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더블데이트-186화 (186/4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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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 장미정원

여자는 정석의 몸 아래에 깔린 채 갖은 교성을 질러댔다. 정석은 깊숙이 찔러 넣은 채 사정하고 나선 그대로 몸을 떼버렸다. 얼굴이 반반하고 몸매가 좋아 몇 번 만난 후 침대까지 끌어들이긴 했지만, 계속 데리고 있을 타입은 아닌 것 같았다. 침대에서 내려온 정석은 곧바로 담배를 꺼내 물면서 지갑을 열었다. 그리고 여자에게 물었다.

"얼마지?"

그러자 조금 전까지 쾌락 가득한 표정을 짓고 있던 여자의 얼굴은 급히 어두워졌다.

"네? 회장님? 얼마라니요?"

정석은 시큰둥한 표정으로 백만 원짜리 수표 세 장을 꺼내 여자 옆에 내려놓았다.

"다른 사람들 귀찮게 하지 말고, 이걸로 어디 해외에 가서 놀다 오기라도 해. 난 이만 간다."

"회장님! 전 그게... 아니, 이런 걸 받으려고 이런 게 아니라 회장님을..."

"날? 날 뭐? 사랑하기라도 한다고 말하려는 겐가?"

여자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정석을 비웃기는커녕 어떤 표정조차 짓지 않았다.

"솔직히 말해봐. 날 사랑하는 게냐, 아니면 내가 가진 돈을 사랑하는 게냐."

"저... 저, 그런 애 아니에요?"

"그런 애? 그런 애가 어떤 앤데? 참고로 난 너 같은 년을 일주일에 하나씩 따먹고 있어. 쓸데없는 소리를 할거면 입 열지 마라. 시끄러우니까."

정석은 그대로 호텔 방을 나가버렸다. 뒤에 남은 여자가 뭔가 소리 질렀지만 정석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문 밖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에게 손짓하자 한 명은 차를 준비하기 위해 밖으로 달려갔고, 다른 한 명은 방으로 돌아갔다. 수표를 챙기고 있던 여자는 그의 에스코트를 받아 어디 먼 곳으로 가게 될 것이다. 밖으로 나와 차에 올라탄 정석은 잠시 후회했다.

'괜히 옛날 생각나서... 별로 영양가 없는 년을....'

조금 전까지 정석이 올라타고 있던 여자는 아주 예전, 정석이 작은 물류회사 하나를 운영하며 새벽부터 저녁까지 일하고 있을 때, 그를 종종 골탕먹이던 현장소장의 딸이었다. 지금은 그런 건설회사 서너 개 정도는 너끈히 만들거나 없애버릴 수 있는 정석이었다. 과거에 자신을 귀찮게 하던 여자를 굳이 건드린 건 아직도 그의 안에 어떤 치기가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석은 자신의 엽색에 크게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어차피 부어도 부어도 씨도 없을 터인 자신에게 있어, 섹스란 그저 의미 없는 장난질에 불과했다. 쾌감은 그를 잠시나마 달아오르게 했지만, 사정 후에 몰려오는 허탈감은 자위보다도 몇 배 더 심했다. 한 번 잔 여자와 두 번 만나는 일은 별로 없었다.

도로를 따라 달리던 차가 신호에 걸려 잠시 멈춰 섰다. 창밖을 바라보던 정석의 눈에 꽃집 하나가 들어왔다. 앞치마를 두른 점원이 커다란 장미다발을 만들고 있었다.

'장미...인가.'

장미를 보니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수행원을 시켜 장미를 사오게 한 후, 차를 돌리라고 말했다. 잠시 후 그를 태운 차는 어떤 아파트 단지에 도착했다.

*

딩동- 딩동-

현관벨이 울리자 미자는 외쳤다.

"안 잠겼어요."

문은 바로 열리지 않았다. 밖에 선 이는 들어오길 주저하는 것 같았다.

"어차피 들어올 거, 빨리 들어와요."

