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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아빠~ 일어나아~ 아빠~"
숙취로 지끈거리는 머리에 혼란을 더해주는 효진이었다. 정석은 손을 뻗어 딸을 끌어안고 토닥이며 말했다.
"오늘은 토요일이니까... 아빠 쫌만 더 잘게..."
그러면서 얼굴에 대고 문지르자 효진은 까르르 웃으며 벗어나려고 발버둥 쳤다.
"아빠, 따가워~ 잇히히히히."
정석은 눈을 감은 채로, 두 팔에 안긴 딸의 양감을 측정하면서 옆구리 부분을 콕콕 찔러주었다. 효진은 더욱더 까르르 웃어 넘어가며 좋아했다.
"잇히히히히~ 언니가아~ 잇히히~ 밥 다 했어~ 같이 먹어~"
"언니?"
돌아가지 않는 머릿속에서 정석은 효진이가 말한 언니라는 사람이 누구인가 바로 깨닫지 못했다. 그러다 눈을 번쩍 떴다. 눈에 힘일 주어 주변을 둘러보았는데 어째 방 안 풍경이 낯설다. 그제야 정석은 자신이 어제 술에 취해 밤늦게 미자의 집에 왔고, 거기서 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이불에 눕기 직전에 있었던 일도 모두 기억해냈다. 달빛에 드러난 미자의 나신과 거기에 닿았던 자신의 입술까지도....
'꿈...이었나?'
손에 닿던 뭉클하면서도 부드럽던 유방의 감촉. 촉촉하면서도 따뜻한 입술의 습도가 마치 눈앞의 일처럼 생생하다. 알몸을 맞대고 잠들었다. 그러나 지금 아침이 되자 그것은 마치 일장춘몽처럼 느껴질 따름이었다. 효진의 재촉을 받아 마루로 나간 정석은 잘 차려진 아침밥상을 마주하게 되었다. 평범한 셔츠와 긴 치마를 입은 미자가 수저를 놓다가 정석을 보고 살짝 웃으며 인사했다. 정석은 얼떨결에 마주 인사하고는 자리에 앉았다.
"해장하시라고 재첩국 끓였어요."
미자가 건네주는 국을 받는다. 국그릇을 건네받으며 손이 살짝 닿았다. 정석은 살짝 가슴이 설?지만, 미자의 표정은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정석은 숟가락으로 국을 떠먹으면서도 미자를 힐끔힐끔 쳐다보았다. 태근이와 효진이의 밥을 챙기는 미자의 옆모습을 보며 예쁘다고 생각했다. 옷을 벗은 모습도, 옷을 입고 있는 모습도 확실히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녀를 밀어낸 자기 자신의 선택이 살짝 후회되기도 했지만 또 어찌 생각하면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인애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은 정석으로서는 더 이상의 여자 문제를 벌리고 싶지 않았다. 아쉬운 마음을 머릿속에서 얼른 지워버리고 국그릇을 들고 후루룩 마셔버린다. 뽀얗게 우러난 국물이 아주 시원했다. 정석은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한 그릇 더 받아 먹었다. 거하게 아침식사를 마치고 쉬고 있자니 밥상을 모두 치운 미자가 정석에게 말했다.
"오늘은 회사 안 가셔도 되나 보죠? 시간 괜찮으세요?"
"이따 한번 들를까 하긴 하는데..."
"그럼 저랑 어디 좀 가실래요?"
"어디?"
미자는 웃으며 말했다.
"가보시면 알아요."
아이들을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라 정석의 픽업트럭 3인승 좌석은 간만에 승객으로 꽉 차게 되었다. 운전석에 정석이 앉고 바로 옆자리에 태근이가, 조수석에는 효진이를 안은 미자가 탔다. 간만에 아빠와 함께 외출하게 된 효진이는 몹시 즐거워하며 방방 뛰었다.
"언니도 같이 가는 거야?"
"응. 효진이는 언니가 같이 가서 좋아?"
"응. 되게 좋아!"
평소 과묵한 태근이마저 발그레한 표정으로 환하게 웃고 있는 걸 본 정석은 그동안 아이들을 너무 집에만 둔 것 같아서 못내 가슴이 아팠다. 회사에 도착한 정석은 일행을 차에 둔 채 혼자 내렸다. 춘희에게서 주문서와 내역서 등을 받아 정리했다. 어제 그런 이야기도 오고갔지만 되도록 내색하지 않으려고 했다. 춘희도 정석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서류를 정리하고 있는 그에게 춘희가 우물쭈물하며 이야기를 꺼냈다.
"저, 사장님...."
"응? 춘희. 왜?"
"죄송하지만 이번 달 월급, 조금만이라도 가불 안 될까요?"
"가불?"
춘희는 몹시 송구스럽다는 듯이 말했다.
"요새 회사 사정 어려운 건 아는데.... 동생 사납금을 아직 못 내서요. 재촉이 심하다네요....."
고개를 푹 숙인 춘희를 보며 정석은 가슴이 살짝 아팠다. 일단 되는대로 지갑에서 돈을 꺼내어 춘희에게 건네주었다.
"춘희가 우리 사무실 기둥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런 어려운 일 있으면 바로바로 이야기해. 나도 돈 되는대로 알아보고 월요일에 다시 줄게."
"사장님..."
"미안해, 춘희. 자네 마음은 참 고마운데... 알다시피 지금 내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 자네를 못 받아들이겠어. 그렇지만 함께 일하는 동안은 내가 자네를 도울 수 있는 만큼 도울 거야. 내 말, 무슨 뜻인지 알지?"
춘희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눈가에 눈물이 맺히는 것 같았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했다.
