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82화 (182/471)

0182 / 0471 ----------------------------------------------

[외전] 장미정원

광주에서의 경험은 정석의 마음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켰다. 자신이 돈을 버는 건 대체 무엇을 위한 것일까 하는 회의도 들었다. 미래를 볼 수 있으면서도 그저 보고만 있을 뿐이라는 미자의 말을 어느 정도 이해하게 되었다. 뻔히 보고 있으면서도 구해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오랫동안 그를 괴롭혔다. 괴로움을 잊기 위해서라도 그는 한층 더 일에 매달렸다.

시간이 흘렀다. 유월이 되자 정석의 집은 장미 향기로 가득 찼다. 지난봄에 미자는 담장 밑에 장미묘목을 가득 심어두었고, 그 결과 담장을 따라 장미 덩쿨이 가득 올라가 담장 원래의 블록은 보이지 않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장미가 흐드러지게 가득 피어있는 정원에서 두 아이가 뛰어놀고 있었다. 정원 한쪽에 놓인 테이블에는 정석과 미자가 마주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사실 찻잔을 들고 마시는 건 미자 뿐이었고 정석은 앞에 놓인 서류뭉치를 살피느라 정신이 없었다.

"아얏!"

"저런..."

자기 오빠를 따라 정원을 달리며 놀던 효진이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미자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효진에게 달려가 일으켜주었다. 울먹이는 효진을 달래고 태근을 시켜 손수건을 적셔 오도록 한다. 그녀가 그렇게 아이를 돌보고 다시 자리로 돌아올 때까지, 정석은 서류에서 눈을 떼지 않고 있었다. 자리에 앉은 미자는 손가락으로 테이블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

"아저씨."

"....."

"이봐요. 아저씨!"

"응?"

거듭 불러 겨우 정석의 주의를 이끌어낸 미자는 한숨을 쉬며 말했다.

"기왕 모처럼 아이들이랑 보내는 시간인데 관심 좀 줘요. 평상시에는 집에도 안 들어오느라 그렇다고는 하지만 오늘 같은 날은 휴일이잖아."

"아아. 이게 오늘 안에 검토가 되어야 하는 사안이라."

"흐음..."

정석의 변명을 들으며 미자는 가볍게 툴툴거렸다. 정석은 멋쩍게 웃으며 이미 식어버린 찻잔을 들이켰다. 미자는 정석에게서 시선을 떼고 정원에 있는 아이들을 돌아보았다. 태근이가 효진이를 데리고 전에 텔레비전에서 본 프로레슬링 흉내를 내며 놀고 있었다. 미자는 태근이에게 살살 하라고 이르곤 정석에게 물었다.

"그 하영이라는 애는 잘 지내고 있나요?"

"응... 그렇다고 하더군. 춘희가 가끔 내려가서 돌봐주는 모양이야."

광주에서 나온 하영은, 다시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정석은 그녀의 친인척을 수배해 보았지만 마땅한 곳이 없었다. 결국 하영은 자신이 다니던 교회에서 지내기로 했다. 정석은 하영의 생활에 어려움이 없도록 물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정석의 비서인 춘희가 수시로 내려가 돌보며 하영의 생활에 대해 정석에게 보고하곤 했다. 미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대학교는 서울에서 다닐 테니, 그때는 여기서 지내게 하세요. 똑똑하고 인정이 많은 아이이니 태근이나 효진이와 좋은 친구가 될 거예요."

"걔가 똑똑한지 어떻게 알...겠군. 자네라면."

미자는 하영을 한 번도 만난 적이 없다. 정석이 광주에서 하영을 데리고 나왔지만 곧 탈진증상을 보이며 쓰러졌기에 서울까지 데리고 올 수 없었다. 근처 병원에 입원을 시켰다. 그래서 미자는 정석에게서 하영이의 이야기를 지나가는 길에 들었을 뿐이다. 그러나 그녀는 지금 그 아이의 미래에 대해 서슴없이 말하고 있다. 미자의 빙글거리는 표정을 보고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그러다가 정석은 문득 미자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생각났다.

"뭐 한가지 물어봐도 돼?"

"아뇨. 안 돼요."

딱 잘라 거절하는 미자의 태도는 정석으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내가 무슨 질문을 할지 알고..."

"네."

이번에도 자신의 말이 잘렸지만 정석은 개의치 않았다.

"그렇다면 내가 여기서 질문을 하게 되면 어떤 질문을 할지..."

"법대요. 그리고 졸업도 하기 전에 고시를 패스할 거예요. 검사로 임용은 되지만, 본인이 사양하고 변호사의 길을 택하죠. 그리고 그동안 학비를 대준 박 회장님에게 보답하는 마음으로 아저씨 밑에서 일하게 돼요. 태근이의 좋은 짝이 될 수도 있고, 아니기도 해요. 효진이와는 제법 친하게 지내지만 워낙 속을 드러내지 않는 아이라서 효진이랑 같이 놀거나 하진 않아요."

정석의 질문은 아직 나오지도 않았지만 벌써 답을 구했다. 정석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곰곰이 생각하다 말했다.

"만약 내가 그 이야기를 듣고도 그 아이의 학비를 대주지 않는다면? 자네가 어머님의 사고에서 그러했듯 나한테도 안 좋은 일이 생기는 건가?"

"에이, 설마요. 아저씨는 제가 아니잖아요. 그럼 그냥 내가 아저씨에게 거짓말을 한 게 된 거죠. 일기예보에서 비가 온다고 말했다고 해서 무조건 다 비가 오는 건 아니잖아요."

