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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11월이 되면서 날씨가 한층 추워졌다. 정석에게 어떤 첩보가 입수되었다. 일본에서 온 것이었다. 원래 일본에서의 일은 윤희가 일임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부재 이후 적당한 후임을 아직 구하지 못한 터였다. 그래서 정석은 직접 가서 확인하기로 했다.
예정일이 불과 두 달밖에 남지 않은 미자의 배는 이미 만삭이었다. 요새 정석의 유일한 즐거움이 있다면 미자의 배에 손과 귀를 대고 아이의 태동을 느끼는 것이었다. 예정일이 가까워질수록 배 속의 아이는 힘찬 움직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정석 역시 출산예정일이 얼마 남지 않은 아내를 두고 일본으로 가야 하는 게 다소 껄끄러웠다. 그걸 눈치챈 미자는 정석을 만류했다.
"그러면 안 가면 되잖아요."
"그러고 싶기도 하지만... 오랫동안 별러 왔던 일이야. 이번에 종지부를 찍겠어."
"꼭 가셔야 직성이 풀리겠어요?"
"그래야 내가 밤에 두 발을 뻗고 잘 수 있거든."
고집을 부리는 정석을 보며 미자는 쓸쓸한 표정으로 정석의 여행 가방을 챙겼다. 정석은 그런 미자의 표정을 보며 산달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자신이 오랜 기간 집을 비워서 서운해하는 거라 생각했다.
"걱정 마. 이제 완전히 외통에 몰아넣은 터라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거야. 장군이가 태어나기 전까지는 꼭 돌아오니 걱정 마."
"난 그 이름 싫은데... 딸이라니까...."
"어때? 씩씩한 이름이잖아."
"......에휴. 맘대로 생각하세요."
정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미자가 딸이라고 하면 딸일 것이다. 그녀의 능력을 알고 있는 정석은 괜한 고집을 피웠다. 그는 효진이를 예뻐했지만 그래도 아들이 하나 더 있었으면 했다. 내년이면 4학년에 올라가는 태근이는 어쩐지 공부보다는 몸을 쓰는 일에 더 소질이 있어 보이기에, 자신의 사업을 물려주기 위한 대상으로 아들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앞으로 몇 명 더 낳으면 되겠지만, 일단 정석의 바람은 아들이었다.
"만약 아저씨가 일본에 안 가면, 아들이라고 나도 말해줄게요."
"내가 일본에 가는 게 그렇게 싫어?"
"네."
"내가 가면 죽어?"
정석이 웃으며 말하자 미자는 고개를 저었다.
".......그런건 아니에요."
정석은 묘한 기분이었다. 미래를 볼 줄 아는 미자와 지내면서, 그는 종종 그런 기분을 느꼈다. 미자는 미래를 보지만, 그걸 바꾸려고 하지는 않는다. 이미 자신의 어머니를 구하기 위한 선택을 했다가 되려 부모님 두 분 다 잃었던 경험을 가진 그녀였다. 미자의 말에 의하면,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그에 반하는 선택을 하게 되면 일종의 반작용 같은 일이 벌어지는 모양이었다. 그렇기에 미자의 삶은 일종의 연기나 마찬가지다. 정해져 있는 길이 있고, 그에 순종하며 따르는, 미래의 노예와도 같은 삶이다.
그것이 미자의 능력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어 본 정석이 나름대로 내린 결론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미자가 내놓은 어떤 조언에 있어서 귀를 기울이기는 하지만, 그것 자체에 의미를 두지 않기 위해 부단한 노력을 해야만 했다. 말이 쉽지, 그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미래를 아는 사람의 말 한마디, 한마디는 강한 파괴력을 가진다. 미자가 미래를 볼 줄 안다는 것을 정석이 모른다면 모를까. 이미 알고 있는 마당에는 그에 대한 생각을 떨치기 쉽지 않다.
