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69화 (16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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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인애라는 여자가 자신을 처음으로 원할 때부터 느껴온, 일종의 위험한 감 같은 것이 그의 안에서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그녀가 자신을 보는 눈빛, 자신을 원하는 몸짓, 그리고 이렇게 주변을 맴도는 행동까지도.... 하나하나 버겁고 무겁다. 미자가 아이들을 돌봐주기 시작한 지 이제 한 달도 채 되지 않았다. 그런데도 인애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이제는 내 뒷조사까지 하고 다녀?"

"뭘, 뒷조사까지. 그냥 가서 잘 사나 어쩌나 들여다본 걸 가지고."

인애는 딱 잘라 모른 척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더 물어봐야 대답하지 않을 게 분명했다. 정석은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래서... 그래서, 내가 납품하는 현장도 그렇게 건드리고 다니는 건가?"

"현장?"

태연하게 반문하는 인애의 표정에서, 정석은 뭔가 캐치했다.

"납품만 했다하면 반품에 규격 트집이고, 돈이라도 받을 성 싶으면 현금 대신 어음이던데. 거기 애들이 성격 더럽기는 해도 이렇게 치졸하게 안 하거든."

"치졸한 사람이 따로 있나 보지."

"인애!! 지금 말이면 다인 줄..."

"난 그게 좋아. 자기가 내 이름을 그렇게 강렬하게 불러 줄 때가 말이지."

정석은 몹시 태연하게 말하는 인애의 뺨이라도 치고 싶은 감정을 꾹 눌러야만 했다. 피가 나도록 아랫입술을 지그시 깨무는 정석을 보며 인애는 몸을 뒤로 빼냈다. 모든 것을 손에 쥔, 아니, 쥐려고 하는 그녀의 모습은 그런 느긋함과 여유로움을 가득 담고 있었다.

"다음 주에 남쪽 바다라도 보러 갈까 해."

뜬금없는 바다 타령에 장단을 맞춰주고 싶지 않은 정석은 그저 가만히 있었다. 인애의 이야기는 이어졌다.

"부산에 가서 회라도 한 사라 먹고 남해 쪽으로 해서 유람 한 번 하는 거지. 너무 일만 했잖아? 그러니 이렇게 한 번씩 쉬는 시간을 갖는 것도 꽤 중요하다고. 우리 같이 사업하는 사람들은 말야. 먼 길 가는 여행이니 혼자 가는 것도 재미는 없겠지."

정석은 그제야 인애가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지 알았다. 그녀는 지금 동행을 요구하고 있었다. 정석이 대답이 없자, 인애는 몸을 일으켰다. 그녀는 탁자 위로 몸을 드리우고 정석의 얼굴에 바싹 다가왔다. 몸을 숙인 그녀의 앞섬이 벌어져 그녀의 깊은 가슴골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정석은 그 장면을 보면서도 성욕보다는 불쾌한 기억이 먼저 떠올랐다. 거기서 고개를 돌렸다, 그렇지만 인애의 목소리까지 막을 순 없었다. 그녀의 젖은 숨결이 정석의 귓가를 간지럽힌다.

"애들 봐주는 사람도 있겠다, 이제 지난번처럼 굳이 날 밀어낼 필요 없는 거잖아? 나라고 이렇게 말하는 게 쉬운 줄 알아? 내 마지막 자존심, 체면, 이런 거 다 버리고 당신한테 말하는 거야."

"그렇게까지 나를 왜..."

"글쎄. 왜일까?"

인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난, 너그러운 여자라서 말야. 당신에게 마지막 기회를 주는 거야. 당신 하나만 눈 감고 내게 다 맡기면, 다 알아서 해 줄 수 있어."

그녀는 몸을 돌려 문으로 다가갔다. 문을 나서기 직전, 그녀는 돌아보지도 않고 중얼거리듯 말했다.

"아이들에게 잘한다고, 당신이 좋은 아빠가 될 일은 결코 없을 거야. 내 말 듣지 않으면 크게 후회할 날이 올 거야."

