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85 / 0471 ----------------------------------------------
[외전] 장미정원
5분도 지나지 않아, 한 무리의 남자들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검은 정장을 입은 그들은 거실의 참극을 보고도 그다지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개중에 키가 작은 한 남자가 정석에게 다가와 말했다.
"요금이 추가되겠군요. 박 상."
어딘가 다소 어눌한 한국말. 정석은 곧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남자는 손에 끼고 있던 장갑을 벗더니 정석의 뺨을 두 번 쳤다. 아주 세게는 아니지만, 넋이 나가 있던 정석의 주의를 돌이키는 정도로는 충분했다.
"그걸 이리 주시죠."
정석은 고개를 끄덕이며 손에 들린 권총을 남자에게 돌려주었다. 그는 권총의 안전장치를 걸고 품 안에 넣었다. 그가 일본말로 무어라 지시하자 남자들은 준비해 온 자루에 인애의 시체를 넣고 주변을 청소하기 시작했다. 정석이 밖으로 나오자 키 작은 남자는 따라 나왔다. 복도의 창문 하나를 연 정석은 거기에 얼굴을 들이밀고 한참을 왝왝거렸다. 실제로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지만 그는 그렇게 한참을 있었다. 간신히 머리가 차분해진 정석은 남자에게 물었다.
"총소리가 났는데... 괜찮겠습니까? 쿠보 씨."
쿠보라고 불린 남자는 고개를 끄덕이며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하나 더 꺼내어 정석에게도 권한다. 정석은 받아들였다. 정석이 담배를 빨아들이는 것을 보며 쿠보는 말했다.
"애초에 총을 빌려 드린 것은 접니다. 그에 대한 대비는 충분히 해두었습니다."
"그렇군요. 그래서 아까 그 모습을 보고도 태연하시군요."
"그야 뭐, 일상이니까."
씨익 웃어 보이기까지 하는 쿠보의 얼굴을 보며, 정석은 피와 주먹의 세계에 사는 남자의 얼굴은 이렇구나라는 걸 기억하기로 했다. 그는 재일교포였고, 한국 정부와도 선이 닿아있는 인물이었다. 한국 정부가 일본 내에서 뭔가 조용히 처리하고 싶은 일이 있을 때 종종 동원되는 인물이라고 했다. 정석 역시 소개를 받아 그에게 몇 가지 부탁해놓은 터였다.
정석은 아직도 방금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질렀는지 실감이 나질 않았다. 손이 계속 떨렸고, 몸에서는 끝없이 오한이 일었다. 복도 너머 야경을 보며 담배를 다 피울 때쯤 집 안에서 누군가 나와 쿠보에게 뭔가를 건넸다. 몇 개의 편지봉투였다. 쿠보는 겉면을 한 번 훑어보더니 정석에게 넘겨주었다.
"방 안에서 찾았다고 하는군요. 집주인에게 온 편지인 듯합니다. 꼬리가 잡힐 수도 있으니 확인 후 처분하십시오."
정석은 봉투를 받아보았다. 발신인의 이름은 적혀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글씨체가 어쩐지 낯이 익었다. 정석은 이전까지 뭔가 아련하게 머릿속을 흘러가던 생각이 정리되는 기분을 맛보았다. 그는 읽지도 않고 그대로 품에 쑤셔 넣었다.
"한 가지 부탁이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남자 하나를... 처리해주십시오."
"남자? 어떤?"
정석은 예전에 자신이 세 들어 살던 집의 주인 이름을 댔다. 쿠보는 수첩을 꺼내 주소와 이름을 받아적었다.
"한국으로의 출장이라. 오랜만이군요. 2주 이내로 결과를 알려드리지요."
"누굴 사용하든 최대한 잔인하게... 아니, 아니다. 내가 직접...."
쿠보는 횡설수설하는 정석을 한번 쳐다보곤 말했다.
"오늘 하루는 어디 가지 말고, 누구를 만나지도 말고 저희가 모시는 대로 차를 타고 가서 숙소에만 계십시요."
"숙소에만요?"
"술을 좀 넣어드리겠습니다. 독한 걸로.... 그리고 여자도 하나 넣어드리죠. 그게 도움이 될 겁니다."