문이 열렸다. 거기에는 장미로 가득한 꽃다발을 손에 든 정석이 서 있었다.

"지나가다... 들렀어."

"그렇군요. 지나가다, 2년 만에 들르시는군요."

정석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어차피 미자의 이런 말투는 당연히 각오하고 찾아왔다. 그는 준비해 온 말을 늘어놓았다. 변명이고, 이미 미자가 충분히 알고 있을 이야기이긴 하지만 그래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정원에 장미가 많이 피어서, 네가 좋아하던 게 생각났다. 그리고 조만간 이사 갈 생각이라... 이게 정원의 장미를 볼 수 있는 마지막이라 생각했어."

"어머. 로맨틱도 하셔라. 그렇지만 이건 제가 정원에 심었던 품종이 아닌 걸요."

"....사실은 그냥 사온 거라네. 지금 날 비꼬는 건가?"

"그럴 리가요. 꽃은 죄가 없어요. 주세요. 그리고 여기 서서 이야기하기 뭐하잖아요. 들어와요."

정석은 안으로 들어섰다. 구수한 된장 냄새가 코를 찔렀다. 미자는 두르고 있던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아저씨가 좋아하던 된장찌개로 했는데, 괜찮죠?"

".......밥은 먹지 않을 거야."

"라고, 아저씨는 대답하지만 결국은 먹게 되죠. 왜냐하면 방금 전까지도 열심히 체력을 소모하신 데다가 조금 있다가."

그 순간, 정석의 배에서 꼬르륵거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 큰 소리가 아니었지만 미자가 말을 딱 멈추고 이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기에, 아주 선명히 들렸다. 미자는 손가락을 튕기며 빙긋 웃었고 정석은 한숨을 푹 쉬었다.

"그래. 내가 졌다. 휴우. 자네와의 대화는... 당최 적응이 안 돼."

"적응이 되기도 전에, 날 내쳤잖아요."

식탁에는 이 인분의 식탁이 차려져 있었다. 정석은 별 수 없이 미자의 맞은 편에 앉아 식사를 마쳤다. 두 사람은 별다른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식사를 마칠 때쯤 방에서 애 울음소리가 났다.

"저런, 깼나 보네."

미자는 숟가락을 내려놓고 방으로 가서 아이를 안고 나왔다. 잠이 덜 깬 아이는 미자의 목덜미에 대고 얼굴을 부비며 칭얼거렸지만 미자는 능숙하게 어르고 달랬다. 정석은 수저를 놓고 그 모습을 빤히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가 울음을 그칠 때쯤 미자는 정석을 보며 말했다.

"한번 안아보겠어요?"

정석은 고개를 저었다.

"싫어. 내 딸도 아닌데."

"그래도 이름은 지어주셨잖아요. 유진이라고 하기로 했어요. 괜찮죠? 물론 박유진은 아니고 진유진이지만."

유진이가 태어나고 얼마 되지 않아 미자의 집으로 아기용품 한 꾸러미와 유진이라고 적힌 종이카드가 함께 배달되었다. 누가 보냈는지 적혀있지는 않았지만 미자는 알고 있었다. 카드에 적힌 이름대로 출생신고를 했다.

"그리고 나도 이름을 좀 바꿔보려구요. 미자는 너무 촌스러운 것 같아서 유미로 하기로 했어요. 유진이 이름에 유자가 들어가는 게 예뻐 보여서."

그제야 아이는 고개를 들고 낯선이를 쳐다보았다. 아이답지 않게 또랑또랑한 눈빛이었다. 아이는 마치 관찰하듯 정석의 면면을 주의 깊게 보았다. 정석은 그 시선이 불편했다. 그래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가겠어."

"잠깐만요."

미자 - 아니, 이제부터 자신의 이름을 유미라고 하기로 한 그녀는 아이를 보행기에 앉혀주었다. 정석이 그 모습을 쳐다보자 유미는 웃으며 말했다.