"괜찮습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허리까지 꾸벅 숙이는 춘희를 보고 있노라니 정석은 입맛이 썼다. 춘희에게는 이래저래 고마운 일이 많기에 마음 같아서는 더 챙겨주고 싶었지만, 그의 사업은 지금 심각한 자금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여차하면 집 보증금이라도 빼 임시변통해야 할 판이다. 그러나 그는 춘희에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정석은 춘희에게 뒷정리를 부탁하고 사무실을 나왔다. 트럭에서 기다리고 있는 미자와 아이들에게 돌아간다. 핸들을 잡으며 미자에게 목적지를 물었다. 그러자 그녀는 다소 엉뚱한 대답을 내놓았다.
"뚝섬이요."
"뚝섬?"
"거기에 경마장이 있거든요."
정석은 깜짝 놀랐다.
"경마장? 애들을 데리고 그런 데를 간단 말이야?"
"그런 데라뇨? 가족 단위로 소풍도 곧잘 오는 곳인데요, 뭘."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지 마세요. 좋아하는 사람도 있거든요."
"왜 하필 오늘 같은 날...."
"오늘이니까 가야 하거든요."
태연하게 묘한 소리를 답한 미자는 효진이를 돌아보며 말했다.
"효진아. 지난번에 언니랑 봤던 그림책에 나온 말 기억나지?"
"응~ 말! 히히힝하는 말."
효진은 제법 말 울음소리를 비슷하게 흉내 냈다. 그러자 미자가 은근한 말투로 효진을 부추겼다.
"우리 지금 그 말 보러 갈 거야."
"정말?"
그러자 효진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제 아빠를 쳐다보기 시작했다. 애들을 데리고 무슨 경마장이냐고 미자를 타박하려던 정석은 딸의 눈빛 공격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결국 그는 시동을 걸고 뚝섬으로 향했다. 경마장 근처로 가니 도로는 이미 포화상태. 결국 그들은 근처 골목에 차를 세우고 걸어가야만 했다. 태근과 효진은 미자의 손을 잡고 걸어가고 있었고 정석은 뒤에서 담배를 문 채 조용히 따라갔다. 사람으로 북적거리는 그곳은 고래고래 소리 지르는 사람들이 곳곳에 있었다.
"적중률 백 퍼센트!!! 고배당 백 배!!!"
"일본산 경주마 완벽 분석!!!"
"경주마와 기수의 궁합을 파악했습니다!!!"
경마장 근처는 경마잡지를 파는 사람들로 북새통이었다. 정석도 직장생활 신입 때 선배들을 따라 경마장에 몇 번 와 본 적이 있던 터였다. 그는 잡지 파는 사람 한 명에게 다가가 물었다.
"소식지도 있소?"
"이를 말입니까."
뒷주머니에 둥글게 말아 넣은 종이 뭉텅이를 꺼낸 판매상은, 그중에서 파란 종이로 된 것을 한 장 꺼내어 정석에게 내밀었다. 값을 치르고 받아든 정석은 일행을 따라 경마장 건물로 들어서며 종이를 펼쳐본다. 창공, 구름, 비상, 돌풍, 미쯔비시, 금강산 .... 각종 경주마의 이름들과 승리 예상, 배당률 등이 주르륵 실려있었다. 복잡한 숫자와 여러 가지 모양의 기호 배치도 있었다.
"그게 뭔가요?"
미자의 질문에 정석은 어깨를 으쓱했다.
"예전에 선배들 따라서 몇 번 왔었거든. 그때 이런 걸 사길래 나도 한 번 사봤어."
"그걸 보면 맞출 수 있는 건가요?"
정석은 쓰게 웃었다.
"겨우 백 원짜리 종이 한 장 읽고 죄다 맞출 수 있는 게 경마라면, 누가 하겠어?"
"그런가요?"
미자는 정석에게 소식지를 받아들더니 주욱 훑어보았다. 그러곤 아이들에게 건네주며 물었다.
"태근이는 글씨 잘 읽지? 효진이한테 말 이름 읽어주고, 마음에 드는 애를 골라보라그래."
효진이는 "나도 볼래, 나도~"하며 방방 뛰었지만 태근이는 미자가 시키는 대로 했다. 태근이에게 말 이름을 몇 번이고 들은 효진이는 말 이름 중에 '구름'이 이쁘다고 했다.
"그럼 우리 구름 보러 가자."
미자의 말에 모두들 마장으로 내려갔다. 마장 옆에는 울타리가 쳐진 별도의 공간이 있었는데 거기에서 말들이 가장자리를 따라 돌며 다리를 풀고 있었다. 효진이는 말을 실제로 보게 되었다며 방방 뛰며 좋아했다.
"누가 구름이에요?"
잔뜩 모인 사람들 가운데, 흰색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람에게 미자가 묻자 그는 손을 들어 말 한 마리를 가리켰다. 검은색이 많이 섞인 밤색 말이었다. 갈기는 짙은 회색이었다. 그녀는 말 관리하는 사람에게 가까이서 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는 울타리까지는 가도 좋다고 말해주었다. 미자는 울타리 근처까지 다가가 말들을 유심히 살피고 돌아왔다. 말을 가리키며 꺄꺄거리는 효진과 그런 동생을 돌보느라 여념이 없는 태근을 바라보고 있던 정석은, 미자를 보며 물었다.
"말을 볼 줄 아는 거야?"
"글쎄요. 예쁘게 생겼네요. 말이라는 게."
정석은 좀 놀랐다.
"처음 본 거야? 말을?"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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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주인공, 최한석 군은 코빼기도 안 보이는 외전 이야기...
좋아하시는 분도 있고 별로라는 분도 있으시군요.
그래도 제가 해야 할 이야기라고 생각해서 넣은 거니 끝까지, 빨리 이어나가겠습니다.
꾸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