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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달칵- 하는 문소리에 정석은 잠에서 깨어났다.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비어있던 자신의 옆자리가 채워졌다. 정석은 눈을 뜨지 않은 채 말했다.
"어디 다녀온 거야?"
"잠깐 할 일이 있어서요."
정석은 팔을 뻗어 미자의 몸을 끌어안았다. 얇은 잠옷 너머 미자의 몸이 느껴졌다.
"무슨 할 일?"
"말해줄까요?"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미자는 가끔 전혀 엉뚱한 이유로, 엉뚱한 일을 하곤 했다. 그걸 생각한 정석은 그냥 자자고 했다.
"난 또 지난번처럼 혼자 어디 가서 울고 있나 했지."
그러자 미자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런 일이 자주 있지는 않아요..."
"그래, 알았어."
정석은 다시 까무룩 잠이 들었다.
그로부터 몇 주 후, 서울은 술렁이기 시작했다. 전국 각지에 다양한 사업을 전개하고 있던 정석은 그 미묘한 움직임을 일찌감치 파악하고 여러 가지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쉽지 않은 일이었지만 막대한 자금과 추진력을 지닌 인재들을 거느리고 있던 정석이었다. 돈과 조직의 힘으로 해결하지 못할 일은 별로 없었다. 다만, 몇 가지 부족한 게 있기는 했다.
서울 종로에 위치한 한 요정. 밤늦은 시각. 며칠 전 비상계엄이 전국을 대상으로 확대되기 시작된 터라 서울 전체의 분위기는 삭막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이곳만큼은 예외였다. 화려한 불빛이 아름다운 정원을 수놓고, 여인의 웃음소리와 밴드가 연주하는 음악 소리가 가득한 곳이다. 일반인들은 한 달 월급에 해당하는 돈을 한 끼 식삿값으로 지불하고도 모자를 업소인지라 아무나 출입할 수도 없고, 아무나 손님으로 받지도 않는다.
가게의 너른 정원 뒤쪽, 으슥한 곳에 자리한 별채에서 정석은 한 명의 남자와 마주하고 있었다. 짧은 머리를 한 남자는 매우 날카로운 눈매를 가지고 있었다. 정석은 그의 이름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원하는 대로 김 대령이라고만 부르고 있었다. 군복이 아닌 사복을 입고 있을 때도 군인이고 싶어하는 그의 바람을 정석은 이해하고 있었다. 군인이 권력의 핵심인 요즘, 그 정도의 자부심은 당연하다고도 할 수 있다. 오히려 그 자부심을 살살 맞추어주고 돋구어주는 게 정석에게는 더 유리하다.
원래는 옆자리에 기생 한 명씩 두고 자리를 갖게 되지만, 김 대령의 말에 따라 밴드는 물론 기생도 모두 물리고 독대를 하고 있었다. 그는 앞에 놓인 인삼주를 쭈욱 들이키고 말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운영자금은 무척 유용하게 잘 쓰였소. 우리 사령관도 좋아하셨지."
정석은 사기로 된 술주전자를 들어 그의 빈 잔을 채워주며 말했다.
"아, 그렇습니까? 다행이군요."
"안 그래도 좀 있으면 더 높은 곳으로 영전하실 분이라, 이래저래 돈 들어갈 곳이 한두 군데가 아니었거든."
"영전이라니.... 축하드립니다. 지금 계신 곳에서 더 올라갈 곳이 있나 보죠?"
"왜 없겠어? 후후."
김 대령은 검지를 세워 천장을 가리켰다. 1자의 표시. 정석은 그 손가락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알았지만 별로 놀라지는 않았다. 으레 그러려니 생각했고, 그렇기에 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일부러 더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역시... 그러시군요."
정석의 놀란 표정이 상대를 만족시켰다. 김 대령은 으스대며 말했다.
"그렇지. 그러니 우리도 박 회장 같은 사람들의 도움이 절실하오. 군인으로만 있으려면 모르겠지만, 나랏일을 하려면... 아무래도 이래저래 신경 쓸 게 많아지거든."
"하하. 보잘 것 없는 제 돈이 나랏일에 쓰인다니, 영광입니다."