"애가 두 돌 되어가는데도 아직 못 걷더라구요. 발육이 좀 더딘 모양이에요."

"그런가."

"그렇지만 영리한 아이로 자랄 테니 크게 걱정은 안 해요."

유미는 정석을 현관까지 배웅했다. 정석은 유미를 쳐다보고 뭐라 인사해야 하나 고민했다. 그러나 유미의 말이 먼저였다.

"아직도 궁금해요?"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지. 자네가 왜 굳이 나와 결혼을 하고... 그리고 태근이를.... 그렇게 한 건지."

"혹시 개코원숭이라고 알아요?"

정석은 오랜만에 만난 유미와의 대화가 퍽 불편했다. 같이 살 때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지만 몇 년 만에 만나니 그녀의 뜬금없는 화제제시에는 따라가기 여전히 벅찼다.

"몰라. 설명해봐."

"어떤 책에서 봤었는데요. 개코원숭이 암컷은 설령 임신을 하더라도 다른 수컷들과 관계를 가진다고 해요. 그래야 나중에 그 새끼가 태어났을 때, 암컷과 관계를 가진 수컷들이 그 새끼를 미워하지 않는다고 하더군요."

정석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화를 내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이상하게도 화가 나지 않았다.

"내가 원숭이로 보여?"

"호호호. 어차피 모든 남자들은 다 짐승 아니었던가요?"

"그래... 설령 짐승이라고 해도, 저 유진이라는 아이를 내가 박해하거나 하지는 않아."

"난 죽어요."

"뭐?"

자신이 죽는다는 이야기를 하면서도, 유미의 표정은 침착했다.

"저 아이가 성년이 되는 모습을 나는 지켜볼 수 없어요. 그래서 조바심이 났어요. 그리고 내가 없는 곳에서.... 저 아이를 지켜줄 수 있는 사람이 최대한 많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나와 결혼했나? 설령 태근이의 아이라고 해도, 나와의 결혼에서 생긴 아이니까 내가 돌봐주리라 생각했나?"

미자는 대답 대신 빙긋 웃었다. 정석은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또 잊고 있었군. 자네한테 이유나 원인 같은 걸 물어보면 안 된다는 걸. 그러면... 저 아이가 성년이 되면 나한테 다시 보낼 텐가?"

"모르겠어요. 그건. 그때 가봐야 알 수 있어요. 아저씨가 말했죠? 아직 오지 않았으니까 미래라고. 혹시 변화가 있지 않을까 싶어 이름도 바꿔보기로 했어요. 그렇게 난 모든 걸 믿고 기다리고 있어요. 최대한 많은 사람을 만나보고, 그중에서 가장 미래가 불확실한 사람을 찾아 유진이를 그와 함께하도록 하겠어요. 그때까지 못 찾으면, 역시 아저씨에게 부탁하는 게 제일 낫겠죠. 친절한 분이니까."

정석은 웃었다. 웃겨서 웃는 게 아니었다. 하도 어이가 없다 보니 이제 웃음 밖에 나오지 않는 것이다. 몇 달 만의 웃음인지 몰랐다. 미자는 그런 정석을 보며 말했다.

"어차피 아저씨도 지금 불확실성을 찾아 헤매고 있지 않나요? 듣기로 요새 사방에 씨 뿌리고 다닌다고 들었어요. 아예 그럴 목적의 애들까지 모아서 길러내기도 하신다고....그 애들 중에 임신한 애들도 있다면서요."

"그년들은 죄다 다른 곳에서 만들어와서 내게 뒤집어씌울 뿐이야."

미자는 가볍게 혀를 찼다.

"아저씨도 참 딱하네요. 여자를 믿지 못하면서도, 또 그 믿음을 여자에게서 얻으려고 하시니 말이에요."

"이게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흐음. 저도 책임이 좀 있으려나요."

"말이나 못하면... "

정석이 아무리 툴툴거려도, 미자의 웃는 얼굴을 바꾸어놓지는 못했다.