쿠보의 말대로, 정석은 자신이 묵던 호텔방으로 돌아갔다. 쿠보의 부하들이 문을 지켰다. 정석은 나갈 생각도 없었고 쿠보가 가져다준 독주를 거절할 생각도 없었다. 정석은 호텔 방에 틀어박혀 내리 이틀을 술만 마셨다. 내쉬는 숨까지 알코올로 물들인 후에는 말도 통하지 않는 일본 여자와 진한 섹스를 나눴다. 그렇게 자신의 안에 있는 것들을 모두 쏟아낸 후, 그는 술을 끊고 식사를 시작했다. 정석은 쿠보에게 뒤처리를 일임하고 일본을 떠났다.
그가 한국에 돌아와 집에 들어섰을 때는 이미 한밤중이었다. 집안은 조용했다. 마치 사람이 살지 않는 집 같았다. 아이들의 방문을 열어 확인해보니 모두 침대 위에서 쿨쿨 자고 있었다. 정석은 이불을 걷어차고 자는 태근의 이불을 바로 해주고 방에서 나왔다. 안방에 들어서자, 코트를 입고 침대에 걸터앉아 있는 미자가 보였다. 그녀는 서글픈 표정으로 정석을 마주 보았다.
"오는 거 보고, 가려고 했어요."
"이 늦은 시간에 어딜?"
"어디든지요. 아마도 아저씨는 이제 내가 곁에 있는 걸 받아들이지 못할 테니까."
정석은 일본에서의 일을 미자에게 말하지 않았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녀는 이미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이미 알고 있었다. 정석이 일본으로 가기도 전에, 그 사실을 모두 알고 있었다. 그래서 정석에게 가지 말라고 했던 것이다. 정석은 자신의 추측을 미자에게 털어놓는다.
"인애를 일본으로 보낸 건, 자네의 판단이었나?"
"네."
이번에도 대답은 빨랐다. 정석의 질문이 뭔지 알고 있다는 듯 너무도 선선히 인정해버렸다. 쿠보가 발견한 편지는 미자가 인애에게 보내는 것이었다. 미자는 자신이 뺑소니 사건을 모두 목격했으며 그 범인이 인애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뉘앙스로 편지를 보냈다. 인애는 그걸 보고 한국을 떠난 게 분명했다. 뿐만 아니라, 정석이 그녀를 추적하고 있다는 사실도 알려주는 편지가 여럿 있었다. 정석이 윤희를 시켜 행한 추적을 무위로 돌리는 짓이었다. 그렇게 오랫동안 추적했는데도 쉽게 잡지 못한 이유는 멀리 있지 않았다.
"왜 그랬지?"
"아저씨가 그녀를 만나지 않았으면 했으니까요."
"인애가 날 죽인다고 했던 이야기는?"
"네. 거짓말이었어요."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하는 미자의 얼굴을, 정석은 후려치고 싶은 걸 간신히 참아냈다. 그에겐 가장 궁금하면서, 또한 가장 힘겨운 질문이 남아있었다.
"자네가 가진 그 아이는........."
정석은 목이 바싹바싹 타오르는 걸 느꼈다. 단어 하나하나, 말 하나하나 꺼내기가 이토록 힘겨운 줄 몰랐다.
"정말, 내 아이인가?"
"네."
"거짓말하지 마!!!"
분을 참지 못한 정석은 벽에 걸린 거울을 후려쳤다. 와장창 소리가 나며 거울이 깨져나갔고 정석의 손에서는 핏물이 배어 나오기 시작했다.
"인애는... 인애는 내가 무정자증이라고 했어. 씨 없는 수박이라고 했다고!"
흥분한 정석과 달리 미자는 차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정자증이라고 해도, 정자가 아예 없는 게 아니에요. 수가 지극히 적은 거지. 운이 좋으면 아이를 가질 수 있어요."
"어찌 되었건!"
"이상하네요."
미자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녀는 정석에게 다가오더니 주머니에서 붕대를 꺼내어 정석을 손을 감아주기 시작했다. 왜 붕대를 주머니 따위에 넣고 있는지, 정석은 묻지 않았다. 아니, 묻고 싶지 않았다. 미자의 행동 하나하나를 따져 묻기 시작하면, 그녀를 상대하는 자신에게 과연 자유의지가 존재하는가 궁금할 지경이니 말이다.