"하지만 자네는 그것을 보았다는 거잖아. 내가 그 아이에게 학비를 주는 모습을...."

"아저씨는 살면서 이랬으면 좋겠다 싶은 장면을 떠올리거나 상상한 적 없나요? 제게 보이는 광경도 그런 막연한 거예요. 딱히 설명하기 어려운 모습이라...."

"그런가..."

정석은 들고 있던 펜으로 종이에 뭔가 끄적였다. 그리고 다시 물었다.

"그날 밤, 내가 자네에게 전화를 한 것도, 그리고 내가 광주에 가리란 것도 자네는 알고 있었나? 광주사태에 대해서.... 알고 있었나?"

미자는 대답하지 않았다. 정석은 그것이 긍정을 뜻하는 것임을 알았다. 미자는 아니라면 아니라고 말할 사람이니까.

"그랬다면... 진작에 윤희에게 광주에 가지 말라고도 할 수 있었고... 동생들을 서울에 미리 데려올 수도 있었잖는가. 그렇다면 그녀와 남동생은 죽지 않고...."

"아저씨."

미자가 정석의 말을 끊었다.

"저랑 같이 지낸 지... 벌써 1년이 넘어가죠? 그런데도 아직 절 이해하지 못하고 계시네요. 그렇죠?"

".......솔직히 말하자면, 그래."

"이렇게 생각하세요. 경마장에서 마권을 그렇게 산 건, 제가 그걸 보았기 때문이 아니에요. 원래 아저씨는 대박을 맞을 사람이었고 그저 제가 옆에서 이상한 마권을 샀을 뿐이에요. 마찬가지로 아저씨가 가지 않았더라도 그 아이는 나올 수 있었어요. 그저 아저씨가 변덕을 부려 광주에 간 것뿐이죠."

"이봐, 그게 말이 돼? 원인이 있어야 결과가 있는 거지, 자네의 말은 마치 결과를 위해 원인이 있었다는 듯이...."

"왜 말이 안 돼요? 사람은 어차피 죽어요. 그러기 위해서 태어난 거잖아요? 지금 원인이 있어야 나중에 결과가 있는 게 아니에요. 오늘의 결과를 위해서 어제의 원인이 있었던 거죠."

정석은 여태껏 단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강렬한 눈빛이 자신을 꿰뚫어 보고 있음을 깨닫고 입을 다물었다. 미자의 말은 일반적으로 보자면 철저히 궤변이었지만, 정석은 그런 그녀에게 반박을 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에게는 적용되지 않을지라도, 그녀에게 있어서 그 논리는 옳다. 정석을 쏘아보던 미자는 이내 시선을 거두었다. 그녀는 배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미안해요. 제가 요새 신경을 좀 날카로워져서.... 이 아이도... 나중에 하영이의 도움을 많이 받게 될 테니까요. 그러니 아저씨가 그 애를 좀 많이 도와주세요."

정석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미자의 손이 배를 감싸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곧바로 알아차렸다. 비록 직접 낳은 것은 아니라고 해도 이미 두 아이의 아버지인 그였다. 그는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얼마나 되었어?"

"이제 8주가량..."

정석은 손을 내밀어 미자의 손을 붙들고 껄껄 웃기 시작했고, 미자는 미소를 지었다.

"셋째인가?"

"그런 셈이죠."

정석은 크게 기뻐했다.

"전에도 말했지만, 이젠 집안일은 하지 말게. 일할 사람을 들일 테니 말이야. 그냥 좋은 거 많이 먹고 푹 쉬라고."

"너무 안 움직이면 살쪄요."

"살찌면 좀 어때. 자네는 여전히 예쁘다고."

정석은 매우 기뻐했다. 형제 없이 자란 터라, 그는 태근이와 효진이에게 가능한 많은 동생을 만들어 주고 싶었다.

"아들일까, 딸일까. 아아, 미자는 이미 알겠구나? 말해봐. 응? 아들이야?"

"아들이면 좋겠어요?"

"아들이면 좋기도 하겠지만, 딸도 좋고. 다 좋지 뭐. 하나 낳고 나면 또 낳고 그래. 응?"

정석은 웃느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미자는 그런 그를 안타까운 눈으로 보고 있었다. 다음 날, 정석은 사람을 불러 집을 더 크게 증축하도록 했다. 아기방을 만들고, 미자 대신 일할 사람도 몇 명 뽑았다. 미자에게는 손에 물 한 방울 못 묻히게 했다. 태근이와 효진이는 자신들에게 동생이 생긴다는 이야기를 듣고 진심으로 기뻐했다. 여름이 지나고, 가을이 되면서 미자의 배는 점점 불러왔다.

──────────────────────────

*

이번 프리퀄의 인물 라인업입니다.

나이는... 좀 틀릴 수도 있겠네요. 중간에 해가 한 번 바뀌었으니.

등장인물──────────────────────────

박정석 (33, 남) 정석조달 대표

우춘희 (21, 여) 정석조달 경리

진미자 (19, 여) 정석 옆집 여자

남인애 (45, 여) 승화물류 대표

손윤희 (24, 여) 변호사. 하영의 언니.

박태근 (10. 남) 정석의 아들. Y국민학교 3학년.

박효진 (6, 여) 정석의 딸

안 등장인물──────────────────────────

성은주 (9년 전 23세로 졸) 정석의 첫째 부인

김양숙 (당년도 25세로 졸) 정석의 두째 부인

최한석 (4, 남) 전라도 화순 거주

김리사, 김마리 (1, 여) 부산 사하구 거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