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79화 (179/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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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크윽- 이렇게 말이지."

정석은 섬뜩했지만 애써 내색하지 않았다.

"역시 나랏일은 쉬운 게 없나 보군요. 조심해서 들어가십시요. 자네도 잘 모시게."

정석은 운전병과 기생에게도 따로 돈을 질러주어 보냈다. 김 대령의 차가 멀어진 후, 정석은 자신의 차로 향했다. 대기하고 있던 운전사가 열어준 차에 올라탄 후에도 그는 말이 없었다. 운전사인 최 씨가 집으로 모시냐고 묻자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예전에 있었던 일에 대해 생각하고 있었다.

언제였는지는 모르지만 시간은 확실히 기억하고 있다. 늦은 밤이었다. 정석은 이상한 느낌에 눈을 떴다. 그의 옆자리가 비어있었다. 그리고 안방에 딸린 욕실에서 어떤 소리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것은 분명 여자의 울음소리였다. 정석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쪽으로 다가갔다. 욕실문을 조심스레 열며 이름을 부르자 좌변기 위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있는 미자가 고개를 들었다.

"아저씨....."

그녀의 얼굴이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미자의 우는 모습을 두 번째로 본 정석은 깜짝 놀라 이유를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어떡하면 좋아요...."

"어떡하면 좋다니, 무슨 일이야."

사실 이런 일이 처음은 아니다. 그녀와 함께 지낸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미자는 한밤중에 침대에서 서럽게 운 적이 있었다. 정석이 이유를 묻자 그녀는 자신의 끝을 보았노라며 끝도 없이 울었다. 정석은 그녀를 한참동안이나 달래며 품에 안아 주었다. 그런 모습을 보며 정석은 '앞'을 보는 미자의 능력이 부럽다기보다는 안쓰럽게 생각되었다.

미자는 고개를 저으며 정석에게 말하려 하지 않았지만, 거듭 재촉하자 겨우 입을 열었다.

"사람이... 사람이 많이 죽어요... 죽고.. 또 죽고... 죽여요...."

"지구 상에서, 그런 어리석은 일은 수도 없이 일어나."

"이건 달라요. 이건... 그런 단순한 일이 아니라... 계획적인..."

미자는 말을 채 잇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새벽이 다가오고 해가 뜰 때까지도, 그녀는 쉬이 눈물을 멈추지 않았다. 정석은 그 일을 생각하고 있었다. 어떤 이상한 감이 그의 마음을 흔들었다. 정석은 목적지를 묻는 최 씨에게 대답 대신 손을 뻗으며 말했다.

"카폰 좀 줘보게."

"이 시간에... 어딜 거시게요?"

"급한 일이야."

카폰을 받아든 정석은 교환수가 나오자 집 전화번호를 댔다. 잠시 후, 연결이 되자 차분한 목소리의 미자가 전화를 받았다.

"아저씬가요?"

"그래. 나야. 안 자고 있었군."

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평소에도 정석이 늦게 들어간다고 해서 굳이 안 자고 기다리거나 하지 않는 그녀였다. 그런 그녀가 정석의 전화를 마치 기다리고 있다는 듯 받았다. 사소한 일이지만, 정석은 가슴 속 깊이 서늘함을 느꼈다. 미자는 이런 늦은 시간에는 어쩐 일로 전화를 거냐는 묻지도 않았다. 정석은 마음속 불안을 잠재우기 위해 생각하고 있던 걸 물어보았다.

"미안하지만... 우리 회사에 손 변호사 알지?"

"저번에 한 번 만났었죠. 네. 기억나요."

"혹시... 그 사람을 본 적 있어?"

운전사 최 씨는 뒤에서 들려오는 정석의 말에 의아함을 느꼈다. 만난 적이 있으면 당연히 본 적도 있는 것 아닌가. 정석의 질문 의도를 모르는 그로서는 당연한 의문이었지만, 미자는 달랐다. 그녀는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뭐... 대충... 알고 전화하신 건가요?"

"알다니? 난 전혀 몰라. 그냥 예감이 이상해서 그래."

"......"

미자는 대답이 없었다. 밤의 어둠보다도 짙고 무거운 침묵 만이 수화기에서 전해져 올 뿐이다. 참다못한 정석은 소리를 지르고 말았다.

"미자!"

"알았어요. 소리 지르지 마세요. 그렇지만,....."

미자는 말끝을 흐렸다. 늘 당당하고 또렷하게 말하는 그녀가 이런 태도를 보이는 건, 뭔가 상당히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라는 걸 정석은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더욱 불안해졌다. 미자는 엉뚱한 대답을 꺼냈다.

"지금 아저씨가 광주로 간다고 해도 뭐가 크게 달라지지는 않을 거예요."

"젠장!"

정석은 전화를 끊었다. 다시 수화기를 들고 광주지역으로 넘겨달라고 요청했다. 잠시 후, 광주지역의 교환수가 나오고 가입자의 이름을 묻자 정석은 동구 금남로에 있는 손윤희라고 답했다. 신호는 더디고 길었다. 정석은 초조해졌다. 그러나 그의 초조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전화연결은 이내 끊어지고 말았다. 카폰이라 그런 줄 알고 몇 번 더 시도했지만 연결이 이뤄지지 않았다. 정석은 교환수에게 화도 내보았지만, 그녀도 사정을 모르긴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광주 쪽 전화 사정이 원활하지 않다고 했다. 정석은 카폰을 집어 던지고 최 씨에게 외쳤다.

