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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정석은 대답 대신 언니와 떨어지지 않으려고 훌쩍이는 하영을 달래어 품에 안았다. 그 모습을 본 하영은 고개를 숙였다.
"제가 다리가 이래서 배웅은 못 하겠습니다. 부디... 제 동생을 잘 부탁합니다."
"알았어. 그렇지만 난 애 보기에 영 꽝인 사람이야. 빨리 서울 와서 다시 데려가게."
"애가 둘이나 있으시잖아요."
"내가 키웠나. 지들이 컸지."
"후후. 그럴게요."
정석은 언니를 부르며 훌쩍거리는 하영을 번쩍 들어서 품에 안았다. 나중에 다시 언니를 만나러 오자며 애를 달랬다. 거짓말 아니냐고 묻는 하영에게 정석은 절대로 아니라고 몇 번이나 대답했다. 본인도 스스로 믿을 수 없을 지경이었지만, 그래도 하영은 믿는 모양이었다. 울음소리가 잦아들었다. 그대로 병원을 벗어나자 입구에 대기하고 있던 최 씨와 차가 보였다. 최 씨는 정석이 안고 나오는 하영을 보곤 뜨악한 표정을 지었다. 정석은 그의 표정을 일부러 모른 체하고 말했다.
"최 기사. 출발합시다."
"네."
한시라도 빨리 이곳을 뜨고 싶었던 최 씨는 운전석에 얼른 올라탔다. 정석은 주변을 돌아보았다. 군데군데에 불타고 있는 지프차가 보였고 머리에 손을 얹은 채 오리걸음으로 걷는 학생들이 보이기도 했다. 일행을 모두 태운 차가 출발했다. 금남로를 벗어나 외곽도로 쪽으로 가던 중 정석은 최 씨에게 차를 세우도록 했다. 이제 곧 들어올 때 마주한 검문소가 나올 터였다.
"아까 그 군인이 인원 확인한다고 했었죠?"
"네. 그랬죠. 그런데 저 아이는...."
정석은 최 씨에게 몇 마디 지시했다. 처음에는 고개를 갸웃하던 최 씨도 이내 의미를 알아듣고 얼른 트렁크를 열고 준비하기 시작했다. 정석은 옆자리에 앉은 하영에게 말했다.
"아까 네가 그랬지? 지금 시내에서 군인들이 사람들 잡아간다고?"
"네."
"근데 여기서 나갈 때도 아마 그럴지도 모르거든? 그러니 아저씨 말대로 잠깐만 있어볼래?"
눈치 빠른 하영은 순순히 정석의 지시를 따랐다. 트렁크의 짐을 모두 꺼내놓고 트렁크 바닥의 스페어타이어까지 꺼내버리자 아주 작은 공간이 만들어졌다. 어른이면 어림없지만, 아이라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었다. 정석은 하영을 돌아보며 물었다.
"정말 괜찮겠니?"
그러자 하영은 손을 들어 거길 가리키며 물었다.
"제가 여기에 얌전히 있어야 나쁜 군인들한테 안 들킨다는 거죠?"
정석은 나쁜 군인들이란 말에 가슴이 저몄지만, 애써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야 해."
"그럼 들어갈게요. 걱정 마세요."
정석은 하영을 들어 거기에 눕히고 몸을 반쯤 접고 있게 한 다음, 매트를 덮었다. 트렁크에 있던 짐 중에서 무겁지 않을 걸로 골라 매트 위를 살짝 덮어두었다. 하영을 불러본다.
"숨쉬기 어떠니?"
"괜찮아요."
실낱같은 목소리였지만, 여전히 카랑카랑한 목소리였다. 정석은 고개를 끄덕이고 최 씨와 함께 차에 올랐다. 최 씨는 주저하며 뭔가 할 말이 있는 눈치였지만 정석의 표정을 보더니 입을 다물었다. 정석은 최 씨의 기색을 눈치채고 점잖게 말했다.
