사업에 있어서 큰 건수라는 건 마치 갈증에 시달리는 이가 마시는 바닷물과 같았다. 물이 사방에 가득하다 해서 그걸 떠 마시면 갈증에 더 시달리게 된다.

결국 정석은 마음을 크게 먹고 자기 발로 인애를 찾아갔다. 의기양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인애 앞에서 정석은 아쉬운 소리를 해야만 했다.

"이 건에서 손을 떼겠어."

"손을 떼다니. 여태까지 해온 게 어딘데?"

인애는 빙글거리며 웃고 있었다. 그녀는 정석이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찾아왔는지 결코 모르지 않는 게 분명하다. 정석은 그녀의 표정이 여간 거슬리는 게 아니었지만 꾹 눌러 참았다.

"내가 먹을만한 그릇이 아냐. 괜히 덤비다가 있는 불알 두 쪽마저 다 날아가게 생겼잖아. 여기까지 해온 것만 정산하고 승화로 넘길게."

"날릴 불알은 있어?"

"장난하지 마."

"넘기면, 다 받아줘야 하나? 우리가 무슨 자기 하청이야?"

입으로는 거절을 말하고 있지만 그녀의 눈빛은 정석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녀의 눈빛을 보면서 정석은 어린 시절 보았던 거미줄에 걸린 나비를 생각했다. 거미는 아무 곳에나 줄을 치지 않는다. 나비가 다닐만한 길목에, 아주 촘촘하고 꾸준하게 거미줄을 늘려나간다. 그렇게 짜인 거미줄에 걸린 나비는 발버둥 칠수록 더 강하게 사로잡힌다. 한참을 꿈틀대다가 끝내 힘을 잃고 거미에게 먹히기만을 가만히 기다리게 되는 게 보통이다.

어느 날, 거미줄에 걸렸던 나비가 벗어나는 광경을 보았다. 벗어난 나비는 어른 걸음으로 한 폭을 채 가지 못하고 바닥에 떨어졌다. 바닥에 떨어진 나비는 한쪽 날개가 없었다. 거미줄을 벗어나기 위해 자신의 몸 일부를 잘라낸 모양이었다. 정석은 자신이 거미줄에 놓인 나비와 같다고 생각했다. 이제 자신의 날개를 잘라서라도 거미줄을 벗어나야 할 때였다. 정석은 숨을 크게 들이마신 뒤, 인애를 똑바로 바라보고 말했다.

"당신이 여기까지 만들어 오면서 수고한 거 알지만, 나도 가만히 놀고먹은 건 아니잖아. 내 지분 과하게 요구하지 않을 테니 그만 여기서 끝내자."

끝내자는 말에 인애의 표정이 급격하게 싸늘해졌다.

"진심이야?"

"그래."

"내가 우경 껀수, 그런 거 하나 혼자 못 처리해서 자기 불러서 분담한 건 아닌 거 알지?"

모를 리가 없었다. 오히려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인애의 회사는 정석이 운영하는 회사과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규모가 있었다. 그런 곳에서 굳이 정석물류 같이 작은 회사를 불러 컨소시엄을 구성하는 건 일종의 특혜이자 대놓고 밀어주기였다. 그걸 정석이 모를 리 없고, 그 안에 담긴 인애의 속뜻까지 너무 잘 알아서 문제였다. 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 그렇지만 당신이 아무리 나한테 이래도, 내가 당신에게 돌아갈 일은 없어."

최후의 통보가 정석의 입에서 떨어진다. 인애의 얼굴이 마치 돌처럼 굳는다. 바위가 말을 할 줄 안다면 그럴 법한 목소리로 인애가 묻는다.

"후회하지 않아?"

"그래. 비록 큰 건수는 못 물어도 나 나름대로 하던 일 하면서 입에 풀칠하고 살겠어."

"정말 후회하지 않아?"

"거듭 묻지 마."

단호하게 잘라내는 정석, 그런 그를 바라보는 인애의 안광이 귀신처럼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입 주변을 잔뜩 찡그렸다. 차마 목구멍까지 치고 올라온 어떤 말 덩어리가 입안에서 맴도는 모양이었다. 아랫입술을 꽉 깨물은 그녀는 손을 뻗어 인터폰을 눌렀다. 직원 하나를 부르더니 그에게 정석의 일을 인계받으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몸을 반쯤 돌리더니 더는 정석을 쳐다보지 않았다.

입술에 피가 나도록 입을 꽉 다문 인애의 옆모습을 보면서, 정석은 살짝 죄책감마저 느꼈다. 아닌 말로, 이제 아내도 없는 그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긴다고 한들 도덕적인 죄책감은 들지언정, 사회적으로나 법적으로 전혀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러나 그런 그의 생각을 막는 건 단 하나뿐이었다.

