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72화 (172/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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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경마장에 가자고 먼저 말을 꺼내기에 당연히 자주 왔을 거라 생각했는데..."

"마권 살 줄도 모르는 걸요. 태근이 아버님이 좀 가르쳐주세요."

정석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미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마권을 사러 갔다. 마권 판매창구 앞에서 줄을 선 채로 미자에게 설명하기 시작했다.

"단승식이 있고 복승식이 있는데, 어떤 걸로 할래?"

"둘이 어떻게 다른데요?"

"단승식은 1등으로 들어온 말만 맞추는 거고, 복승식은 1, 2등을 다 맞추는 거야. 단승식보다 복승식이 맞추기 어렵지만 배당은 더 높고."

"애들은 말을 하나씩 골랐으니 일단은 단승식으로 하죠."

정석은 기가 막혔다. 이 아가씨는 경마에 대해서 전혀 모르고 있었다. 단승식과 복승식의 차이를 그냥 말 몇 마리 고르는 차이 정도로 알고 있다. 미자는 천 원짜리를 몇 장 꺼내어 아이들에게 한 장씩 주었다. 그러면서 설명했다.

"아까 말 봤지? 그중에서 제일 예쁘게 생긴 애들 이름으로 표를 사는 거야."

"표를 사면 어떻게 되는데요?"

태근이가 묻자 미자는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대답했다.

"이 돈으로 그 말한테 당근을 사준대."

"당근?"

태근이와 효진이는 서로 마주 보며 한참 웃었다. 효진이는 '구름'에게 당근을 사주고 싶다고 했고 태근이는 아까 본 '질풍'이라는 말이 흰색이어서 마음에 든다고 했다. 아이들이 마권을 사러 간 사이, 정석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미자를 쳐다보았다.

"애들한테 그렇게 큰돈을...."

짜장면 한 그릇이 삼백 원 가량하니 천 원이면 세 그릇을 사고도 남을 돈이다. 그만한 돈을 미자는 어른 반 절도 되지 않는 아이들에게 말 당근 사주라며 내주고 있다.

"경마장에 놀러 왔잖아요. 기왕 온 거 재미나게 놀아야죠. 태근이 아버님은 마권 안 사세요?"

"난 돈 없어."

"빌려 드릴까요?"

"사양할게."

"그럼 저 복승식으로 사고 싶은데, 좀 도와주세요. 이걸 어떻게 쓰는 거죠?"

정석은 미자가 불러주는대로 마권 구매용지를 작성했다. 구매 용지를 미자에게 넘겨주고 소식지를 확인한 정석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왜 웃으세요?"

정석은 소식지의 한 귀퉁이를 가리키며 말했다.

"미자 양이 산 마권은... 엄청나게 고배당이야."

"배당이 높으면 좋은 거 아닌가요? 돈 많이 딸 수 있잖아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미자를 보며 정석은 설명해주었다.

"말에 걸린 배당이 높다는 건, 다시 말해서 그 말이 우승할 확률이 적다는 이야기야. 실적이 확실하고 기수도 유명한 사람이어야 우승할 확률이 높지."

"에이, 그러면 배당이 낮잖아요."

"그러니까 말야. 게다가 미자 양이 고른 이 '하얀발'이라는 말은 이번이 데뷔전이라고. 게다가 국산말이고. 이 정도의 배당이라면 여기에 거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뜻이지. 우승 확률이 거의 0에 가까워."

그러나 미자는 정석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생긋 웃으며 마권 구매창구로 걸어갔다.

"전 그게 마음에 들었거든요."

정석은 미자의 대답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따라갔다. 평소 미자가 발랄하고 심성이 고운 아가씨라고 생각했지만, 이런 터무니없는 도박을 즐기는 것으로 보았으니 다시 생각해봐야겠다는 다짐까지 하고 있었다. 정석의 그런 생각은 미자가 창구에 뚫린 구멍을 향해 구매용지를 밀어 넣으며 한 소리를 듣고 더 공고해졌다.

"이대로, 백만 원이요."

미자의 목소리에, 시끄럽기 짝이 없던 주변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군데군데 모여 떠들고 있던 마쟁이들이 미자가 꺼낸 소리에 깜짝 놀랐기 때문이다. 창구 안쪽에 앉아있던 아가씨가 시큰둥한 목소리로 말했다.

"마권은 일 인당 이십만 원까지예요."

"아, 그래요?"

미자는 전혀 개의치 않고 옆에 있는 정석을 끌어왔다.