미자가 말한 일은 이미 벌어지게끔 안배되어 있다. 정석은 그것이 원래대로 이뤄지기 위해 자신에게 그런 조언을 했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러면 애초에 자신이 그 일을 하겠다고 생각을 떠올린 것, 그것까지도 예비되어 있던 게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예정대로 일을 진행하면서도... 정석의 마음은 의혹투성이가 된다. 혹은 미자가 어떤 일에 대해 반대를 한다. 정석은 반대에 대해 생각하면서 되려 그 일에 대해 자꾸 생각하게 된다. 반대에 반대로 행동하면 어떻게 될까. 반대를 따르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도 결론은 쉬이 나오지 않고, 사후 영향을 정석이 알아볼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런 의심과 의심이 반복되다 보니 어느 순간, 정석은 미자의 말은 흘려듣게 되었다. 그녀는 그저 아무 생각 없이 말할 뿐이고, 그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들으려고 노력했다. 쉽지는 않았지만, 정석은 노력했다. 이번 일본행에 대한 미자의 의견도 그렇게 받아들였다.
준비를 모두 마친 정석은 여행 가방을 들고 집을 나섰다. 두 아이와 미자가 배웅을 나왔다. 정석은 태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누나 말 잘 듣고, 효진이 잘 보고.... 아빠가 없는 동안은 네가 이 집 가장이다. 알았지?"
"네!"
"좀 있으면 네 동생 나올 테니까... 누나 너무 힘들게 하지 말고."
"알고 있어요."
태근은 씩씩하게 대답했다. 요즘 들어 키가 부쩍 커진 태근이었다. 정석은 키가 그리 큰 편이 아니었지만 태근은 하루가 다르게 부쩍부쩍 자라고 있었다. 정석은 조만간 태근의 키가 자신을 훌쩍 뛰어넘을 것 같았다.
"역시 요새 애들은 잘 먹어서 그런지 키가 크네. 날 닮아 키가 작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키는 몰라도 얼굴은 아저씨 얼굴을 닮았어야 하는데."
미자가 살짝 한숨을 쉬자 그녀의 허벅지에 찰싹 달라붙어 있던 효진이는 미자의 얼굴을 올려다보며 말했다.
"오빠가 못생긴 거예요?"
"응. 아마도? 아빠만큼 잘 생기진 않았잖아."
태근은 씩씩거리며 펄펄 뛰었지만 효진이는 까르르 웃으면서 좋아했다. 정석은 그럼 다녀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집 앞에 세워져 있던 자신의 차에 올라탔다. 차가 떠난 후, 미자는 방으로 돌아왔다. 열려있는 옷장을 보며 그녀는 낮은 한숨을 쉬었다. 벽장에서 커다란 가방 하나를 꺼낸 그녀는, 옷장에서 자신의 옷을 꺼내어 가방에 차곡차곡 담기 시작했다. 효진이가 방에 들어오더니 미자에게 물었다.
"언니, 어디 가요?"
"응. 바로는 아니지만 좀 있다가 갈 거야."
"나도 같이 가?"
"아니. 효진이는 같이 안 가."
그러자 효진이가 펑펑 울기 시작했다. 미자는 아차 싶은 표정으로 효진이를 달랬다.
"멀리 가는 건 아니고... 근처에 갈 거야. 나중에 효진이도 같이 갈 테니까, 뚝 그쳐. 응? 착하지?"
"나도 갈 거야!"
"그래, 그래. 너도 같이 가자. 응? 알았지?"
한번 울음이 터진 효진을 달래는 일은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효진이가 우는 소리에 놀라 달려온 태근을 향해, 미자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정을 모르는 태근이는 그저 눈을 동그랗게 뜰 뿐이었다.