정석은 겉으로 웃었지만, 속으론 비웃었다. 작년에 나라를 발칵 뒤집어놓은 박통 피격사건 이후 무섭게 떠오르는 실세가 있었다. 그자의 숨은 측근이 바로 김 대령이었다. 지키라는 나라는 안 지키고, 다른 것을 지키고 탐내는 드는 그들의 행태가 아니꼽기 짝이 없었지만 돈은 있되 권력은 가지지 못한 박 회장의 입장에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기도 했다. 정석은 이런저런 말로 김 대령의 비위를 맞추고 달랬다. 앞으로의 일에 대해 의논하면서 김 대령이 툭툭 던지는 작은 정보 하나에도 귀를 기울였다.
돈은 권력의 흐름을 따른다. 권력이 흘러가기 위해서는 돈이란 기름칠이 필요하다. 양쪽의 이해관계는 그렇게 맞아떨어졌다. 듣기로는 저 멀리 부산 쪽의 한 재력가는 김 대령의 윗선에 밉보인 이후 다시는 재기할 수 없을 정도로 짓밟혔다고 했다. 정석은 그런 꼴이 되고 싶지 않았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무렵, 젓가락으로 야채무침을 뒤적거리던 김 대령이 지나가는 어조로 말했다.
"그런데 요새 묘한 소식이 들려오더군. 박 회장이.... 일본에서 엄한 짓을 하고 있다고."
정석은 바짝 긴장했다. 어느 정도 예상은 했다만, 벌써부터 듣게 될 줄은 몰랐다.
"제가, 말입니까?"
"음... 나야 뭐, 박 회장을 믿으니 그럴 사람이 아니라고 애들에게 말해두기는 했는데 말야. 걔네 하는 일이 원래 그런 거잖아. 모든 것을 의심하라고 가르친 것도 나고 말야. 그러니 설명을 좀 들어야겠어."
사람 좋은 웃음만 짓고 있던 김 대령의 눈이, 서서히 날카로워졌다. 그는 맞은 편의 정석을 똑바로 쳐다보고 있었다. 그가 말하는 '애들'이라는 게 어떤 사람들인지, 정석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언제고 이런 이야기가 올 줄 알고 있었던 정석은 마음을 다잡으며 애써 평정을 가장했다.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이렇게 맞닿아뜨리고 나면 아무래도 긴장되지 않을 수 없다. 정석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천천히 이야기를 꺼냈다.
"사람을 하나, 찾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렇습니다. 쉽지 않다 보니 아무래도 무리도 한 모양입니다."
"사람?"
"네."
"그런 거라면 진작에 나한테 부탁하지 그랬어. 우리가 또 그런 게 전문이잖아. 사람 찾는 거 말야."
정석은 속으로 생각했다.
'찾는 것만 전문이겠냐... 니들이...'
그러나 겉으로는 겸양을 떨었다.
"물론 알고는 있습니다만.... 개인적인 일이라서 말이죠. 게다가 상대는 여자이기도 하고."
"여자?"
김 대령의 얼굴에 비웃음이 나타났다. 군대라는 마초적 집단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은 아무래도 여자라는 존재 자체를 무시하려는 성향이 컸다. 그는 자신의 생각을 숨기지 않고 정석에게 말했다.
"뭐야, 집 나간 마누라라도 되는 거야? 그게 아니면 돈 떼어먹고 달아난 옛 애인이라거나. 뭘 그런 걸 가지고 고민하나 그래."
"이런저런 안 좋은 일로 잔뜩 얽힌 사이라서... 김 대령 번거롭게 해드리기도 무엇하고. 또 무엇보다 일본에 제 나름의 연락책이 있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연락책이라... 그런 거 돌린다고 뭐라 그럴 사람은 없는데 말야. 그래도 그쪽 애들 만나고 그러는 건 좀 아니라고 보는데?"
말 중에서 묘하게 강조되는 "그쪽 애들"이라는 표현이 정석을 긴장시켰다. 그는 상대처럼 에둘러 표현하지 않고 그대로 말하기로 했다.
"처음에는 민단에 요청해서 찾아보았습니다만 전혀 나오지 않더란 말이죠.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조총련계에 선을 대고 있는 겁니다. 실제로 제가 찾으려는 년이 그쪽에 선이 닿아있다는 것도 확인이 된 상태고요. 조만간 꼬리를 잡을 수 있을 듯 합니다. 다만 그런 모양새가 중정에서 보시기에 별로 좋지 않았겠군요."