"무슨 일이 있어도 내가 책임집니다. 최 기사한테 절대 해 될 거 없으니 나만 믿어요."
"알겠습니다."
대답은 그리해도 최 씨의 표정은 영 풀리지 않았다. 들어올 때 지났던 검문소에 이르자 예상대로 차를 정지시켰다. 정석은 최 씨의 표정이 아주 좋지 않다는 걸 확인하고 자신이 먼저 차에서 내렸다. 군인 한 명이 다가와 물었다.
"오늘 공사시 사오분에 여길 지나셨군요. 인원은 둘. 보안사에서 발급한 통행증명서를 제출하셨고, 목적은 금남로에 있는 지인 방문. 맞습니까?"
"그렇소."
아까 통과시켜준 군인이 아니었다. 그는 손에 든 용지를 들여다보며 차와 정석을 확인하는 듯했다. 그리고 앞좌석과 뒷좌석 문을 열어 차 안을 확인했다. 별다른 점을 찾지 못한 그는 최 씨에게 출발해도 좋다는 허락을 내리곤 바리케이드에 놓인 바를 치우기 시작했다. 그러고 있자니 다른 군인 한 명이 더 다가온다. 그는 밥풀 두 개를 달고 있었다. 중위는 정석을 위아래로 훑어보더니 바를 치우고 있는 군인을 불렀다.
"야! 김 병장. 이 사람 누군데 고개 빳빳이 들고 이러고 있어? 몸수색도 했어?"
김 병장은 중위 앞으로 와서 경례를 붙였다.
"병장! 김재철! 몸수색은 아직...."
그러자 중위는 다짜고짜 병장의 쪼인트를 깠다. 병장은 자세를 흐트러뜨렸지만 이내 차려자세로 복귀했다. 중위가 병장의 얼굴에 대고 버럭버럭 소리 질렀다.
"야이, 개새끼야! 저 안에 지금 빨갱이들이 존나 득실거린다고 했어, 안 했어? 저기서 나오는 새끼는 다 빨갱이야! 너 이 새끼 영창 함 가볼텨?"
"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이고 나발이고 당장 이놈이랑 운전사 구속하고 차량 압수해! 헌병에 넘기고 바리케이드 다시 쳐! 이 새끼가 존나 빠져가지고..."
정석은 입안이 바싹 말랐다. 트렁크 쪽을 쳐다보지 않으려고 하는데도 자꾸 시선이 간다. 아무리 살짝 덮었다고는 하나 트렁크 자체가 밀폐된 공간이다. 거기에 아이를 너무 오래 두고 있다. 게다가 차량이 압수라도 된다면 그 아이는 당분간 갇혀 있는 게 문제가 아니라 영원히 거기서 나오지 못하게 될 것이다. 정석은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 소리쳤다.
"이봐, 중위 양반."
"뭐? 양반...?"
중위의 눈길이 가늘어졌다. 병장을 향해 쏟아지던 그의 폭언이 잠시 멈췄지만, 이제는 새로운 타겟을 설정할 판이다. 그러나 정석은 쫄지 않고 말했다.
"그래. 양반이라고 했지. 아니면 상놈이라고 해줄 걸 잘못했나? 양반이 불만이야?"
"뭐? 이 새끼가..."
"새끼? 중위 나부랭이가 지금 나한테 새끼라고 했어?"
"나부....랭이?"
아무래도 중위는 열 받으면 얼굴이 하얗게 되는 타입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변했다. 그는 병장의 쪼인트 대신 다른 걸 까기 위해 정석을 향해 걸어왔다. 운전석에 앉은 최 씨는 안절부절못했다. 정석을 향한 그의 얼굴은 기가 질린 표정이었다. 지금 세상이 어떤 세상인데 군인에게 막말이라니. 게다가 그들은 지금 실탄이 든 게 분명한 총까지 들고 있었다. 그러나 정석은 전혀 쫄지 않았다. 아니, 쫄지 않은 척하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나부랭이라고 했다. 씨발. 내가 중정에 김 대령 얼굴을 봐서라도 그냥 조용히 지나가려고 하는데 니가 너무 나대잖아! 응?"