"아저씨는 태근이와 효진이를 결국 아저씨 아이로 여기기로 결심했어요. 그렇지만 제 뱃속의 이 아이는 그렇게 하지 않을 작정이군요. 아마도 여태껏 저 아이들과 함께 해온 시간이... 그런 결정을 내리게 했겠지요."
"모든 게... 모든 게 그렇게 명확하고... 본 대로 행동하고... 넌 그런 거냐...."
"글쎄요. 저도 절 모르겠어요. 어쩌고 싶은 건지. 어쩌면 아무것도 안 하고 싶은 건지..."
꼼꼼하게 붕대를 감은 그녀는 그대로 정석의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정석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말해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누구인지... 나에게 말해줘. 그럼, 나도 널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아."
"거짓말 하시는 군요."
"거짓말이 아냐! 정말... 내 아이로 생각하고 같이 키우겠다."
그러자 미자는 가만히 고개를 들고 정석을 마주 보았다.
"내가 아저씨랑 결혼해주는 조건, 기억해요?"
정석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고갯짓 하나도 그에게 버거웠다.
"네가....... 무슨 짓을 해도....... 화내지 않겠다고 약속했지."
"그 약속을 지켜주세요."
이쯤 되니, 정석은 화도 낼 수 없게 되었다. 그는 자기 자신을 타이르듯이 말했다.
"나는 화내지 않아. 결코... 결코 화내지 않아."
정석은 자기 자신에게 각인시키듯 그렇게 여러 번 되뇌었다. 미자는 상당히 뜸을 들였다. 그녀는 두 손을 들어 자신의 배를 어루만졌다.
"이 아이의 아빠는...."
미자의 대답은 늦었다. 그녀는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는 것처럼 보였다. 그때였다. 누군가 열려 있는 안방 문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어? 누나....왔어요?"
등 뒤에서 아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순간, 정석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는 고개를 돌리고 싶지 않았다. 그가 고개를 돌려 방금 방으로 들어온 이를 확인했을 때, 미자와의 약속을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화를 내지 않겠다는 약속을 도무지 지킬 수 없을 것 같았다.
"태근아."
그런 정석의 마음에 결정타를 날린 건, 미자의 차분한 목소리. 영문을 모르는 태근이가 그녀에게 다가오자 그녀는 두 손을 뻗어 태근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녀는 고개를 들어 정석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정석의 질문에 대답했고, 그리고 정석의 기분도 잘 알고 있었다. 정석이 그녀로 하여금 자신의 곁에 머무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걸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럼, 난 가볼게요."
"그....그래......가...가라...."
이 대답을 하지 않으면, 자신이 터져버릴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일본에서부터 무너지기 시작한 그의 내면이 흩어진 잔해가, 마치 믹서기에 넣고 갈려지는 것 같은 기분이다. 커다란 바위가 자갈이 되었다가 다시 으깨져 모래가 되듯, 그리 머릿속에서는 무엇 하나 제대로 온전하게 남아있지 않는다.
"누나...어디 가요?"
잠이 덜 깬 눈을 비비며 나온 태근이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미자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미자는 빙긋 웃으며 태근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바람 좀 쐬러."
"밖에 추운데?"
"그러니까 나가는 거야."
그녀는 여행 가방을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태근이가 신발을 꿰어신으며 자기도 가겠다고 따라 나섰다. 정석은 팔을 뻗었다. 태근은 자신의 팔을 붙들은 아버지를 올려다보며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아빠, 왜요?"
"가지 마라."
"네?"
"미자 혼자 가게 내버려두어."
무겁고 낮은 정석의 목소리에서, 태근은 덜컥 겁을 집어먹었다. 태근은 팔을 크게 휘둘러 정석의 손을 뿌리치고 마당으로 달려나갔다. 아들이 자신을 팔을 뿌리칠 만큼 자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 정석이었다. 그리고 미자에게 아이를 준 게 태근이라면... 정석은 왜 굳이 미자가 자신과 결혼했는지 알 수 없었다.
"누나! 누나!!"
한 때 장미로 가득 찼던 정원에서는 태근의 외침이 들려오고 있었다. 눈보라가 창문을 때리고 있었다. 서둘러 달려나간 태근이었지만 그는 미자를 찾을 수 없었다. 그녀는 보이지 않았고 밤의 어둠은 깊었다. 태근은 목놓아 울었고 정석 역시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
*
다음 화에 외전이 종료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