어차피 상대는 이쪽의 행동에 대해 다 파악하고도 남을 인간들이다. 그렇기에 정석은 차라리 솔직하게 말하는 편을 택했다. 다행히도 상대는 그런 정석의 대답을 수긍한 모양이다.
"뭐... 반공이야 우리의 깃발 아니겠소. 자나깨나 반공. 뒈진 빨갱이도 다시 보자."
"잘 알고 있습니다."
"사정을 들었으니, 내 애들에게도 그리 말해두리라. 박 회장이야 우리가 모르는 사람도 아니고.... 또 아실만한 분이니 잘 하리라 믿소. 필요하다면, 우리도 도움을 줄 수 있도록 선처하리라. 다만 선을 넘지 마시오."
"이해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앞으로도 주의하겠습니다."
허리를 굽혀 깍듯한 인사를 마친 정석은 미리 준비해놓은 보따리 하나를 상 위로 전달했다. 김 대령은 손을 뻗어 그것을 받고 풀어보지도 않은 채 자기 옆자리에 두었다. 방금 들어올리면서 무게만으로 내용을 대충 짐작한 모양이었다. 정석은 역시 금으로 채우길 잘했다고 생각했다. 김 대령의 눈치를 살핀 정석은 바깥을 향해 사람을 불렀고, 이내 기생 두 명이 들어와 술 시중을 들기 시작했다. 정석은 기생 한 명에게 일러 밴드까지 부르게 하고는 김 대령에게 연신 술을 건넸다.
자정이 넘어가서야 술자리가 파했다. 자신의 시중을 들던 기생이 마음에 드는지 끝까지 붙들고 놓질 않는 김 대령이었다. 정석은 술값을 계산하면서 주인을 불러 기생에 대한 값도 마저 치뤘다. 원래 요정의 기생들을 이런 식의 2차는 나가지 않지만 상대가 상대니만큼 어쩔 도리가 없었다. 요정 주인도 김 대령이 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일찌감치 포기한 듯 했다.
차가 준비되었다는 소리에 정석은 김 대령을 데리고 마당으로 나왔다. 김 대령의 옆구리에는 아까 그 기생이 서서 그를 부축하고 있었다. 통금이 걸린 시간이었지만 김 대령이 타고온 차는 군용 지프였고, 정석의 차에도 보안사에서 발급한 증명서가 있기에 전혀 문제되지 않았다. 김 대령은 기생을 차에 먼저 태우고 뒤따라 타면서 정석에게 말했다.
"암튼, 늘 조심하시오. 자나깨나 공산당 새끼들... 조심.... 응? 알았지, 박 회장."
"네, 잘 알고 있습니다.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요."
적당히 조절해가며 마신 정석과 달리 김 대령은 고주망태였다. 그는 이런저런 헛소리를 늘어놓으며 자꾸 시간을 끌었다. 정석은 운전병에게 눈짓을 하여 함께 도와 김 대령을 차에 태웠다. 간신히 뒷좌석에 탄 김 대령은 창밖의 정석을 보고 말했다.
"박 회장.... 혹시 광주에 친척이나 ..... 친구 있소?"
정석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뇨. 없습니다만...."
자기도 모르게 거짓말을 하고 말았지만, 김 대령은 상대의 반응은 개의치 않았다.
"음... 다행이구만."
"광주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김 대령은 손을 내저으며 말했다.
"요새 하도 시끄러워서 말야.... 물론 사방에서 좆도 모르는 반동새끼들이 준동하고 있는 거야...뭐... 하루 이틀이냐만은... 광주 거긴 아무래도 고정간첩 새끼들이 설치는 것 같아서 말이지... 지금 확 밀어버리려고 하거든."
"밀다뇨?"
"어설프게 경찰 이딴 거 말고.... 확실한 애들로 말야."
김 대령은 그렇게 말하며 손을 들어 목을 긋는 시늉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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딱히 정치적 해석을 염두에 둔 것은 아닙니다만... 이 이야기까지 나오고 말았습니다.
여태 더블 데이트 주욱 지켜보신 분들이라면 알겠지만,
큰 사건이 있으면 어떻게든 우겨 넣으려는 게 저의 습성입니다.
비극적인 사건이지만, 여기서는 그저 배경으로 등장할 뿐입니다.
그러니 부디 그런 쪽으로 양해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