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80화 (180/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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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그렇게 자주 온 것은 아니지만 정석이 기억하는 금남로는 이렇지 않았다. 넓고 쭉 뻗은 도로를 달리는 차들과 그 양옆에 드리워진 가로수 아래로 걸어 다니는 꽃다운 청춘남녀들로 가득 찬 거리였다. 웃음이 있고, 노래가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지금의 금남로는 차 대신 장갑차와 바리케이드가 가득했고 청춘남녀들이 거닐던 인도는 완전무장한 군인들로 가득했다. 노랫소리는 고사하고, 새벽의 적막함을 뚫고 어딘가에서 군홧발 소리가 착착착 들려온다.

정석은 최 씨에게 큰길은 피하고 되도록 뒷길로 가도록 명했다. 최 씨도 눈치가 있는 사람이라 황급히 차를 돌려 인적이 드문 곳을 통해 빠져나갔다. 군인들이 막아선 길이 몇 군데 있었지만 그들은 이 대형 세단에 사나운 눈빛만 던질 뿐, 딱히 막아서거나 검문하지 않았다. 익숙지 않은 골목골목을 헤집고 다닌 끝에, 그들은 목적했던 윤희의 집에 도착할 수 있었다. 차가 멈추자마자 정석은 뛰어내리다시피 내렸다. 대문을 두드려 보았지만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살짝 밀자 그대로 열린다. 정석은 안으로 들어가며 외쳤다.

"손 변호사! 손윤희!! 계십니까?"

그녀의 집은 마당이 딸린 전통한옥이었다. 마당에 들어선 정석이 애타게 윤희를 불렀지만 누구 하나 내다보는 이가 없었다. 주변을 둘러보던 정석은 대청마루에 흥건하게 고여 있는 무언가가 녹물이 아니라 누군가의 피라는 걸 깨닫고 깜짝 놀랐다. 뒤따라 집으로 들어온 최 씨는 정석의 지시를 받고 방과 방을 뒤졌지만 아무도 찾아내지 못했다. 아무런 소득을 얻지 못한 최 씨는 불안감이 가득한 얼굴로 정석에게 돌아와 종용하기 시작했다.

"회장님. 아무래도 변고가 크게 난 것 같습니다. 저희라도 빨리 돌아가죠. 여기 오래 있어봐야 좋은 꼴 안 날 것 같습니다."

정석도 최 씨의 의견에 동의했지만 차마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래도..."

"손 변이 정말 무사하다면, 나중에라도 회사로 돌아오지 않겠습니까? 굳이 회장님이 여기까지 와서 찾을 필요가...."

최 씨의 말도 일리는 있었다. 정석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결심을 내리고 확고한 어조로 말했다.

"여기 사정이 험한 줄 뻔히 아는데... 그렇다고 그냥 돌아가 버리는 건 아니라고 봅니다."

정석의 말에 최 씨는 고개를 저었다.

"난리는 일단 피하고 보는 게 상책입니다. 괜한 곳에 서 있다가 눈먼 돌덩이에 맞아 죽을 수가 있습니다."

"허어.. 이것 참..."

그렇게 어서 떠나자는 최 씨와 좀 더 찾아보자는 정석이 마당에 서서 옥신각신하고 있는데 누군가 대문에 들어서며 말했다.

"누구시죠?"

하이톤의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정석이 고개를 돌려 뒤를 보자, 거기에는 태근이 또래의 여자아이가 서 있었다. 입고 있는 원피스는 원래 하얀 색인듯했지만 먼지와 때가 잔뜩 묻어 있어 회색으로 보일 지경이었고 군데군데 피까지 묻어있었다. 정석은 소녀에게 물었다.

"그런 넌 누구니? 이 집 아이니?"

"제가 먼저 물었어요."