"이렇게 두 사람이니 그러면 사십만 원까지 살 수 있죠?"

"네."

미자는 가지고 있던 백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더니 거기서 만 원짜리 묶음을 꺼냈다. 천천히 40장을 세더니 전혀 머뭇거리지 않고 그대로 냈다. 창구 여직원이 마권을 기록하고 작은 용지를 출력하여 호치키스로 용지와 함께 철해두었다. 주변에 몰려든 마쟁이들이 어깨너머로 미자의 마권을 보더니 미친 듯이 웃어대기 시작했다. 정석은 그들은 웃음이 비웃음이라는 걸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를 지경이었다. 개중에 누군가 정석의 옆구리를 찌르며 물었다.

"이봐요, 아저씨. 저거 댁 마누라나 여동생, 뭐 그런 거요?"

"아, 아닙니다만...."

"아니길 천만다행이구만. 국산 초짜 말이랑 말고기로도 못 먹을 퇴역 나부랭이를 복승으로 넣어놓고 뭐, 백만 원? 미쳤구만!"

"백만 원은 아니고... 사십만 원인데...."

"사십만 원이 뉘 집 개 이름이여? 우리 집 전세금이 삼십만 원인데!"

그러자 옆에 있던 다른 이가 그를 가리키며 웃었다.

"언제 적에 날려 먹은 전세금을 예서 찾고 있어?"

"그런가? 푸하하하하."

경마꾼들의 비웃음을 들어가며, 정석은 미자와 아이들을 데리고 얼른 창구를 벗어났다. 아이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었고, 미자는 태연했다. 안달이 난 사람은 정석 뿐이었다. 그는 거북한 표정으로 미자에게 말했다.

"미자 양. 집이 좀 살고, 그런 건 알겠는데... 이런 걸 애들에게 보여주는 건 좀..."

"애들에게 왜요?"

"이런 사행성 강한 도박을..."

"도박이라뇨. 전 여기에 돈 벌러 온 건데요."

미자의 대답에 정석은 할 말을 잃었다. 기가 막혔기 때문이다. 한참 만에 그가 무어라 말을 꺼내려 할 때, 경기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사람들의 함성을 받아가며 출발선에 말들이 나란히 섰다. 효진이는 자기가 당근 사준 구름이가 저기 있다며 펄쩍펄쩍 뛰기 시작했고, 태근이 역시 주먹을 휘두르며 자기가 마권을 산 말을 응원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불만이 가득한 표정의 정석을 돌아보며 미자는 생긋 웃었다.

잠시 후.

3,820배.

그렇게 터졌다.

정석은 전혀 실감이 나질 않았다. 미자가 고른 두 말이 결승점을 지나 나란히 1, 2등으로 골인했을 때도 그러했고, 마사회 사무실로 올라가 배당금을 현금으로 요구하는 미자를 보면서도 그러했다. 마장의 마쟁이들은 고함과 비명을 번갈아 질러댔고 마사회는 발칵 뒤집혔지만, 미자는 엄중한 태도로 자신들의 신분을 언론에 흘리지 말 것과 빠른 시간 안에 현찰로 준비하라고 요구했다. 만약, 자신들의 신분이 언론에 조금이라도 언급된다면 마사회 전체를 고소하겠다는 이야기도 분명히 말했다. 넋이 나간 마사회 사무실 사람들은 묵묵히 고개만 끄덕였다.

미자는 전혀 흥분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미소만 띠고 있을 따름이었다. 사무실과 마장 안팎은 흥분으로 들끓었지만, 그녀만큼은 마치 이런 일이 있을 줄 알았다는 듯이 태연하게 행동했다.

불과 한 시간도 채 지나기 전에 그녀의 요구대로 만 원짜리 다발이 배당액만큼 준비되었다. 그것들은 커다란 종이 상자 세 개에 나뉘어 담겼다. 정석 일행은 경찰 사이드카의 호위까지 받아가며 은행으로 직행했다. 업무 시간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미리 연락을 받은 종로의 한 은행은 은행장까지 나와 정석을 환대했다. 어떤 형식으로 예금할 거냐고 묻는 은행장의 질문에 미자는 정석을 돌아보며 말했다.

"이 분에게 여쭤보세요. 이건 이 아저씨 돈이거든요."

정석이 그게 무슨 소리냐며 미자를 돌아보는데, 그녀는 종이상자에서 만 원짜리 40장을 세어 꺼내더니 그것을 챙겼다.

"제 돈 40만 원은 도로 찾아갈게요. 나머지는 태근이 아버님이 쓰세요."

