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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태근은 시무룩한 표정으로 집안에 들어섰다. 신발을 벗고 거실에 올라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던 상장과 메달을 내팽개쳤다. 뒤따라오던 효진이가 바닥에 떨어진 메달 중 하나를 얼른 주워들었다. 그러고는 오빠를 돌아보며 기쁜 어조로 외쳤다.
"오빠, 나 이거 가져도 돼?"
".....맘대로 해."
퉁명스러운 어조로 대답한 태근은 그대로 자기 방에 들어가 문을 닫아버렸다. 너무 세게 닫는 바람에 요란한 소리가 났다. 깜짝 놀란 효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고, 뒤에 서 있던 미자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까부터 노리고 있던 오빠의 메달을 손에 넣은 효진이는 분위기도 모르고 금방 희희낙락했다. 미자는 효진이에게 잠깐 혼자 놀고 있으라고 말하곤 태근의 방으로 다가갔다. 문이 잠겨 있었다. 미자는 가볍게 노크했다. 그리고 문에 대고 말했다.
"태근아, 문 좀 열어봐."
안쪽은 조용했다. 미자는 다시 한 번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누나랑 이야기 좀 해. 응?"
그래도 반응이 없다. 미자는 좀 더 낮은 목소리로, 분명하게 말했다.
"나랑도 이야기 안 할 거니?"
다른 사람은 몰라도 미자의 말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듣는 태근이다. 과연, 잠시 후,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곧이어 잠금쇠 푸는 소리가 났다. 미자가 문을 살짝 밀어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태근은 들어오는 미자를 쳐다보지도 않은 채 그대로 침대로 가더니 이불을 뒤집어썼다. 아무래도 골이 많이 난 모양이다. 미자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 태근의 머리맡에 앉았다. 그리고 차분한 어조로 말했다.
"백 미터와 이백 미터 달리기도 1등 했고, 계주에서도 1등 했잖아. 그것만으로도 대단한데 그거 하나 안 된 게 그렇게 속상해?"
"그거 하나라뇨!"
이불 속에서 태근이가 소리쳤다.
"어준이도 그렇고, 용민이도 그렇고... 진우도 그렇고... 다 나보다 달리기 느린 애들인데! 그나마 빠른 봉주는 그 앞의 경기에서 다리 다쳐서 나오지도 못한다구요! 아빠만 왔으면... 아빠만 왔으면 내가 1등 충분히 하는 건데!!"
태근의 말이 끊어진 까닭은 녀석이 울음을 터트렸기 때문이다. 어지간히 분했던 모양이다.
봄맞이 운동회에서 있었던 달리기 종목은 모두 세 가지. 단체달리기인 계주가 있었고 개인별 달리기로는 백 미터와 이백 미터 달리기가 있었다. 주력이 좋을 뿐만 아니라 승부욕이 남다른 태근은 모든 경기에서 단연 두각을 드러냈다. 개인 경기에서 모두 일등을 차지한 것은 물론 계주에서는 앵커로 활약하며 멋진 역전극을 펼쳐 보이기도 했다. 상장과 메달을 손에 넣은 태근의 기세는 등등했다.
그러나 운동회가 끝나기 전, 학년별로 펼쳐진 "아빠와 함께 달리기" 시간이 되자 태근의 표정은 일그러졌다. 정석이 운동회에 오지 않은 이상, 태근이가 제아무리 빠른 발을 가졌다고 한들 참가자격이 되질 않았다. 그때부터 태근의 표정은 극히 어두워졌다. 응원 나온 미자와 효진이를 본 체도 않았다. 운동회가 끝나자마자 혼자서 집으로 걸어갔다. 철모르는 효진이만 오빠가 부상으로 받은 메달을 탐내느라 옆에서 알짱거리며 쫑알거릴 뿐이었다.
이불 속에 틀어박힌 태근은 제 성질을 못 이기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다. 평소라면 미자에게 그럴 녀석이 아니지만, 지금은 워낙 성이 나 있기에 그렇다.
"아빠가 온다고 했잖아요! ... 아빠 온다고 했는데 .... 왜 안 오는 거예요? 아빠도 거짓말쟁이고, 누나도....흑!"
미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로서도 정석이 원망스럽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일이 바쁜 그 사람만을 탓할 순 없었다. 미자는 이불을 살짝 들쳤다. 이불이 들리는 걸 알아차린 태근은 한사코 이불을 잡아당기려고 했지만 미자가 이불 안으로 들어가는 게 더 빨랐다. 그녀는 이불 속에서 태근의 머리를 찾아 자신의 가슴에 대고 끌어안아 주었다. 조금씩 울먹이던 태근은 미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그대로 크게 울어버렸다. 미자는 그런 태근의 등과 뒤통수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네가 일등에 한사코 매달리는 거... 그래, 그게 나쁜 건 아냐. 그렇지만 네가 기억해야 할 건, 그렇게 일등이 되는 것에만 매달리다 보면 놓치는 게 생긴다는 거야. 지금만 하더라도 넌 네가 타온 메달을 보며 기뻐하는 효진이의 얼굴도 놓치고 있고... 네가 멋있게 달리는 걸 보면서 좋아하는 내 모습도 제대로 보지 못하고 있어. 응? 그렇지 않니?"
미자의 타이르는 말투에, 태근은 볼멘소리로 대답했다.
"일등 하는 게... 나쁜 건 아니잖아요."