정석은 가볍게 혀를 찼다. 당돌하기는 하지만 소녀의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어린 녀석치고 담과 말솜씨가 보통이 아니었다. 차림새로 보아 큰일을 당한 게 분명한데도, 말투에 힘이 있고 논리정연했다. 정석은 녀석의 태도에서 익숙한 무언가를 느꼈다. 넌지시 짐작하며 물었다.

"넌 손 변호사 동생이구나. 그렇지? 어린 여동생이 있다고 했었는데."

그러자 아이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언니를 아세요?"

"그래. 네 언니가 일하는 회사의 회장이다. 박정석이라고 하지."

상대가 비록 어린 아이이긴 했지만 정석은 최대한 성의를 다해 설명했다. 아이의 눈이 커졌다. 녀석은 두 손을 모아 앞에 가지런히 하고는 깍듯하게 배꼽 인사를 했다.

"언니가 늘 신세를 지고 있습니다. 저는 막내 동생, 하영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보내주신 선물은 잘 받았습니다."

이런 와중에도 인사를 잊지 않는 폼을 보아하니 평소에 어떤 집안 교육을 받고 자랐는지 알만했다. 정석은 하영이 기특하다고 생각은 했지만, 그런 만큼 마음이 아팠다.

"그렇구나. 다들 어디 갔니?"

하영의 얼굴에 어두운 빛이 스쳤다. 여태까지 또박또박 말 잘하던 녀석이 대답을 주저한다. 정석은 그제야 이 아이가 자신을 경계하고 있다는 걸 알았다. 품에서 명함까지 꺼내어 하영에게 건넸다.

"보렴. 여기 네 언니가 다니는 회사 이름 쓰여 있지? 이 아저씨는 여기 회장이야. 네 언니 잡으러 온 사람이 아니란다."

그러자 하영은 쪼르르 달려가 자기 방에서 무언가 꺼내왔다. 법무팀 팀장이라고 적힌 언니의 명함이었다. 정석과 모양이 같은지 확인까지 해본다. 정석은 아이의 명석함에 새삼 놀라면서도, 이렇게까지 다른 어른을 못 믿고 무서워하는 지금 이 상황이 너무도 비극이라고 생각했다. 하영은 한참 만에 정석에게 대답했다.

"큰 언니는 다쳐서 병원에 있어요. 그리고 오빠가 시청에 있어서 거기에 갔더니 군인들이 못 들어가게 해서...."

"시청? 거긴 왜?"

"시위하다 몰린 사람들이 시청에 갔다가 지금은 못 나오고 있어요. 그 사람들한테 총이 있어서 군인들이 들어가지도 못하고요. 군인들도 총이 있어서 안에 있는 사람들도 못 나오고.... 계속 그러고 있어요."

정석과 최 씨는 서로 마주 보았다. 군인들이 총을 든 거야 이미 보았으니 새삼 놀랍지는 않았지만 시위대에게까지 총이 있다는 건 이미 걷잡을 수 없다는 사태로 번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전국에서 시위는 많이 일어나고 있지만 시위대가 총까지 들었다는 소리는 금시초문이다. 정석은 하영에게 물었다.

"하영이라고 했지? 언니가 있는 병원이 어디니?"

하영은 그들을 안내했다. 어린아이 발걸음으로는 한참이지만 차로는 금방인 거리였다. 병원은 신음하는 부상자로 초만원이었다. 병상이 부족하여 복도까지 붕대를 칭칭 동여맨 환자가 널브러져 있었다. 정석은 병원에 들어오며 마당에서 본 무언가가 그저 통나무에 하얀 천을 덮어놓은 것이길 빌었다. 그러나 병원 마당에서 그런 물건에 하얀 천을 덮어두진 않는다. 이미 영안실은 가득 찬 모양이었다. 더이상 영안실에 수용할 수 없으니 마당에 그리 둔 것이리라. 정석은 자신의 짐작보다 사태가 심각하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영을 따라 계단을 올라가서 한 병실에 도착한다. 하영은 안에 들어가자마자 언니에게 달려갔다.