알 수 없는 말을 남긴 인애는 그렇게 떠났다. 사무실에 혼자 남은 정석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꼭 감은 두 눈, 그 너머 어둠 속에는 아직도 인애가 있는 것 같았다. 아직 아무것도 모르던 신입사원 시절, 어둠 속에서 정석을 올라타던 인애의 끈적하고도 젖은 살 속에 자신이 아직도 꽁꽁 묶여 있는 것만 같아 견딜 수 없었다.

인애가 사무실을 나가고 난 뒤, 정석은 깊은 침묵 속에서 괴로워했다. 춘희가 사무실로 돌아올 때까지도, 그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인애가 원한 건 정석. 더 정확히 말하면 정석"만을" 원하고 있었다. 해맑은 표정의 두 아이, 아빠만 믿고 있을 두 아이의 얼굴이 정석의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다. 인애는 그걸 모두 지우고, 자신에게만 집중할 것을 원하고 있다.

"미친 년!"

자기도 모르게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난 정석은, 춘희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걸 발견했다. 그는 춘희에게 그녀에게 한 소리가 아니라며, 오늘은 일찍 퇴근하라고 했다. 춘희는 주저하면서 정석에게 물었다.

"아까 그 여자가 이야기한 건 대체 무슨 소리죠? 저랑 사장님이..."

"아냐. 춘희. 그 여자가 헛소리한 거야. 내가 자네를 그런 식으로 생각한 적은 없어. 오해하지 마."

그러자 춘희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녀는 한참 망설이다가 간신히 입을 열었다.

"사장님은 절 그렇게 생각 안 하셔도... 저는 사장님을 그렇게 생각하곤 했는데요..."

정석은 어안이 벙벙했다. 늘 춘희가 사무실 일 뿐만 아니라 자기 아이들까지 잘 챙겨준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쪽으로 자신을 생각하고 있는지는 꿈에도 몰랐다. 그녀와는 열 살 넘게 차이나서 여자로 보기보다는 조카처럼 생각했던 터였다.

"춘희... 자네, 그 말은..."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장님. 저 퇴근할게요!"

춘희는 황급히 사무실을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정석은 한참을 멍하니 있었다. 춘희를 처음 봤을 때를 떠올렸다. 신문에 난 구인광고를 오려들고 찾아온 그녀는 전형적인 시골 처녀였다. 촌스러운 옷차림에 다 터진 피부... 외모로는 누구에게도 인기있을 타입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는 성실했고, 정석의 의중을 잘 읽어내는 일꾼이었다. 그녀가 처음 이곳에 올 때만 해도 정석은 유부남이었다. 둘째 부인을 잃고 나서, 굳이 춘희가 정석의 집에 아이들 핑계로 자주 찾아오던 게 생각났다.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도 모르는 구나. 나란 녀석은....'

정석은 쓰게 웃었다. 내일부터 춘희를 어떤 얼굴로 봐야할지도 모르겠다. 솔직히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자길 좋아하는 여자가 있으며 어떤 남자라도 어깨가 자못 으쓱해지는 법이다. 그러나 춘희의 마음을 받아들일 수 있으냐는 또 다른 문제였다. 방금 전 그의 마음을 헤집어 놓고 나간 인애를 생각하니 머리가 아파오기 시작했다.

정석 역시 사무실을 나섰다. 픽업트럭에 올라 집으로 향했다. 사무실에 있어봐야 마음만 더 복잡해질 것 같았다. 그렇지만 막상 동네에 도착하고 나니, 집에 들어갈 엄두가 나질 않았다. 그저 아빠라면 좋다고 달려들 아이들의 얼굴을 볼 엄두가 나질 않았다. 동네 외곽에 차를 세워두고 다리 밑에 있는 포장마차에 들어갔다. 소주와 꼼장어를 청했다.

정석은 오랜만에 혼자 술을 마셨다. 접대 때문에 늦게까지 술 자리에 있었던 적은 많지만, 오늘처럼 혼자서, 그것도 코가 삐뚤어지도록 술을 마신 건 참 이례적인 일이었다. 아내의 빈자리가 생긴 이후, 아이들을 돌봐야 한다는 부담감 때문이라도, 이렇게까지 술을 마실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 정석의 마음은 몹시도 복잡하고 어지러워, 술이라도 마시지 않으면 집으로 돌아갈 힘이 나질 않았다. 결국 그가 술에 절은 몸을 이끌고 집에 도착한 시각은 자정을 넘긴 새벽이었다.