"주...중정?"
정석의 멱살을 잡으려던 중위는 멈칫했다. 상대의 입에서 나온 뜻밖의 단어에 놀란 것이다. '중정'이라는 단어는, 중앙대학교 정문이나 중늙은이 정신머리의 줄임말 따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요즘 가장 무서운 단어라고도 할 수 있다. 상대의 멈칫거림을 눈치챈 정석은 기세를 몰아갔다.
"내가 평소에 빽 운운하는 놈들 딱 질색이라 어지간해서는 언급 안 하는데, 이건 해도 너무하잖아! 아까 통행증도 보여줬잖아!"
"통...통행증이라뇨?"
중위는 이미 정석에게 존대를 하고 있었다. 얼이 빠진 표정의 중위가 병장에게 묻자 김 병장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아까 보안사 통행증을 제출하고 안에 들어갔다고...."
"야이 새꺄! 그런 걸 왜 진작 말 안 하고 자빠졌어!"
중위는 다시 한 번 병장을 쪼인트를 갈겼다. 이번에는 좀 과했던 듯. 병장은 정강이를 끌어안고 신음했다. 중위는 정석을 향해 몸을 돌리고 정자세로 경례를 올려붙였다.
"실례가 많았습니다. 검문에 협조를 해주셔서 감사..."
그러나 이대로 넘어갈 정석이 아니었다. 그는 일부러 사악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자네 관등성명이나 들어보지. 왜 명찰을 안 차고 있나?"
병장도 그렇고 중위는 명찰을 차고 있지 않았다. 명찰이 있는 자리에는 검은 천으로 가려 있었다.
"제7공수여단 소속, 이문수 중위입니다! "
"그래. 이문수 중위라고? 내가 특별히 김 대령 만나거든 꼭 이야기해주지. 업무에 몹시 충실한 중위가 한 명 있더라고."
"시...시정하겠습니다!"
"시정은 무슨. 임무에 충실한 게 죄인가?"
정석은 차에 올라타 최 씨에게 눈짓을 보냈다.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던 최 씨는 얼른 시동을 걸었다. 정석은 아직도 바짝 얼어있는 이 중위에게 수고하라는 말을 남기고 차를 출발시켰다. 언덕을 지나 검문소가 보이지 않는 위치가 되어서야 차를 세우게 했다. 차에서 내린 두 남자가 트렁크를 열고 바닥을 들추자 거기에는 온몸에서 팥죽 같은 땀을 흘리고 있는 하영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런..."
정석은 재킷을 벗어 하영의 몸을 감싸 들어 올렸다. 거칠기는 하지만 숨은 쉬고 있었다. 산소도 부족한 곳에서 너무 오래 있느라 쇼크가 온 모양이었다. 하영을 뒷좌석에 태우고 최 씨에게는 가장 가까운 병원으로 가도록 했다. 달리는 차 안에서 정석은 생각했다. 정석의 곁에는 지금 광주에서 나온 한 명의 아이가 쌕쌕거리고 잠들어 있었다. 어젯밤, 전화를 받은 미자는 말했다. 정석이 가더라도 단 한 명만을 구할 뿐이라고.
'한 명... 단 한 명이란 말인가. 그렇다면 나머지는....'
정석은 윤희의 얼굴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러나 아무래도 방금 보고 나온 그녀의 얼굴이 생각나지 않았다. 평소 같이 일하던 사람인데도 그렇다.
결국 정석이 그녀의 얼굴을 다시 보게 된 것은, 한 달 후 열린 합동장례식장에 놓인 영정에서였다. 그 얼굴에는 정석이 보았던 멍 자국도, 핏자국도 없었다. 그저 환하게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그걸 보는 사람들은 모두 울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렇게 사진 속에서 계속 웃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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