"언니!!"

원래 6인실 병실이었지만 열댓 명은 족히 들어찬 병실 한쪽에 윤희가 있었다.

"하영아, 집에 가 있으라고 했잖아."

동생을 타이르던 윤희는 뒤따라 온 정석을 보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지었다.

"회장님! 여긴 어쩐 일로...."

윤희의 모습은 평소와 달랐다. 원래 쓰고 있던 안경은 어디 갔는지 보이지 않았고 이마와 볼에는 시퍼런 멍과 자잘한 상처가 선명했다. 허벅지에 붕대를 감고 있었는데 피가 이미 잔뜩 배어 나와 다른 붕대가 필요한 게 분명했다. 정석은 그녀의 모습을 안쓰럽게 쳐다보면서도 일부러 담담하게 말했다.

"내가 언제 한번 동생들 보러 온다고 했잖아. 집에 갔더니 막내 동생이 인사하더군."

정석의 말을 들은 윤희는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

"회장님이 아니라 제가 그랬죠. 보여드리겠다고. 잘못 기억하고 계시네요."

"모로 가든 서울로만 가면 되는 거 아닌가? 아니, 모로 가든 광주로만 오면 되는 거지."

정석의 빈약한 유머에 윤희는 살짝 미소 지었다. 윤희는 자신의 곁에 다가온 동생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대체 어떻게 들어오셨는지는 모르겠지만... 들어온 길이 있으시다면 나갈 길도 있겠죠. 부탁이 있어요. 회장님."

"말해봐."

정석은 어쩐지 그녀의 부탁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다. 윤희는 정석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여기서 제 동생을 데리고 나가주세요. 가능한 한 빨리, 서울로요."

예상대로였다. 언니의 말에 화들짝 놀란 하영이 제 언니를 돌아보며 소리 질렀다.

"언니!"

그러나 윤희는 하영의 손을 잡고 차분하게 말했다.

"하영아, 잘 들어. 일단은 회장님 따라서 먼저 서울에 가 있어. 너 평소에도 서울에 가고 싶어 했잖여."

"그래도...."

"언니는 석희 데리고 꼭 올라갈게. 그 녀석은 사투리가 억세서, 혼자 놔두면 서울 사람이랑 대화도 안 통할 놈인께."

"언니이..."

하영은 언니의 허리춤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윤희는 고개를 들어 정석을 보며 말했다.

"듣자하니 광주 외곽은 더 흉흉하다고 들었어요. 나가려는 버스에 대고 기총을 난사했다는 소문도 있더군요. 그러니 분명 회장님이 나가시는 길에도 인원을 점검할 거예요."

정석은 고개를 끄덕였다.

"안 그래도 들어올 때 그런 소릴 하더군. 남지도 말고, 누굴 데리고 나오지도 말라고."

"그러니 저는 더욱 안 돼요. 여기서 해야 할 일도 있고요. 제 동생만이라도, 얘는 이렇게 작으니까요. 어떻게든 숨겨서 데리고 가주세요."

"여기서 할 일이라니. 여긴 자네 같은 여자보다 힘 잘 쓰는 남자가 더 필요한 것 같은데?"

윤희는 평소 버릇처럼 안경을 추켜올리려고 했지만, 자신의 얼굴에 안경이 없다는 걸 깨닫고 쓴웃음을 지었다.

"우리 회장님은 남녀차별 같은 거 없이 오로지 능력만 보고 사람 뽑아 쓰신다고 정평이 나 있는데, 오늘은 그렇지 않으시네요. 전 여자가 아니라 변호사예요. 여기 같은 무법천지에서 꼭 필요한 사람이죠. 법을 어기고 시민을 짓밟고 있는 사람들에게 법의 엄정함을 전해줄 사람 말입니다."

단호한 윤희의 말에, 정석은 반박할 말을 찾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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