"얘들아, 아빠 왔다....아빠 왔어...."

신발을 벗으며 태근이와 효진이의 이름을 번갈아 불러보지만, 집안에는 사람의 온기가 느껴지지 않았다.

"다들 자니?...."

안방을 열어보아도, 아무도 없었다. 그러나 그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몸짓으로 다시 신발을 꿰어신고 앞집으로 향했다. 여자 혼자 사는 남의 집이라, 평소에는 들어서기 저어되곤 했지만 술이 거나하게 들어간 정석은 거칠게 없었다. 대문을 힘차게 밀어열고 들어가 마당을 가로질러 간다. 대청마루에 걸터앉아 신발을 벗으려 하였지만 순간 머리가 핑하여 그대로 드러눕고 말았다. 내쉬는 숨결마다 마신 술이 고대로 묻어나올 것 같은 기분이다. 일어나야 한다고 생각은 하면서도 그게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서까래가 놓인 천장을 올려다보고 있노라니 그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 와중에 어떤 얼굴 하나가 불쑥 나타난다. 그 얼굴이 정석에게 말을 건다.

"많이 드셨네요?"

정석도 아는 얼굴이다. 이 집 주인이며, 요 근래에 그의 아이를 계속 돌봐주고 있는 아가씨였다.

"미...미자 양, 꺼억. 좀... 먹었습니다..."

집주인이 있는데 누워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일어나려고 했지만, 몸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정석은 그저 몇 번 버둥거릴 뿐이었다. 얇은 천으로 된, 하늘하늘거리는 잠옷을 입고, 어깨에는 쇼올을 두른 미자는 그 모습을 보며 살짝 웃었다. 그녀는 컵 하나를 들고 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정석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어깨를 당겨 상체를 일으킬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자신이 연신 내뿜고 있는 삭힌 술냄새가 진동하는 가운데서도 정석은 그 안에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육향을 맡을 수 있었다. 그건 여자의 냄새였다.

"아이들은 제 방에서 자고 있어요. 건너방에 이불을 깔아놓았으니 거기서 주무세요."

미자의 몸이 정석의 허리 위로 드리워진다. 느슨하게 차려입은 그녀의 얇은 옷은 몸의 라인을 미처 다 숨기지 못한다. 인공적인 불빛은 없었지만 하늘 높이 떠올라있는 달빛은 그녀의 몸을 비추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정석은 본의 아니게 언뜻언뜻 드러나고 비추는 미자의 속살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런 시선을 아는지 모르는지, 미자는 정석의 신발을 벗기고 자켓 마저 벗겨주었다. 대청마루에 흐트러진 자세로 앉아있던 정석은 미자가 하는대로 몸을 내맡기고 있었다. 미자는 들고 있던 컵을 건넸다.

"드세요."

"이게...꺼억...뭡니까?"

"꿀물이에요. 그대로 주무시면 내일 분명 숙취가 심할 테니까요."

순순히 받아마신 정석의 머릿속에서, 평소부터 가지고 있던 궁금증이 점점 더 커지고 있었다. 술을 많이 마시면 다음 날 숙취로 머리가 아프다는 것쯤은, 누구나 상식으로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정석은 궁금했다. 미자는 대체 자신이 술을 많이 마시고 들어올 거란 사실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집에다 늦는다고 전화도 하지 않았는데 말이다. 준비된 꿀물은 달았지만 그 안에 담긴 의미는 알 수 없었다.

"미자양.... 일단 애들을 깨워서 우리 집에...."

"아뇨. 안 돼요. 깊이 잠들었어요. 그리고 태근이 아버님도 지금은 일단 주무셔야죠."

생긋 웃는 얼굴로 단호한 거절을 말하는 어투는 지극히 자연스러웠다. 미자는 정석을 똑바로 보고 말했다.

"들어오세요. 자고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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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자의 행동이나 대사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다는 분은 40회를 다시 보시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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