"마음이 편해지고 싶으면 애초에 이렇게 생각하세요. 아저씨의 첫째 부인이든, 둘째 부인이든... 그리고 저까지. 아무도 부정을 저지르지 않았어요. 아저씨가 무정자증이긴 하지만 그래도 다들 운 좋게 회임에 성공했어요. 어때요?"

"그게 아니라... 셋 다 부정을 저질렀다면?"

"그건 뭐, 너무한 일이군요."

미자는 정석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그대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하곤 문을 닫았다. 닫힌 문을 한참 동안 지켜보던 정석은, 깊이 후회했다. 미자를 만나러 온 자신의 판단을 저주했다. 그녀와 이야기를 하면 보통의 상식이 통하지 않는다. 모조리 자기가 중심인 그녀이기에 말만 하면 휘둘리기 마련이다. 과거의 일이 현재와 미래에 영향을 끼친다는, 지극히 당연한 상식도 무너진다. 미래에 맞추어 미리 행동하고 그에 대한 준비를 하는 그녀다. 정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정말로, 이제 정말로, 그녀가 자신을 찾아오기 전에는 다시는 그녀를 자신 쪽에서 찾지 않기로 결심했다. 정석은 주차장에 세워둔 차로 걸어가며 생각했다.

'어디로 가야 하나.'

미래를 알 수 없는 자기 자신을 불안하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다. 미래를 보는 미자가 부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수많은 선택과 수많은 갈림길에서 고민하는 것이 진짜 인간의 삶이 아닐까. 그렇게 생각했다. 정석의 머릿속에 제일 먼저 떠오른 곳은 장미로 가득한 정원이었다. 그곳엔 그의 아이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더블데이트 외전, 장미정원> -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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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전이 끝났습니다. 재미있게 보셨나 모르겠네요.

현재 시점에서는 엄청난 자산가인 박정석과 미래를 보는 여자 진유미(미자)의 옛날 이야기를 써보고 싶어서 시작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에 유진이를 비롯한 태근, 효진의 출생의 비밀도 모두 포함되어 있고요. 앞서 뿌렸던 떡밥들, 왜 태근은 교사 되는 것에 열중하는가, 왜 효진이와 유진이는 고스톱 패턴이 비슷한가, 왜 하영이는 정석의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가 등등의 이유를 설명하는 이야기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극중에서 언급한 적은 없지만, 유진이와 효진이는 둘다 보배 진(珍)으로 같은 한자를 씁니다. 이것도 초반에 이야기할까 하다가 너무 티가 나는 것 같아서 뺐습니다.

예전에는 이걸 "프리퀄"이라고 불렀습니다. 최한석이 나오기 이전의 이야기라는 거죠. 한석이가 나오냐 안 나오냐에 대해 독자분들의 호오가 많이 갈린 것 같습니다. 사실, 기획만 하고 아직 쓰지는 않았습니다만, 어떤 특정 루트에서도 "프리퀄"이 하나 더 발생합니다. 이번 프리퀄 <장미정원>과 비슷한 시기의 이야기입니다. 쓰게될지 말지는 아직 미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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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편의 1회차 엔딩인 159회에 댓글로 투표를 실시했습니다. 그 결과

1번 ++++

2번 +

3번 ++

5번 ++

6번 ++++++

7번 (빵표)

라는 결과가 나왔으며, 다음부터는 6번 : 68회 - "학교에서 교생일을 하고 있는 한석입니다. 분기점은 선영의 집을 일요일에 찾아간다 / 지금 바로 간다" 여기서 지금 바로 가는 루트의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이번에 시작하는 이야기는 누군가의 특정 엔딩이 아니고 진행 루트이며, 말미에 한 번도 분기가 발생해서 두 가지 이야기로 나뉩니다. (7번루트의 히로인 ㅇㅇㅇ야, 지못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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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좋은 밤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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