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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정석은 송 주사를 돌려보냈다. 지갑에서 꺼낸 오천 원짜리를 쥐여 보내며 날도 더운데 시원한 거라도 하나 드시라고 권했다. 송 주사는 일체의 거절도 없이 자연스럽게 돈을 받아 주머니에 넣은 후 떠났다. 송 주사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지자 정석은 이를 악물고 쪽문을 나와 대문으로 들어갔다. 2층 주인집으로 한달음에 올라가 거칠게 문을 두드렸다. 최신 유행하는 스뎅 문짝이 덜덜 떨리며 요란한 소리를 냈다. 아직 앳된 얼굴을 한 식모가 겁 먹는 표정으로 나와 윤 씨의 부재를 알렸다. 정석은 다시 밖으로 달려 나와 윤 씨가 어디 있나 찾아보고 싶었지만, 그가 어디 있는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목적도 방향도 없이 이리저리 동네를 쏘다니며 머리에 오른 열을 식힌 정석은 슈퍼에 가서 술과 과자를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와! 과자다!"
효진이가 자기 몫으로 과자 한 봉지를 챙긴 후 행복해하고 있는 동안 정석은 묵은김치 한 접시를 떠놓고 술병을 땄다. 컵에 소주를 가득 따르고 있자니 태근이가 자신을 물끄러미 보고 있는 걸 알았다. 과자를 먹느라 정신없는 동생과 달리 태근은 자기 아버지에게서 눈을 떼지 못했다. 커다란 눈망울에는 불안감이 가득했다. 정석은 그 표정이 못내 안쓰러워 손을 뻗어 태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왜 그래? 가서 동생이랑 같이 과자 먹어."
"아빠, 우리 괜찮은 거야?"
"그럼, 괜찮고말고."
"...아빠. 우리 고아원 가?"
정석의 손이 멈칫했다. 그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고 목소리 끝이 갈라졌다.
"무슨 소리야, 그게. 누가 그런 소리 하니?"
태근이는 한참 주저하다가 간신히 말했다.
"학교에서 애들이 그래. 우리는 엄마 없어서 아빠만 새장가 가면 우리는 고아원 간다고..."
"헛소리 하지 마!"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태근이는 질린 표정이 되었고 저쪽에서 효진이는 울음을 터트렸다. 정석은 황급히 효진이를 데려와 한 팔로 안아주고 남은 팔로 태근이마저 끌어당겼다. 그렇게 아이들을 꼭 끌어안은 채 토닥이며 말했다.
"사람들이 몰라서 그래. 난 너희 아빠야. 아빠가 애들을 왜 버려. 남들 이야기 하는 거 듣지 마."
훌쩍거리느라 제대로 숨도 못 쉬는 효진이는 아빠 목을 끌어안고 꺽꺽 소리를 냈다. 정석이는 소리 지른 걸 사과하며 아이들을 달랬다. 그렇게 달랜 자식들을 자리에 눕혀 재우고 정석은 남은 술을 마저 마셨다. 회사 일에 시달리느라 아이들이 느끼는 불안감을 돌보지 못한 자신을 탓해 보지만 뾰족한 수가 나질 않았다. 아이들을 돌볼 사람을 따로 구해볼까도 싶었지만, 인애와의 관계를 정리한 지금은 사람 하나 더 쓸 여력도 없었다. 괜한 짓을 한 윤 씨의 짓이 괘씸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밖에서 걸어잠근 집 안에 어리디어린 녀석을 두고 나가는 자기 자신을 더 용서할 수 없었다. 누구의 탓도 할 수 없어 그저 자신만을 탓하며 정석은 그대로 엎드려 잠들었다.
꿈속에서 어떤 여자의 얼굴을 보았다. 첫째 부인도, 둘째 부인도 아니었다. 인애도 아니었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어딘지 모르게 낯익었다. 그녀는 정석에게 다가와 모두 괜찮을 거란 이야기를 속삭여주었다.