"그래. 맞아. 다시 말하지만 그게 나쁘다는 게 아니야. 다만, 무조건 일등을 하기 위해서... 다른 건 다 필요 없고 오직 일등만 하겠다는 그런 생각은 위험해. 일등에 이르기까지 네가 얼마나 열심히 했는지... 달리기를 얼마나 즐거워하는지.... 그런 것들을 잊어버리지 않도록 해. 어쩌면 일등보다 중요한 건 그런 것들이니까."
태근이의 울음은 점차 잦아들었다. 미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한참을 훌쩍거리던 녀석이었지만 본성이 반듯한 녀석이라 금방 제기운을 되찾았다. 그제야 태근은 자기가 어디에 얼굴을 대고 있는지 깨닫고 얼굴이 화끈거리기 시작했다. 남자를 아는 여자의 몸냄새는, 아직 뭐가 뭔지도 모를 어린 녀석을 흥분시켰다. 그것은 본능적인 감각이었다. 그렇다고 몸을 황급히 떼어냈다가는 미자가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할까 봐 태근은 그대로 어정쩡하게 있었다. 대신 주저하며 다른 걸 묻기로 했다.
"저... 누나...."
"응?"
"아까... 나 달리는 거 멋있었어요?"
태근의 수줍은 질문에 미자는 깔깔 웃으면서 두 팔로 태근을 와락 끌어안았다. 태근은 미자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질식할 뻔했다.
"그래, 아주 잘 뛰더라. 아마 창희나 윤숙이도 너한테 홀딱 반했을걸?"
미자의 입에서 동급생의 이름이 나오자 태근은 버둥거리며 반박했다.
"여기서 걔네 이름이 왜 나와요?"
태근의 반응을 보면서, 미자는 깔깔 웃었다.
"어머? 부끄러워하는 거야? 둘 중에 하나가 여자친구 아니었어?"
"그런 거 아니에요!"
애써 힘주어 반박하는 태근를, 미자는 더욱 놀린다.
"어머나. 오늘 보니까 눈치가 장난이 아니던데? 걔네들이 태근이 엄청 좋아하는 거 같더라고."
"저는 걔네 안 좋아해요!"
"그럼 누구 좋아하는데?"
"제가 좋아하는 사람은...."
여기까지 말하던 태근은 입을 조개처럼 딱 다물었다. 미자는 빙글거리며 재차 캐물었지만 태근은 고개만 저을 뿐이었다. 태근이 대답을 않자 미자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누굴 좋아하는지 모르겠지만.... 남자는 그렇게 울거나 떼쓰거나 하면 안 돼. 여자 앞에서는 울지 말고, 여자가 하는 말에 잘 따라주어야 진짜 남자인 거야."
"정말요?"
"당연하지."
그러자 태근은 매우 당황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황급히 눈가를 비벼 눈물 자국을 지워냈다. 미자는 그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뻔히 알면서도 빙글거리며 태근을 놀려대기 시작했다.
"나도 원래는 태근이 참 좋아했는데 말야. 이렇게 일등 한번 놓쳤다고 엉엉 울고 있는 걸 보고나니... 마음이 싹 사라지는걸?"
이쯤 되자 태근의 얼굴은 새하얗게 변하기 시작했다. 녀석은 말까지 더듬거렸다.
"누...누나가 나 싫어하는 건가요?"
"싫어한다고는 안 했는데, 음... 좋아했던 게 조금 줄어들었달까?"
"아...안 돼요!"
"왜 안 돼?"
"그...그거야...."
우물쭈물하는 태근을 보며 미자는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걱정 마. 남한테는 이야기 안 할 테니까. 태근이가 울었다는 걸, 아무에게도 말 안 할 테니까."
"그래도...."
"태근이와 나 사이의 비밀로 하자. 알았지?"
"네에."
"자아, 이제 얼굴 풀고, 나와서 효진이랑 놀아줘. 혼자 있어서 심심할 거야."
미자가 몸을 일으키려 하자 태근은 자기도 모르게 미자를 더 끌어안았다. 자신의 몸에 매달리는 태근을 보면서, 미자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이제 기분 다 풀린 거 아니었어?"
"아, 아니... 그게...."
미자는 자신의 허벅지에 와 닿는 단단한 것을 느끼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모른 체하고 있었다. 흐드러지게 핀 봄꽃이 거의 다 지고 이제 여름꽃인 장미가 꽃봉오리를 맺기 시작하는 계절이다. 미자가 입고 있는 원피스는 몹시 얇은 재질이어서 그녀의 몸에 지그시 와 닿는 태근의 몸 전체를 그대로 느끼고 있었다. 미자는 자신의 몸에 달라붙어 떨어질 줄 모르는 태근의 등을 천천히 쓰다듬었다.
"아직 기분이 안 풀린 거야? 내가... 어떻게 해주면 풀릴까, 우리 태근이가?"
"그냥... 이대로... 잠깐만 더 있으면 안 돼요?"
"안 될 것도 없지만... 효진이가 심심할 텐데?"
"그래도요."
더욱 미자의 가슴으로 파고드는 태근이었다. 미자가 입고 있는 슬리브리스 원피스의 한쪽 어깨끈이 아래로 내려가 있었다. 자연스럽게 벌어진 가슴골의 자태가 여실히 드러난다. 태근의 거친 숨결이 미자의 원피스를 적실 지경이었다.
"누나..."
"응?"
"만져...봐도 돼요?"
"뭘 말야?"
미자는 다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짓궂게 물어본다. 얼굴이 벌게진 태근은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간신히 말한다.
"누나... 가슴이요....가슴 만지게 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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