"최 기사! 광주로 갑시다."

"네에? 지금요?"

"손 변호사 집 주소는 알고 있죠?"

"네... 전에 한 번 태워다 준 적이 있어서..."

"거기로. 빨리 갑시다."

최 씨는 정석의 태도가 하도 완강하여 더 묻지 않고 차를 출발시켰다. 대형 외제세단인 정석의 차는 어지간한 검문은 그대로 통과했다. 광주까지의 도로가 사정이 썩 좋은 편은 아니었지만, 차도 없고 도로가 한산하여 새벽이 밝아올 때쯤 광주 외곽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석은 군인들을 가득 실은 육공트럭이 점점 늘어나는 창밖의 풍경을 보며 생각했다. 뭔가 이상하다. 광주 근처에 군부대가 그렇게 많았던가. 개중에는 단순한 육군이 아니라 공수부대의 마크를 달고 있는 차량도 여럿 눈에 보였다.

"정지! 라이트 꺼!"

급기야 바리케이드가 쳐진 검문소에서는 정석의 차를 정지시켰다. 최 씨가 창문을 내리고 무슨 일이냐고 묻자 지금 이 길로 광주에 들어갈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꽤 고압적이고 완강한 어조였다.

"지금 광주 시내는 폭도들이 횡행하고 있습니다! 선생님께서는 돌아가시기 바랍니다."

얼굴에 위장용 크림을 잔뜩 바른 군인이었다. 그는 완전무장한 채였고 손에는 탄창이 끼워진 총이 들려있었다. 최 씨가 뒷좌석의 정석을 돌아보았다. 정석은 예전에 김 대령에게 받았던 보안사의 증명서를 꺼내 들었다. 창문을 통해 그걸 받아든 군인은 초소로 돌아가 어딘가로 연락하는가 싶더니 이내 돌아와 경례를 붙이며 말했다.

"무슨 일로 들어가시는지 여쭤보아도 되겠습니까?"

"사람을 만나러 갑니다."

"정 그러시다면 들어가셔도 좋습니다. 다만, 나오실 때는 지금 인원 그대로 나오셔야 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말 그대로입니다. 지금 차량에 탑승한 2인, 그대로 나오셔야 한다는 말입니다. 선생님이 광주에 남는 것도 안 되고, 거기서 누군가를 데리고 나오는 것도 안 됩니다."

시커멓게 칠해진 얼굴 너머 안광이 번뜩이고 있었다. 대화가 통할 상대가 아니라고 생각한 정석은 최 씨의 어깨를 두드려 그만하면 됐다고 이르고 검문소를 통과했다. 최 씨는 주눅 든 어조로 말했다.

"난리가... 심하게 났나 보네요. 대학생들이 시위를 심하게 하나 보죠?"

"그저 그런 거라면 다행인데...."

정석의 뇌리에는 아까 김 대령이 했던 손동작이 선명하게 남아있었다. 목을 긋는다. 목을 그으면 사람이 죽는다. 그는 군인이다. 그리고 방금 그들을 막아선 것도 군인이었다. 알 수 없는 뭔가 불안한 감정이 그의 안에서 일렁였다. 윤희의 안위가 걱정되었다. 사실 그와 윤희는 업무적으로 관련된 거 외에 사적인 관계 따위는 전혀 없었다. 그저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똑똑하고 일 처리가 빠른 사람이라 여러 사람의 추천을 받아 그 자리에 앉혀놨을 뿐이었다.

직원들의 사생활에는 그다지 간섭하지 않는 정석이었지만, 춘희는 달랐다. 그녀는 직원들 하나하나의 사정을 다 파악하고 회사 생활 외의 일도 도와주곤 했는데, 그런 그녀의 말에 따르면 윤희는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고 나이 차 많이 나는 동생이 있다고 했다. 그래서 어려움이 없도록 가끔 지원해 줬을 뿐이다. 지난번, 귀국했을 때 그녀의 동생들을 위한 선물을 준비한 것도 그런 맥락이었다.

그러나 아까 김 대령이 광주를 언급하며 묘한 손동작을 해 보일 때, 그가 제일 먼저 생각난 사람은 윤희였다. 광주가 고향인 그녀는 평소처럼 정석에게 귀국 보고를 마치면 서울에 머물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게 정석이 김 대령을 만나기 하루 전의 일이었다.

"저기...입니다. 아마도 저기가 금남로일 겁니다."

"아마도라니?"

정석을 모시고 전국을 누비는 최 씨였다. 길 찾는 거에 있어서는 가히 전문가라 할 만한 사람이다. 그런 그가 광주 최대의 거리인 금남로를 가리켜 "아마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정석은 고개를 빼내어 앞 좌석 사이로 정면을 바라보았다. 신음을 흘렸다.

"세상에...."

거리에 가득한 새벽안개가 서서히 물러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가리고 있던 안개가 걷히자 숨겨 있던 모습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곳에 정석이 알고 있는 금남로는 없었다. 낯선 풍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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