다음 날, 태근은 밥상에 엎드려 자고 있는 아버지를 깨웠다. 어린 태근의 눈으로 보아도 아버지의 삶은 너무 고단해 보였다. 그래서 자기 도시락과 아침 식사를 직접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태근을 보며 정석은 말없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학교에 가서도 태근의 마음은 딴 데 가 있었다.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집으로 달려갔다. 혼자 지내고 있는 동생을 누가 데려갈까 봐 겁이 나곤 했지만 그런 마음을 아버지에게 털어놓을 순 없었다. 자연스럽게 학교 수업에 소홀해졌고, 교우관계도 소홀해졌다. 그러다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아얏!"
태근의 주먹에 맞은 친구가 나가떨어졌다. 두 명째다. 태근을 둘러싼 남자애들은 서로 눈치만 보았다. 시비를 먼저 건 쪽은 이쪽이었지만 태근이가 이렇게까지 싸움을 잘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탓이다. 태근은 자신을 둘러싼 친구들을 보며 으르렁거렸다.
"꺼져! 이 자식들아! 한주먹 거리도 안 되는 놈들이 괜히..."
그때 누군가 태근의 등을 발로 찼다. 불시에 공격을 당한 태근은 앞으로 고꾸라졌고 그 틈을 노린 몇 명이 달려들어 태근을 에워쌌다. 한 놈은 올라타고 태근의 얼굴을 때리기 시작했다. 여자아이들은 한쪽에 몰려서 웅성거리고 있었다. 누군가 소리를 빽 질렀다.
"무슨 일이야?"
담임의 등장을 알아차린 아이들은 우우 거리며 재빨리 흩어지긴 했지만, 그렇다고 사태의 주동자를 숨길 순 없었다. 결국 태근이를 비롯한 몇몇 남자아이들은 담임을 따라 교무실로 불려갔다. 줄줄이 사탕처럼 엮여 교무실에 들어오는 남자아이들을 보며 지나가던 선생님 한 분이 한마디 했다.
"어이쿠, 화려하게 했네요?"
몇몇은 코피 난 흔적이 역력하고 몇몇은 옷의 단추가 뜯겨 있었다. 태근의 반 담임인 제우진은 대충 몇 마디 말로 무마하곤 아이들을 교무실 바로 옆에 있는 상담실로 데리고 들어갔다. 의자에 앉은 우진은 남자아이들을 주욱 세워놓고 물어보았다.
"왜 싸운 건데? 너네 사이 좋았잖아?"
남자아이들은 서로 눈치만 볼 뿐, 누가 먼저 이야기하지 않았다. 우진이 혼내지 않겠다는 약속으로 아이들을 달래고 나서야 드문드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한다. 우진은 아이들의 이야기를 종합한 끝에, 대강의 사정을 알게 되었다.
발단은 이러했다. 3반은 원래부터 2학년 중에서 가장 축구를 잘하는 반이었다. 날랜 몸으로 운동장을 누비며 상대방 수비수를 멋지게 따돌리는 태근의 활약이 주가 되었다. 방과 후에 거의 날마다 벌어지는 축구시합에서, 3반이 패하는 경우는 별로 없었다. 스트라이커인 태근은 Y국민학교의 "박붐"이라고 불릴 정도로 축구를 잘했다. 수비수를 따돌리는 놀라운 주력은 물론, 우르르 몰려다니는 동네축구와는 달리 나름의 개인기를 가지고 수비수 전체를 돌파하기도 했다.
그런 그가 어느 날부터 동생을 봐야 한다는 이유로 매번 방과 후 시합에서 빠지고 난 후부터, 3반의 연승은 멈추었다. 3반 남자아이들의 불만은 점점 더 커졌고 급기야 자신들의 패배는 태근이 때문이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다. 그러던 차에, 오늘, 전통의 라이벌인 5반과의 시합이 잡혔다. 남자아이들은 태근을 둘러싸고 전반전이라도 뛰고 가라고 종용했고 태근은 딱 잘라 거절했다. 발끈한 남자아이들은 태근에게 욕을 하기 시작했지만 태근은 그냥 무시하고 가려고 했다. 그런데....
"태근이는 그냥 가려고 했는데 거기다 대고 재규가 이상한 소리를 해서..."