정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미자의 말투는 나머지 돈이 마치 애들 과잣값이라도 되는 양 말하고 있었지만, 그녀가 정석에게 준 돈은 대형 아파트 단지 하나를 건축하고도 남을 돈이었다.

"미...미자 양...."

"전 딱히 돈이 필요 없어요. 이미 집도 있는 걸요. 태근이 아버님은 애들 키워야 하잖아요."

정석이 미자에게 몇 번이나 물어보아도 그녀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나중에는 이런 딱딱한 이야기는 재미없다며 아이들을 데리고 은행 사무실을 먼저 나가버렸다. 혼자 남겨진 정석에게 끈덕지게 달라붙는 은행장의 강권에 못 이겨, 그는 몇 개의 통장을 만들고 돈을 나누어 예치했다. 여태까지 갖고 있던 정석과 그의 회사 앞으로 되어있는 부채를 싹 갚은 건 물론이다. 은행에서의 볼일을 마치고 밖으로 나오자 은행 앞에 세워진 픽업트럭 옆에 서 있는 이들이 보였다. 미자와 태근이, 효진은 아이스크림 하나씩을 손에 들고 뭐가 그리 즐거운지 까르르 웃으며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었다.

"미자 양."

"아, 효진아. 아빠 나오셨다."

미자가 픽업트럭 짐칸에 걸터앉아있던 효진이를 내려주자 효진이는 "아빠~"를 외치며 정석에게 달려들었다. 정석은 두 팔을 뻗어 딸을 안아 올리고 미자의 곁에 섰다. 미자가 물었다.

"설마 다 입금하신 건 아니죠?"

"......좀 남겼어."

"좋아요. 그럼 일단 차부터 바꾸러 가요. 아까부터 기름 냄새가 너무 심해서 머리 아팠거든요."

정석으로서는 미자의 말을 거절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금 기분 같아서는 그녀가 죽으라고 명령하면 죽을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자동차 대리점으로 가서 전시되어 있는 차 중 대형 세단을 하나 골라 일시불로 지불했다. 허름한 픽업트럽 짐칸에서 현금 다발이 담긴 종이상자를 꺼내자 자동차 영업사원은 놀라다 못해 의심스러운 눈빛으로 이쪽을 쳐다봤다. 정석의 면허증을 맡겨 차량 등록증을 발급을 대리점에 일임한 후 그대로 새 차를 몰고 나왔다. 뒷자리에 나란히 앉은 두 아이는 시트가 푹신푹신하다며 소란을 피웠다.

그 후에 그들은 백화점으로 향했다. 아이들의 옷을 사주고 정석의 양복과 미자의 원피스도 한 벌 구입했다. 종로에 있는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까지 마치고 난 후, 그들은 집으로 돌아왔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미자의 집으로 들어왔다. 서울 시내를 마구 돌아다니느라 피곤했을 아이들을 방에 눕혀 재우고 나자 정석은 미자와 단둘이 있을 수 있었다. 대청마루에 나란히 앉은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둥근 달이 떠올랐다. 정석이 물었다.

"난 아직도... 실감이 안 나고 이게 전부 꿈 같아. 무슨 귀신에게라도 홀린 것 같기도 하고."

그러자 미자가 손을 쭉 뻗어 정석의 뺨을 꼬집었다. 살짝도 아니고 아주 세게 잡아당긴 터라 정석은 소리를 지르지 않을 수 없었다.

"아얏! 아파."

"아프신 걸 보니 꿈이 아닌 것 확실하죠? 그리고 귀신이 산 사람을 꼬집을 수 있을 리는 없으니 귀신도 아니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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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820배는 80년대 후반에 실제로 우리나라 경주 경마장에서 터진 고배당입니다.

미자가 거기에 있었는지 저도 모르겠고 극중 시대와는 10년정도 차이가 있지만....

극의 재미를 위해 저 숫자를 가져다 썼습니다.

간단한 계산을 해보죠.

이만한 배당에 사십만원을 걸면, 15억 정도 되는군요.

복승식은 세금이 거의 50% 가까이 되니 반만 잡아도 7억 5천.

요즘은 하도 억억거려서 별로 안 많아보이지만요. 당시 물가가 어느 정도냐면,

웬만한 대기업의 중간 관리자, 그러니까 과장, 차장급의 연봉이 4백만원 가량 되던 시기이고,

79년도 2월 한 달간, 국내 증권사의 순 이익이 총합이 7억원 가량하던 시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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