첫 번째 아내와 결혼하던 날, 인애의 눈빛.

정석은 그게 내내 마음에 걸려 다시는 인애와 얽힐 엄두가 나질 않았다. 인애가 남편을 잃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도 가장 먼저 생각난 건 고향 선배의 안부보다도 인애의 눈빛이었다. 무언가 깊숙이 숨기고 있는 그 눈빛은, 아주 예전에 정석을 유혹하던 그때와 닮아있었다. 마치 고양이처럼 어둠 속에서도 빛나며 무언가 찾고 있는 그 눈빛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자신의 몸을 훑을 때면 소름마저 돋곤 했다. 고양이의 혀가 자신의 피부를 핥는 그런 느낌이었다.

같이 일을 한 지난 몇 달 동안도 인애의 은근한 구애는 꾸준히 있었다. 다소 나이는 들었다고 해도 그녀는 실로 매력적이며 육감적인 여자였다. 정석의 신체가 그에 반응해 은근히 동할 때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정석은 계속 무언가 목구멍에라도 걸린 것처럼 인애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생리적 거부감이라고 해야 하나? 그런 동시에 정석에게 계속

받아주지도 않는 인사를 인애에게 남기고 정석은 돌아섰다. 다시는 그녀에게 기대지 않으리라 마음먹었다. 회사로 돌아온 정석은 춘희에게 대강의 사정을 설명하고 금액 정산을 미리 해두라고 일렀다. 진행하던 큰 건이 엎어졌다는 이야기를 들은 그녀는 조심스레 정석에게 물었다.

"사장님, 그럼 저희 당분간 일이 없는 건가요....?"

정석은 내심 뜨끔했지만 되레 큰소리치며 춘희를 나무랐다.

"사장이 어련히 알아서 할까 봐. 춘희는 그런 거 신경 끄고 내가 시키는 일이나 잘해."

"네."

춘희는 입을 삐죽 내밀고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시키는 일은 틀림없이 해내는 그녀였기에 정석은 달리 더 탓하지 않았다. 일을 모두 마치고 집으로 돌아갔는데, 낯선 이가 그의 집 마당에 서 있는 걸 발견했다. 집주인 윤 씨도 함께였다. 제아무리 집주인이고, 여기가 세입자 집이라고는 하나 제집 드나들듯이 들락거리는 윤 씨가 퍽 신경쓰이던 참이었다. 정석은 퉁명스러운 어조로 윤 씨에게 인사했다. 그러자 윤 씨는 과장된 어조로 정석을 반기며 함께 온 이를 소개해주었다.

"어휴. 효진 아버지. 여기 보게나. 이 분이 구청에서 나온 송 주사라네."

번들거리는 이마 전체로 개기름이 넘실거리는 남자였다. 정석은 악수를 나누면서 손바닥에 느껴지는 불유쾌함을 무시하려고 애썼다. 송 주사는 의례적인 인사를 마치자마자 본론에 들어갔다.

"박정석 씨, 슬하에 자녀 두 분, 그러니까 박태근 군과 박효진 양. 맞습니까? 각각 9세와 5세 맞습니까?"

"그렇습니다만?"

난데없는 호구조사에 정석은 의아함을 느꼈다. 이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눈빛으로 윤 씨를 쳐다보았지만 그는 뒷짐을 지며 짐짓 모른 체하고 있었다. 송 주사는 수첩까지 꺼내 일일이 메모하며 정석에게 이것저것 묻기 시작했다. 주로 정석이 현재 하는 일과 아이들의 일상에 대한 일이었다. 자기 일에 대한 거야 쉽게 대답한다고 해도, 아이들이 평소 뭐 하고 지내는가 묻는 일에는 정석의 말문이 막힐 수밖에 없었다. 송 주사의 질문은 거침이 없었다.

"얼마 전, 부인께서 사망하시고 현재 아이들 육아는 어떤 분이 담당하고 계십니까?"

"육아요? 그걸 대체 누가 합..."

대답하던 정석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불안한 예감이 그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는 손을 내저어 송 주사의 메모를 막으며 되물었다.

"근데 송 주사님은 대체 구청 어디서 나온 분이길래 저한테 이런 걸 자꾸 묻습니까? 무슨 경찰이라도 되는 거요?"

그러자 송 주사는 손수건 하나를 꺼내어 얼굴을 닦으며 대답했다.

"경찰은 아니고, 사회복지과에서 나왔습니다. 아동 방치 및 학대에 대한 신고가 들어와서요."

그러면서 그는 손을 들어 정석의 현관 앞에 쳐진 숟가락 걸쇠를 가리켰다. 정석은 기가 막혔다. 그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윤 씨를 찾아보았지만, 이 늙은이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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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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