주로 중앙 수비를 담당하는 만호의 입에서 결정적인 증언이 나왔다. 재규는 황급히 만호를 향해 눈을 부라렸지만, 이미 늦었다. 낌새를 눈치챈 우진이 재규를 똑바로 쳐다보았다. 국민학생치고는 덩치가 커서 제 또래 중에서 곧잘 대장 노릇을 하는 녀석이지만 담임의 눈빛 앞에서는 뱀 앞의 쥐처럼 옴짝달싹 못한다. 우진은 낮지만 또렷한 목소리로 재규에게 물었다.
"태근이한테 뭐라고 했지, 재규?"
".....저어, 그게...."
"선생님 앞이니까 똑바로 말해야 한다."
"......으으...."
손가락을 꼼지락거리며 어쩔 줄 몰라하던 재규는 결국 눈을 질끈 감고 말해버렸다.
"태근이가 엄마 없는 놈이라서.... 그래서 저런다고...."
이 이야기를 들으며 두 주먹을 불끈 쥐는 태근을 보면서, 우진은 평소 얌전하고 조용한 태근을 폭발시킨 계기가 어떤 것인지 깨달았다. 아이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가 아니다. 오히려 어른보다도 더 예민하고 눈치가 빨랐다. 그렇지만 타인에 대한 배려는 배우지 못한 나이이기도 하다. 우진은 한숨을 내쉬고 말했다.
"재규는 태근이에게 사과하도록 해. 그런 말을 하면 안 되지."
우물쭈물하던 재규는 우진의 재촉을 받고 어색한 말투로 태근이에게 사과했다. 태근은 눈을 부라리며 사과를 받지 않으려고 버텼지만 우진이 몇 번이나 나무란 끝에 마지못해 손을 내밀었다. 태근과 재유의 억지 악수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결코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고운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담임 앞에서 쌈박질을 벌이지는 않았다. 우진은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친구끼리 싸운 건 잘못이니 모두 여기서 반성문 열 장씩 쓴다. 알았지?"
우진의 엄명이 떨어지자 다들 한숨을 쉬었다. 여선생인 우진은 몽둥이찜질이나 기합보다는 반성문을 더 선호하는 편이었다. 좀 아프기는 하지만 깔끔하게 몇 대 맞고 마는 걸 선호하는 남자애들은 반성문이라면 아주 질색이었다. 한숨을 푹푹 쉬는 아이들의 반응에도 아랑곳하지 않는 우진이 종이를 나누어 주는데 태근이는 받지 않았다. 우진이 왜 종이를 받지 않느냐고 묻자 태근은 또랑또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는 잘못이 없는데요?"
".....그래도 친구를 때렸잖니."
"저 녀석이 먼저 잘못했다는 걸 선생님도 인정하셨잖아요."
"어떤 경우에라도 폭력은 나쁜 일이야. 그래도 네가 시작한 일은 아니니 너는 반성문을 다섯 장만 써도 돼."
우진이 그런 식으로 달래보아도 태근은 고집스럽게 고개를 저었다. 그는 되려 고개를 바짝 쳐들고 우진을 쳐다보며 말했다.
"반성문을 쓰더라도 집에 가서 쓸래요. 전 지금 바로 집에 가야 된다구요. 지금 제 동생이 밖에서 걸어 잠근 집 안에 혼자 있어요. 안에서 무슨 일이라도 있으면, 선생님이 책임지실 건가요?"
따박따박 따져 드는 태근은 이제 겨우 국민학교 2학년생인데도 불구하고 교사생활 2년 차인 여교사의 기세를 완벽하게 눌러버렸다. 우진은 딱히 반박할 도리가 없어 태근을 먼저 내보냈다. 태근이 상담실을 나가고 나자 남은 녀석들의 웅얼거리는 불만이 좀 더 커지긴 했지만 우진이 혀를 몇 번 치자 다시 조용해졌다. 우진은 창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에는 가방을 둘러메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뛰어가는 태근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진은 한숨을 살짝 내쉬었다. 다음에 선배 교사들을 만나면, 학기 중에 모친을 잃은 아이를 어떻게 달래야 하는 건지에 대해서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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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저런 일이 있어 연재가 늦었습니다.
장미정원 끝날 때까지는 논스톱으로 연재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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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회에 댓글은 다들 달으셨겠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