*
도쿄 신주쿠 역 북동쪽, 환락가로 유명한 가부키초의 뒷골목을 한 사람이 총총거리는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커다란 모자가 달린 외투를 뒤집어쓴 그는 주변에서 들려오는 삐끼들의 외침을 가볍게 무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걷고 있었다. 골목의 끝에 이르자 안쪽으로 들어가는 더 작은 골목의 입구가 나타난다. 그 골목의 안쪽 끝에는 커다란 유리문이 있었다. 고급 맨션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망설이지 않고 지나친 그는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잠시 후,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고 그는 안으로 들어섰다. 엘리베이터 안은 따뜻했다. 그는 7층 버튼을 누르고 후드를 벗었다. 그는 - 아니, 그녀는 - 인애였다. 그녀가 서 있는 엘리베이터 공간과는 달리 바깥쪽 복도는 캄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천장에 달린 센서등이 사람이 지나감에 따라 켜져야 하는데 오늘은 어찌 된 영문인지 켜지지 않는다. 인애는 관리인에게 말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시작했다. 그러나 양 문의 간격이 20센티미터도 채 되지 않은 순간, 누군가가 발을 뻗어 문틈에 끼웠다. 덜컥- 하는 소리와 함께 문이 다시 열리기 시작했다. 문 바로 앞에는 회색빛 버버리코트를 입은 한 사내가 서 있었다. 그는 엘리베이터 안에 있는 인애를 보았다. 그녀도 그를 보았다. 인애의 눈이 커졌고, 남자의 입이 열린다.
"결국 만났군. 인애."
"정...석?"
뜨악해하는 인애를 앞에 두고 정석은 서서히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 인애는 안색이 새파래졌다.
"여...여긴, 어떻게...."
"어떻게라니. 그렇게 말하면 섭섭한데. 말 그대로 산 넘고 물 건너. 아주 열심히 왔지. 오로지 널 보겠다는 일념으로 말이야."
인애는 뒷걸음질쳤지만 그래 보았자 엘리베이터 안이었다. 정석이 다가올수록 인애의 안색은 급변했다. 처음에는 파래졌다가 나중에는 하얘졌다가, 말 그대로 악마라도 본 듯한 표정이었다. 그녀는 더 이상 물러날 곳이 없자 발악하듯 소리쳤다.
"미안해... 미안하다고....그렇지만... 그건 꼭 나만을 위해 그런 건 아니었어! 당신을... 그래. 정석, 당신을 위해서 한 일이라고!"
정석은 고개를 갸웃했다. 남의 회사 돈줄을 죄고 계약을 취소시키려 했던 행위가 어째서 인애가 아닌 정석을 위한 행동이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게다가 미자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그를 "죽이려" 했었다. 정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헛소리하지 마."
"헛소리가 아냐! 내가 다 알아봤어! 근데도...."
"알아보기는 나도 충분히 알아봤지."
"아냐, 넌 몰라! 양숙이 고년은 한사코 아니라고 했지만, 난 다 알고 있었어! 그년이 딴 놈이랑 붙어먹고 있다는 걸 말야! 그래서 내가 벌을 준 거야!"
정석의 걸음이 멈췄다. 난데없는 이야기에 그의 사고가 일시 정지되고 말았다. 갑자기 효진의 모친인 김양숙의 이름이 여기서 왜 나오는지 정석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집 앞 도로에서 뺑소니 차에 치여 세상을 떠났다. 그러나 범인은 찾을 수 없었고, 정석도 경찰도 어느 순간 포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난 그저 겁만 주려고 했어! 그런데... 그런데... 그 년이 그렇게 죽어버리다니..."
"...그게... 네가...."
"결코 죽이려던 건 아냐!"
정석은 인애에게 자신의 회사에 대해 왜 그런 보복을 가했는지, 아무리 자신이 인애에게 돌아가지 않는다고 해도 왜 그렇게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 짓을 했는지 물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인애는 전혀 엉뚱한 걸로 정석이 자신을 쫓아온 것이라 오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녀는 양숙에 대해 더 엄청난 사실을 스스로 폭로했다.
"그년들이 그러고 다니는 걸 모르고 애만 챙기는 니가 불쌍했다고! 난 널 풀어주고 싶었어!"
"그...그게 무슨 소리야."
정석은 인애의 멱살을 움켜잡았다. 뒤에서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났다. 엘리베이터는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너, 이 씨발년이 대체 무슨 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야!"
"뭐? 몰랐....어? 그럼... 그걸 알고 온 거 아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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